2018년 1월 14일 주현절 후 2주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신 사랑의 하나님, 복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새해를 맞는 감격과 다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맡겨진 사명에 충성하고자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부름 앞에 겸손한 자세로 응답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갈3:27)

 

 

  1. 또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사사기에 자주 등장하는 문구가 있다. 무엇일까?

사사기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악행을 저지르고, 이웃나라의 손에 넘겨졌다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원을 받는 내용이 여러 차례 반복된다. 최소한 7번이다.

 

자주 등장하는 문구 :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또”라는 말이, 우리에게 와 닿지 않는가?

 

오늘 잠언의 말씀을 암송해보자.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생명의 길이라.”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가 우리 인생의 등불이요, 빛이요, 생명의 길이다. 하나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 같은 인생의 섭리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이스라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통해, 가라고 하면 가고, 서라고 하면 서면서, 광야의 길을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어떻게 되었는가?

 

,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그리고 오늘의 말씀을 되뇌어 보라.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생명의 길이라.”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생명의 길이라.”

 

어느 쪽으로 우리의 모습이 기울어지는가? ‘명령, 법, 훈계’만 들으면 어떤가? 달갑기만 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이것 없이, “등불, 빛, 생명의 길”이라는 영광과 열매만 취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의 영적인 연약함이 “또”라는 말과 함께 얼마나 허약한지를 깨닫게 한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또 불평하고, 또 원망했다. 우리는 또 의심하고, 또 흔들리고, 또 무너진다. 그러나 ‘명령, 법, 훈계’를 달갑게 여기고 굳건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복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사기가 전하는, 이스라엘이 반복하는 모습은 그마 만큼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를 따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다른 말로 바꿔 말할 수도 있다. 순종과 충성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나님의 명령은 등불과 같기는 한데, 나의 익숙한 습성과 고집이 하나님의 명령을 외면한다. 하나님의 법은 빛과 같은데, 나의 생각과 판단이 하나님의 법을 거부하게 만든다. 훈계의 책망을 달게 받아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들으면 기분이 좋지 않고, 성내고 분내며 실족한다.

 

그래서 사사기 속의 이스라엘이 또 하나님의 목전에 악을 행하고, 수차례 계속해서 같은 패턴으로 남의 손에 넘겨졌다가 건짐을 받은 것이 아닐까?

 

 

  1. 명령에 불복하는 연약함

간만에 재밌는 얘길 드릴 생각이다.

 

. 해양경비대 주제가 – ‘물 위에 생명줄 던지어라‘ (500)

. 서예가들의 주제가 –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304)

. 며느리들이 좋아하는 찬송은 –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험이(시어미) 오나 겁없네‘ (325)

 

. 소방서에서 싫어하는 찬송 – ‘산마다 불이 탄다‘(592)

. 컨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찬송 – ‘너 시험을 당해 범죄치 말고‘ (342)

. 감방에 구속된 죄수들의 불평찬송 –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310)

애송찬송 – ‘보내주소서 보내주소서‘ (495)

. 대머리들이 제일 싫어하는 찬송 – ‘반짝반짝 빛나게 비치리로다‘ (564)

 

영적이거나 신앙적으로는 어떤가? 사람에게 미주알고주알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문제를 아뢰고 주님께 맡기라는 말씀과 명령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남편에 대해 실망하고 존경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아내에게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반대로 바가지나 긁고 잔소리에, 살림살이도 못하는 아내에 대해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런 말씀을 듣는다면 어떨까? 복수와 앙갚음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말씀, 자기는 베풀지 않으면서 남의 것 받아먹기만을 바라는 사람을 얄밉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도 자기의 잔치에 청하라고 한다면….

 

잠언이 더하는 말이 있다. 젊은이가 여인의 유혹을 이겨야 하는데, 고운 말과 호리는 말에 빠져 쇠사슬에 매여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소와 같다고 말씀한다. 정욕과 욕심에 어리석어진 인간의 모습이 이와 같다.

 

사사기의 결과나 결론과도 같은 구절,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 혹은 누군가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등불이며, 법은 빛이라지만 바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순종하지 못하고 자기 고집대로 하려고 하거나 의(義)를 드러내려고 한다. 훈계의 책망은 생명의 길이라지만 오히려 못된 망아지처럼 자기의 길과 뜻을 고집한다.

 

그래서 말과 언변으로는 권면정도는 할 수는 있지만 설득하고 달라지게 할 수 없다. 참 힘들다. 차라리 ‘범사가 잘됨 같이 그 영혼이 잘되기를’ 기도하며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신앙은 분명 안되는 것 같아 보이고 안 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되는 역사이다. 그것을 구별하는 눈이 믿음의 눈이요, 주님께서 주시는 소망의 눈이다. 손바닥만한 구름에서 큰 비가 올 것을 보았다. 반석에서 물이 솟을 줄 몰랐지만 솟아올랐다. 마라의 쓴 물에 가지를 던졌더니 마실 수 있는 단물이 되었고, 하나님은 울고 있는 하갈에게 우물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을 주셨다. 이밖에도 무수히 많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명령에서 시작됐고, 법을 지키면서 발전했으며, 훈계를 받아들이면서 주신 복을 지켜나갈 수 있었다.

아브라함에게는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는 명령이 있었고,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아셨다. 물론 아브라함에게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음으로 이삭을 주셨고,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이 되어주셨다. 복을 주셨다. 아니 복이 되게 하셨다. 인생의 등불이 되어주셨다.

다윗은 하나님의 법을 주야로 사랑함으로 무수한 시련이 오고, 대적자들이 인생의 골짜기에서 그의 목숨을 노리며 인생을 캄캄하고 어둡게 만들었을 때, 빛이 되어주셨다. 사울에게 보복할 수 있었지만 기름부음 받은 자의 목숨을 함부로 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따름으로,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에 앉히셨다. 깊은 수렁과 기가 막힐 웅덩이에서 건지셔서 평탄한 곳에 세우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갈 때,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했다.”고 고통을 토로한다. 그러나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27:1) 하나님은 그에게 빛이 되어주셨다. 시냇가의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음과 같이,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밧세바를 취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나단을 통한 사람의 막대기와 인생의 채찍으로 훈계하시는 하나님의 훈계를 달게 받았을 때, 그 왕위를 빼앗지 않으셨으며 그의 왕위를 더욱 견고히 하셨다. 하나님께서 친히 지켜주셨다.

 

  1. 힘과 용기가 되시는 분

우리에게 하나님의 명령과 법과 훈계를 따라갈 마음과 힘이 있는가?

이 때문에 좌절하고 용기를 잃고 낙담한다. 자기의 힘으로는, 의지로는, 너무나도 도달하기 어렵다. 그러나 히브리서4:12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과 생각과 뜻을 판단하시나니.”(히4:12)

 

이 시간, 하나님은 날 선 검보다 예리한 말씀의 능력으로 우리를 고치시고 치료하기를 바라신다. 우리의 혼과 영 깊은 곳까지 뿌리내리고 있는 불신앙과 불순종이라는 죄의 뿌리를 도려내시고, 관절과 골수까지 자리하고 있는 자기 의와 고집과 교만과 강퍅함을 찔러 쪼개길 바라신다. 이것이 은혜다.

 

사람에게 받은 마음의 상처가 깊어서 온전하지 못하다. 켜켜이 쌓인 실패와 절망이 깊어서 쉽게 무너진다. 뜻하지 않은 인생의 질곡을 넘느라 멍들고 다쳐서 작은 것에도 염려하고 근심하고 불안해하는 심령을 강건케 하길 바라신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온 여러분에게 성령으로 임하길 바라신다.

성경은 이미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요, 성령의 집이 우리 안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 안에 성령이 가득 차기를 바라신다. 다만 소멸시키지 않고 지키길 바라신다.

딛 3:6]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롬 5: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데살로니가전서5:19은 그 성령을 소멸시키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왜 소멸시키지 않도록 힘써야 할까?

이솝우화 중에 노루가 포수에게 쫓기다가 잎이 무성히 우거진 나무숲속에 숨었다. 포수가 노루를 찾지 못하고 두리번두리번 거렸다. 나무숲에 숨은 노루를 찾을 수 없었다. 노루는 안도했는데,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그래서 눈앞에 보이는 나뭇잎을 먹기 시작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가 은혜를 채우지는 못하고 먹기만 하고, 성령을 소멸해 간다면 결국, 우는 사자와 같이 집어 삼키려는 대적 마귀에게 우리의 영혼과 심령이 삼킨 바 되는 격 아니겠는가?

 

엡 3: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연약하고 상처가 있고 불완전한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와 훈계를 따라 더욱 하나님의 영광이 넘치기를 주님은 바라신다. 성령이 우리를 새롭게 하시며 힘과 능력을 부어주시고 상한 심령은 회복되고, 상처입은 심령은 고침받기를 바라신다.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의 마음을 고치소서.

우리에게 성령을 채우소서.

우리를 새롭게 하사 변화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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