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10일 강림절 2주
말씀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 강림절 둘째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온 세상이 흰 눈이 쌓이고 삼라만상이 겨울 추위로 오그라드는 때에, 따뜻한 주님의 품에 안기고 싶어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사랑의 온기로 차디찬 저희의 마음을 녹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요12:44-45)
오늘은 강림절 두 번째 “광야에서 길을 찾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 광야에서 길을 잃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광야에서 길을 잃은 이스라엘의 탄식이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와서, 과연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명성 그대로였다. 그러나 자신들이 차지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했다. 거기에는 자신들보다 장대한 사람들이 있었고. 비교하면 안 되는데, 자꾸만 비교하면 할수록, ‘약하다.’ 메뚜기 같았다. 그러자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됐다. 모세와 아론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대로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이제 와서 어떻게 되돌아 갈 수 있을까? 홍해를 건너왔고, 애굽의 군대, 말 탄자와 병거들은 그 바다에 수장됐다. 그러니 어떻게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수 있겟는가? 모세와 아론의 말을 믿은 게 더 후회스럽다.
광야는 현실적인 문제들과 직면해야만 하는 곳이었다. 먹을 것, 마실 것을 찾아야 했다. 잠 잘 곳을 비롯한 기본 생리적인 문제를 해결하기엔 그야말로 열악했다.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절로 한숨이 지어졌다. 아니 캄캄했다. 가족 중 누군가 아프기라도 하면 어쩔 것이며, 고된 여정에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쩔 것인가?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생존과 실존의 고통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어떤가? 이 시간 ‘광야의 이스라엘’ 이 말이 딱 자기의 심정인 사람은 없는가? 성경은 우리의 인생을 광야를 지나는 나그네와 같다고 종종 말하곤 한다. 누구나 걱정, 근심, 괴로움을 가지고 척박하게 살면서, 마지못해 하루하루 간신히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출애굽기나 민수기를 읽으면서 어떤 마음을 가졌는가? 참 어리석은 백성이라고 여겨본 적은 없는가? 하나님께서 매 순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피할 길을 내신다. 보호날개 아래 품으시고 심지어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신다. 그런데 매번 하나님을 의심하고 불평하고 불만을 터뜨리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가?
성경은 바로 우리의 인생, 신앙의 모습이, 이와 같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현실이 올무가 되어 내일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소망을 잊는다.
- 광야를 슬픔으로 걸었던 사람들
또 다른 측면을 생각해보자. 광야를 슬픔으로 걸어가야만 했던 사람들이 있다. 주전 587년, 바벨론에 의해 남왕국이 망하고, 웬만한 사람들은 굴비구름 엮이듯, 발에는 무거운 차꼬를 찬 채,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다.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먼저 끌려갔던 사람들은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고국이 완전히 패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훼파되고 불탔다는 소식은 바벨론까지 전해졌다. 기대와 바람은 완전히 무너졌다.
우리의 인생에서는 어떤가? 크고 작은 실수로 추락하고 실패를 겪는다. 다시 예전의 영화와 좋았던 때를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되돌이킬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경험한다. 가정이 해체되고 자녀가 탈선을 하고 불화가 계속 된다. 아무리 노력해도 악순환만 계속 된다.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단순히 길을 잃은 것이라면, 잠시 멈춰 서서 길을 찾으면 된다. 그런데 이 경험은 소망과 기대로 놓았던 다리마저 끊어지고 산산이 부서지는 절망의 경험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고국 크레타에 하선해서, 그 숨결을 맡으며 그 애잔한 기억을 이렇게 말한다.
“크레타의 땅에 있는 것이면 돌 뿌리 하나 나무 한 그루도 비극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유다 사람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던 날의 경험이 이랬을 것이다. 인생의 방황과 몰락, 떠올리기 싫은 상처와 아픔의 기억은 아마도 이럴 것이다.
- 길을 만들라.
광야에서 길을 잃은 이들은 어떻게 길을 찾아, 가나안 땅,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에 당도할 수 있었을까? 끊어진 다리는 어떻게 놓을 수 있으며, 저주와 멸망의 길은 어떻게 다시 구원과 회복의 길을 놓을 수 있는 것인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로서 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오늘의 말씀은 4복음서가 일제히 인용하며 외치는 말씀이다. 그마 만큼 중요하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말씀을 준비하면서 깜짝 놀란 것이 있다. 제가 새롭게 새삼 깨달은 은혜가 있다. 바로 하나님의 명령이었다는 것이다. 사람의 의지나 소망이 아니었다. 성서의 배경이 말해주는 것은 그것은 이미 끊어진 지 오래된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령하고 계시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길을 만들라.’
잠시 더 생각해보자. 뭔가 잘 돼야 한다는 것, 문제가 해결되고 행복을 찾는 것은 누구의 의지라고 생각하는가? 자기의 의지라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저마다 자기 방법대로, 사람의 생각대로 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자기의 방법이 문제를 키웠는가? 해결했는가? 물론 지혜롭게 문제를 잘 해결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위기를 기회로 만든 경우에 해당한다. 길을 잃은 이에게는 사실 방법도 없다. 그런데도 자기 방법을 고집하고, 내려놓지 못한다. 그리고 더 힘들어지고 악화되기 일쑤다.
예를 들면 자녀를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훈계하면 곧 뉘우치고 돌아올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잔소리로 여기고 노여움만 심겨준 꼴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그 반발심 때문에 더 엇나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세상일이 다 자기 뜻대로 마음대로 되지 않더란 이야기이다.
비결은 여기에 있다. 열쇠는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임을 인지하는 것, 말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깨닫고 믿는 확신이 필요하다.
기억하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광야를 방황하고 떠도는 채로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구원의 소망이 끊기길 원치 않으신다. 사랑하는 백성을 고아처럼 내버려 두거나 외면하지 않으신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먼저 결과를 보자. 광야 40년을 보낸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입성했다. 그들의 힘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침내 인도하셨다. 우리가 부르짖는 신앙의 원리 하나, 안 되는 것 같아 보이고 안 되는 것 같아보여도, 되는 역사가 일어난다.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단 유다의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거룩’을 마음에 품은 백성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왔다.
다음 주님의 비유와 말씀을 들어보자.
주님은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에서, 하나님께서 아무리 작은 자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의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죄인과 세리들을 배척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녀가 광야에서 길을 잃거나 버림받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두 아들의 비유는 절정을 이룬다. 자기 고집과 독단으로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울타리를 넘어야 했던 둘째 아들은 허랑방탕한 생활을 했다. 모든 재산을 탕진했다. 생계가 궁핍해졌다. 돼지 먹이로 쓰인다는 쥐엄열매로라도 배를 채우려 했으나 그것마저 주는 사람이 없었다. 재산이 있을 때에야 사람들이 알아주지만 재산을 탕진하고 나니까, 거들 떠 보지도 않는 세상이 곧 광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른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아버지 집의 품꾼이라도 되겠다고 마음먹고 돌아온다. 그는 다 내려놓았다. 둘째 걱정에 근심의 눈물이 마르지 않던 아버지는, 동구 밖에서부터 그를 알아보고 나가 맞이한다. 그리고 좋은 것을 다 채워준다.
그는 스스로 실패자요, 품꾼 취급당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아버지는 죽었다가 살아돌아온 자식으로 맞아 최고의 것을 다해준다.
주님은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 이와 같은 분이라고 말씀해주신다. 요한복음14장에서도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
- 사랑으로
강림절 둘째 주, 주님은 광야에 길을 만들라고 말씀하신다. 광야에서 길을 찾고, 그 길을 만들라는 명령을 어떻게 받들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까 길은 단순히 수단과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다. 더 본질적인 것이 있음을 하나님은 깨닫길 바라신다.
1)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것이다. 그 사랑에 더 가까이 가는 길을 만들라. 현실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자꾸만 스스로 광야로 걸어 들어가는 꼴임을 깨달아야 한다.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또다시 의심이 찾아오고, 광야에서 불평불만을 앞세우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의 복된 약속을 망각하게 된다. 우리 신앙의 목적은 현실문제 해결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더 가까이,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며 복주시겠다는 약속은 철회되지 않는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수록 믿음과 확신이 더해진다.
2) 주님을 영접하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 말씀하셨던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으로 찾아오신다. 우리를 구원할 그리스도로 오신다. 그때 구원사건이 일어난다. 거기서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과 새길이 열린다. 주님은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찾아오셨다. 구원사건이었다.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자기의 의나 고집을 버리고 내려놓는 것이다. 주님을 배반했던 가룟 유다는 자기의 의를 버리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강림절기에 다시 한 번, 광야와 같은 인생길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 소망을 찾고, 새길을 놓는 희망적인 이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우리 인생에서 예수님을 꼭 만나시고 동행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