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17일 강림절 3주
선한 목자이신 사랑의 하나님, 강림절 셋째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시내 곳곳에 설치된 성탄목과 거리마다 울려퍼지는 캐롤이 성탄절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때에,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기 위해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품 안에서 심신의 안위를 얻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건지시기 이ㅜ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시편107:6)
- 북이스라엘
주전 8세기 어지러웠던 이스라엘 주변 세계정세의 한 장면을 살펴보자.
당시 앗수르가 이 지역을 제패하고 있었다. 그리고 앗수르에 의해서 북왕국이 망했다. 남왕국마저 위태로웠다.
북왕국의 멸망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앗수르의 야욕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 팽창정책에 힘없는 북왕국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성경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고 우상(두 송아지 우상, 아세라 목상, 하늘의 일원성신 그리고 바알)을 섬기며, 율법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관습법을 더 따랐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노략꾼의 손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면서 열왕기하 17:23은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든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드디어 이스라엘을 그 앞에서 내 쫓으신지라 이스라엘이 고향에서 앗수르에 사로잡혀 가서 오늘까지 이르렀더라.”
주전 8세기 선지자들은 이 일을 끊임없이 예고해왔다. 대표적인 예언자 호세아는 14:1절에 간곡히 호소한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
오죽하면 하나님은 드고아(남왕국) 출신의 목자였던 아모스까지 사용하셨다. 그는 북왕국의 수도 사마리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한 나라를 일으켜 너희를 치리니 그들이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시대까지 너희를 학대하리라 하셨느니라.”(암:14)
벧엘의 제사장이었던 아마샤는, 아모스의 말을 듣고 격분해서 “유다 땅으로 꺼져버려서 거기서 예언을 하며 떡이나 먹으라”고 쫓아냈다.(암7:12)
일반적으로 우상에 사로잡히면 영적으로 어두워진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한다. 뉘우치고 성찰하는 시야는 흐려지고 도덕적 양심은 욕심에 무뎌진다. 그래도 “이러면 안되지, 정말 이러면 안돼” 하는 신앙적 경각심이 있다.
이스라엘에는 이런 사람들이 없었을까? 호세아6:3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신앙적 경각심을 가지려는 사람이 있었다. 특수한 사람들 몇몇이 이랬을까? 아니다. 일반적이었다. 마치 오늘날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된 교회를 위해, 대각성과 회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여기저기서 외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사랑하는 너희의 마음은 아침 안개와 같고, 덧없이 사라지는 이슬과 같구나!”(호6:4, 새번역)
무슨 말인가? 그 결심이 오래가지 못하고, 회개가 불성실하다는 엄중한 꾸짖음이었다. 오늘 우리의 실정과 비슷하지 않은가?
불의, 거짓, 죄악 팽배했다. 호세아나 아모스 선지자들이 고발하는 시대상을 들어보라.
힘없는 자는 밟히고, 연약한 자에게서 부당한 세를 걷고, 의인들이 학대를 당하며 가난한 자들은 억울함의 눈물로 이불을 적신다.
수많은 제물로 하나님을 예배하겠다고 와서는 하나님께 제사하는 듯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죽하면 “나는 인해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말씀하셨을까?
포악하고 거짓과 죄악이 가득한 세상은 좀처럼 정화될 줄모르고 점점 악화돼갔다. 이 혼란과 혼돈,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불협화음과 불화의 소리가 들려오건만, 되돌이길 줄 몰랐다.
그래서 아모스가 그토록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6:24) 선포했다.
- 남왕국 유다
남유다의 상황은 어땠을까? 북왕국 이스라엘과 끊임없이 전쟁을 하고 다투었지만, 물론 그 관계가 평화로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줄곧 사이는 좋지 않았다.
막상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가 앗수르에 함락당하고 완전히 망했다는 소식이 남왕국 유다에 전해졌을 때,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예언자들의 말대로였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충격은 받을 수 있고, 경악은 할 수 있지만,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위기인 줄도 알고,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문제도 안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멸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변화되지 않는 것이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1:3)
남왕국도 북왕국과 다를 바 없었다. 그 손에 피가 가득하고 광포와 포악이 가득하면서 무수한 제물로 제사하러 와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라.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1:12)
남왕국도 자멸의 길을 걷고 있다.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한다.
남왕국의 궁정예언자였던 이사야가 본 환상에는 이러한 사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사6:8)
북왕국, 남왕국의 시대적 상황을 통해 깨닫게 되는 역사적인 교훈을 직감한 사람이 있다. 메시야와 같은 지혜의 왕, 평화의 왕으로 오지 않고서는 불화하고 어둡고 시끄러운 세상이 구원받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하나님의 매와 사람의 막대기를 맞고야 만다. 그리고서 조금 새로워진다. 아무리 변화와 새로움을 꿈꾸고 기대해도, 수많은 거짓과 함정과 모함과 술수와 원성과 불협화음을 꺾어낼 만한 분이 오시지 않는 한, 세상에는 소망이 있겠는가?
오늘 말씀은 희망의 선지자였던 이사야를 통해 예언된 말씀이다.
이사야7장:14,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9:6-7,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 예언의 성취가 어떻게 될지는 몰랐지만, 분명한 것은 이사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활동했다. 그리고 그의 생전에 히스기야와 같은 왕을 만났다. 어쩌면 히스기야를 예언의 성취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 아하스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지만, 히스기야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며, 위기의 순간마다 기도하면서 문제들을 해결해갔다. 성전을 정화하고 신하들의 마음을 붙잡는데 성공했으며, 하늘에서 내린 왕처럼 여겨졌다.
앗수르의 산헤립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밤새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했을 때, 앗수르 군대가 물러가고 평화를 맞이했다.
이사야도 히스기야의 정말 좋은 영적인 멘토가 되어주었다.
그러고 보니까, 예수님께서 태어난 로마치하의 당시시대도 그랬고,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별반 다르지 않다. 언제나 시대는 불의하고 어둡다. 세상은 시끄러운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고 악하다. 이사야가 예언한 왕이 정말 세상에 태어날까? 이 세상에 올까?
예수님 오시기까지 긴 영적인 암흑기를 거쳤다는 것을 기억하라. 역사는 악순환만 반복될 뿐, 희망을 기대하고 노래하기에는 너무나 순진하다는 생각 때문인지, 깊은 침묵에 빠졌다.
- 임마누엘
그런데 마태복음은 우리에게 리메이크된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 불협화음에 지친 심령들을 깨우고 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태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가 깨닫기를 바라시는 강조점이 어디인지 생각해보라. 임마누엘이 누군가? 사람들은 세상을 의로 통치하고 지혜와 평강의 왕으로 오실 하나님을 기대했다.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렇게 말이다.
그런데 오늘 마태복음을 통해 선포되는 말씀은, 뭐랄까? 어떤 최첨단의 현대 문학가나 달필가가 쓴 표현보다도 더 자극적이고 원초적이다.
오늘 주님은 바로 이것을 깨닫기를 바라신다. 오늘의 말씀은 그 메시야를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해 말해준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임마누엘의 열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중요한 강조점을 바로 이 대목에서 발견했다. 정말 깨닫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데, 깨닫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 많은 비용을 지불할 때도 있다. 비유하자면 불협화음을 화음으로 바꿔줄 지휘자가 있어야만 화음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화음자체가 바로 지휘자다.
근본적인 구원은 세상적이고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죄로부터의 구원, 우리 안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역사는 늘 죄악을 범해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임마누엘의 노래는 불협화음을 깨고 복음의 노래였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다는 복음을 들음에서 힘과 용기를 내시길 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데서 바로 화음은 시작된다.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데서 자기 안에 평강의 왕, 지혜와 왕이 임하신다. 기묘자요, 모사요, 영존하신 왕이신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다. 이 복음에서 변화는 시작되며 능력이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