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난(難), 왜 넌(non) (사도행전19:1-7)

왜 난(難), 왜 넌(non) (사도행전19:1-7)

 

 

 

 

2018년 1월 7일,  주현절 후 1주, 신년주일

시간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 신년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희망을 가득 안고 새해의 첫 단추를 채우는 신년주일에,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기로 새롭게 다짐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저희들의 마음 중심을 기뻐 받아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겁내지 말라 내가 예로부터 너희에게 듣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알리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사 44:8)

 

  1. 헌신과 돌봄의 교회

이 시간 좋으신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빈다.

지난 연말 방송계 시상식을 보니까, 어느 해 보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장면들이 많았다. 매년 있는 일이라지만 새삼 크게 느껴졌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말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고백이 방증하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을 하든 그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진심으로 있지 않고서는 어렵다.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주님 나타내려는 용기를 가진 이들마다 결실을 맺는 삶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더욱 도우시고 힘과 능력이 되어주신다. 올해 그와 같은 해가 되기를 바란다.

 

올해 저의 목회방향과 다짐과 각오를 말하고 싶다.

 

시인 유안진은 헌혈을 하고난 뒤의 소감을 ‘봄비 한 주머니’라는 시로 노래했다.

 

320밀리리터짜리 / 피 한 봉다리 뽑아 줬다. / 모르는 누구한테 봄비가 되고 싶어서 /

그의 몸 구석구석 속속들이 헤돌아서 / 마른 데를 적시어 새살 돋기를 바라면서 //

 

시인 유영환은 일흔을 훌쩍 넘겼다. 가장 좋은 인생을 성찰하다가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에 힌트를 얻어 ‘잠언’이라는 시로 그 인생의 소명을 재발견했다.

 

흐르는 물은 / 생명을 잉태하고 / 포옹하면서 생명을 지키는 /

자연의 신실한 순종자다. //

 

이런 마음이 오늘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목회자로서의 제 마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생명에 새살 돋게 하는 능력으로 나타나길 바란다. 목회자로서 여러분의 영혼과 생명을 지키는 신실한 순종자로 올 한 해를 보내고 싶다.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은 사명과 소명으로 이 자리에 있음을 기억하라.

 

 

  1. 주현절

오늘은 교회력으로 주현절 후 첫째 주이자, 신년주일이다.

주님은 새해의 첫 주일, 신년주일 예배를 드리는, 우리와 협력자가 되어 함께 한 해를 열어가길 바라신다. 그래서 삶과 인생의 방향이 달라지길 바라신다. 새로워지기를 원하신다. 소망으로 나아가려고 애쓰지 못하고, 변화와 성숙을 위해 새로워지기를 결단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새해를 맞아도 여전히 예전이나 다름없다. 결코 새로울 수 없다. 과거의 연장일 뿐이다. 그러나 주님은 어제가 오늘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이 오늘을 결정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다시 한 번 마음의 각오와 다짐을 새롭게 하기를 바라신다.

강림절, 성탄절에 이은 주현절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에 드러낸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이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드러내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신기하지만 우연한 일로 여겼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지만 정말 구주로 믿고,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깨달으며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유익하고, 개인적인 목적이 있어서 따를 때가 많았다. 이는 눈 먼 믿음, 눈 먼 소망이다. 우리는 어떤가?

교회력의 가르침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모습은 감춰져 있기만 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그 모습을 드러내시고 활동하신다. 그 믿음의 눈, 영적인 눈을 뜨기를 다시 한 번 상기하라. 주님의 현존하심에 눈 뜬 사람은 자기 인생의 보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보화를 캐기 위해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다. 주님은 눈 먼 소망, 눈 먼 믿음을 뜨기를 바라신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길 바라신다. 임마누엘의 의미는 수호자와 같은 의미만이 아니라 협력자와 같은 의미다.

  1. 새로움으로 나아가는 길

주님의 현존하심과 협력자로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앞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깨달을 수 있는가? 결론은 성령으로 새로워지고, 그 충만함이 있어야 한다.

 

바울이 에베소에 다시 왔다. 에베소에 다시 오게 된 경위는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라. 그러나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이곳에 왔다가, 복음의 전초기지였던 안디옥에 다녀왔다.

에베소에 다시 왔을 때,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무엇이었을까? 아볼로의 사역에 흠집이 날 수도 있었다. 아볼로는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였다. 일찍이 주님의 관한 것을 배워 ‘열심’으로 주님을 전하려고 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요한의 세례만 알았다고 말씀한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새파란 그를 그들의 식사의 자리에 초대해서, 자존심이 상하거나 상처받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주었다. 이러한 배려들은 기독교인으로서 본받을만한 일이다. 아볼로는 또 다른 사역의 열정이 일어나 아가야로 건너갔다. 그리고 때마침 바울이 에베소에 왔다.

 

전임자의 사역을 헛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더 나은 것을 가르치는 것 같지만, 주의하라. 실상은 자기의 의와 자랑을 드러내려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른 데서 배운 신앙과 훈련을 자랑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반대로 다른 데서 배워온 신앙을 부정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교회는 새신자가 오면, 그가 신앙의 연수와 깊이가 얼마가 됐든, 무조건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고 한다. 마치 그 과정을 거쳐야만 명품 크리스천이 된 듯한 의식을 불어넣어준다. 그래서 정말 예수의 참제자가 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가 되었는가? 잘 모르겠다.

 

바울은 이런 점에서 조심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1. 거듭나게 하는 것, 율법 vs 복음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성령을 체험했는지 묻는다. 놀랍게도 성령의 계심도 듣지 못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면 어떤 세례를 받았는지 다시 물었다. 요한의 회개의 세례였다.

조심스러웠던 부분이 무엇일까? 그리고 난감했던 점은 무엇일까? 요한의 회개의 세례 단계까지 사람들의 신앙과 마음을 끌어 올렸던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틀에 갇혀서는 안 된다. 그런데 쉽게 이 틀에 갇히곤 한다. 게다가 세례 받고 깨끗해졌다는 영적 교만이 더해지면 그 틀을 깨려고 하지도 않는다.

새로운 것을 말해주거나 이 틀을 깨려고 할 때, 강한 반발심이나 다툼, 분쟁, 교리논쟁 등등 진통이 예상될 수도 있다. 상처를 주고받을 수도 있다. 고린도 교회가 대표적이지 않았던가?! 바울은 눈물로 몇 차례나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써야 했다. 그래서 난감했다.

회개라는 의미를 가진 말은 ‘메타노이아’이다. 그 말은 완전히 방향을 돌아섬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벗어났던 삶이 하나님을 향해 완전히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회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율법이다.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롬7:7). 물론 성령도 회개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요한의 세례’라고 하지 않고 ‘요한의 회개의 세례’라고 하는 것은 율법적인 측면의 회개였음을 짐작케 해준다.

난감했다. 미흡한 부분을 바로잡자면,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백지 같은 상태가 훨씬 더 유리하다.

 

그런데 율법적인 회개의 세례에 취해 있으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로마서 2:17절 이하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율법적인 회개에 취한 현상이 뭔가? 자기는 의롭다고 생각하고 타인을 정죄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스스로 점검해보라. 율법에 취해, 가정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교회에서 평화를 만들어가지 못하고 불화를 만드는 것 아닌가? 나는 얼마나 율법에 취해있는 사람인가 스스로 생각해보라. 율법을 극복하지 못하면 복음은 잡으려고 할수록 멀어진다.

가만히 따져보면, 신앙인들이 얼마나 율법과 도덕과 의의 기준에 민감하고 뼛속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 관계에서, 그리고 자기 속에서 이것이 갈등하고 문제를 유발한다.

어떤 사람은 자기는 도덕적이고 옳은데 타인은 비도덕적이고 그르다고 생각한다. 내로남불인 경우가 많다. 자기에 대해서는 관대하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엄격한 이중적 잣대를 가질 때도 있다.

자기 내부적으로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않고 올바르게 하려고 하는데, 또다시 반복된 모습에 죄책감을 갖고 하나님과 점차 멀어지는 경우도 있다. 율법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상은 여전히 율법에 매어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고 보면 사실 도덕적이지도, 율법적이지도, 윤리적이지도 못하면서 그런 줄 알고 살아간다. 남을 정죄하고, 스스로를 정죄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복음과는 점차 멀어진다는 것이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율법의 틀에서 괴로워했던 사람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7:19)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5)

 

 

  1. 거듭나게 하는 것, 성령

여러분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구원받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성령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그가 죄로 인해 무너지고, 율법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괴로워하고 있을 때, 그가 경험한 놀라운 체험이자 깨달음이 있다.

 

주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법이 그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고 있는 은총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롬8:1)

 

율법의 단계에서 그는 나아지거나 새로워지지 않는 자신의 모습과 삶에 대해 끊임없이 좌절했고 실망했다. 우리 역시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인생의 불행과 고통을 끊임없이 이어질 때가 많다. 그 속에서 타인, 아니 아주 가까운 가족, 자녀, 식구를 원망하고 불평하고 괴로워한다.

주중에 아내에게 조금 불퉁거렸다.

방송에서 올해는 무술년, 2018년, 개년이라는 멘트가 나왔다. 수지가 은지 언니의 띠를 묻는다. 닭띠. 정답. 그러자 자기의 띠를 묻는다. 힌트로 토끼 흉내를 낸다. 토끼띠. 정답. 그러면 엄마 띠는? 묻는다. 모르는 척하고 있으니까, 말 타는 흉내를 낸다. “아, 알겠다. 망아지” 아니라고 다시 맞혀보라고 한다. 이제는 달리는 흉내를 낸다. “아, 알겠다. 치타” 그러자 수지가 말한다. “자기 띠도 몰라?” “자기? 아빠는 호랑이 띠지!”, 수지 왈, “아니 아빠의 자기”, “아빠의 자기니까, 아빠를 말하는 거지. 아빠는 호랑이 띠.” 끝까지 말을 안하니까, “아빠의 자기가 누구겠어? 그것도 몰라? 엄마지. 어떻게 엄마의 띠도 몰라?” 졸지에 바보 됐다.

 

그 말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율법단계에서는 시시비비가 앞서는 것이다.

 

바울은 아볼로의 사역에 흠집을 내지 않으려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4절에서 조심스럽게 말한다.

“요한이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예수의 이름으로 받을 세례를 통해 한걸음 믿음이 더 성장하도록 조심히 이끌어주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실 때를 보니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달리 말하면 성령을 통해서 주님의 현존하심이 나타난다. 주님은 성령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며, 충만하길 원하신다.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가 어떻게 다른가? 요한의 세례에는 회개가 있지만, 예수의 세례에는 회개가 없는 것인가? 아니다. 단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율법으로 인한 회개와 성령으로 인한 회개가 다르다. 율법으로 인한 변화와 성령으로 인한 변화가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율법에는 정죄와 돌을 집어 드는 행위가 있지만 성령에는 용서와 돌을 내려놓는 행위가 있다. 율법은 대적하려고 하는 마음이 강하게 일지만 성령은 복음적인 소망들로 가득하다. 율법은 자기 노력과 의가 있지만 성령에는 하나님의 은총과 순종이 있다.

 

수지가 “아빠의 자기도 몰라?” 하는 말에,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 아닐까?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이렇다.” 보통 이런 식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나 때문에 저 사람이 저렇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성령은 이 단계에서 ‘내가 그렇지 뭐.’, ‘난 어쩔 수 없어.’, ‘결국 내 잘못이야.’ 이런 자기비하나 자기 푸념, 피해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오늘 말씀을 보라. 성령이 임했다. 그리고 그 역사가 나타났다. 오늘 주현절을 맞아,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까닭은, 이것 아닌가?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길 바라신다. 그 사모함을 가진 자 마다 얻게 된다.

우리를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신다. 변화와 새로운 마음을 갖도록 하나님의 은총을 선물로 주신다. 성령은 마른 뼈와 같이 생기를 잃은 이가 군대처럼 일어나 강하고 담대하게 하신다. 약할 때 능력이 되시며 절망할 때 소망을 주신다.

 

사실 우리가 율법과 복음에 대한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몸이 낯설어 한다. 그래서 두란노 서원에서 두 해 동안이나 가르치고 훈련시켰다. 저는 올해가 율법의 사람에서 복음의 사람으로, 자기 의가 강한 사람에서 성령으로 거듭나는 사람으로, 슬픔과 불행의 삶에서 기쁨과 행복의 삶으로 변화되어나가는 한해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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