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3일 강림절 제 1주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독생자를 보내주신 사랑의 하나님, 강림절 첫째 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노란 은행잎이 거리를 덮으며 겨울이 왔음을 알리는 계절에, 따뜻한 주님의 품에 지친 몸과 영혼을 맡기고자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품안에서 참 평화를 누리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독생자를 보내주신 사랑의 하나님, 강림절 첫째 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노란 은행잎이 거리를 덮으며 겨울이 왔음을 알리는 계절에, 따뜻한 주님의 품에 지친 몸과 영혼을 맡기고자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품안에서 참 평화를 누리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시121)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3).

시121)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8).

 

  1. 강림절의 시작

오늘부터 강림절기가 시작된다. 4주간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고 맞이할 준비를 하는 절기이다. 여러 차례 말씀드리지만, 세상 달력은 아직 한 달이나 남았다. 그리고 그 후에 시작된다. 그러나 교회력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절기를 기점으로 시작된다.

강림절기에 이런 설교들을 하려고 한다.

① 빛, 어둠을 밝히다. ② 방황에서 길을 찾다. ③ 불협화음 속에 울려 퍼지는 복음 ④ 죽임에서 건져진 생명

 

빛, 길, 소리, 생명, 이 네 단어를 핵심어로 다룰 예정이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빛은 그 서광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 절기를 의미 있게 보내기를 바란다. 그리고 준비된 2018년을 맞이할 수 있기를 축원한다.

 

 

  1. 죄와 어둠

제주도 음료공장에서 현장실습생으로 일하다 사고로 숨진 고 이민호군. 그는 고등학교 3학년 꽃다운 나이의 학생이었다. 또다시 우리 시대에서, 라헬의 애곡 소리를 듣게 되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마2:18)

 

자식을 잃고 애곡하는 어미의 마음, 무엇으로 위로가 될 수 있을까?

 

학교와 업체는 현장실습 표준협약서를 작성했다. 그런데 업체는 별도로 근로계약을 체결하고 일반 직원과 동일하게 업무를 시켰다. 그리고 무책임하게, 아직도 배울 것이 많은 어린 학생에게 많은 일을 떠 넘겼다.

한 방송매체에서, 그간 민호가 일과 관련해서 어떤 문자 메시지를 남겼는지 공개했다.

‘40도가 넘는 폭염’, ‘12시간 단 1분도 앉지 못하고 일했고, 계속 일하고 있음’, ‘도와주는 어른 하나 없음’

이런 내용들이 친한 친구에게 전한 푸념 섞인 메시지였다.

그가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준비를 하면서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처음에는 다 힘들고 어려우니, 참고 이겨내라고 하기 에는, 이 사회는 너무나 가혹했다.

 

엊그제는 인천에서 특성화고 현장실습생의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도 있었다.

 

특성화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 서울광장에 모여 추모하며 든 피켓을 유심히 봤다.

 

“왜 실습하다가 죽어야 합니까?”

“고 이민호 실습생의 죽음은 우리의 현실이다.”

 

 

  1. 비극

이것이 죄와 어둠으로 둘러싸인 세상의 현실이다.

우리와 무관하고 상관없는 일일까?

 

교육현장을 전문으로 취재하는 기자(김미향, 한계레신문사)의 기사를 읽었다.

서울의 한 공업고등학교를 찾아가, 교장에게, 이번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며 대책은 무엇인지 물었다. 실질적이고도 절박한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현장취재가 중요하지 않은가?!

 

일선 현장에서 교장 선생의 답변은 무엇일까? 교장의 말은 이랬다.

 

“위험한 일자리요? 공부를 못해서 그런데 간 거죠? 우리 학교엔 중학교 때 좋은 성적을 받은 학생들이 옵니다. 실력 있는 애들이 오니까, 그런 일자리 안가요?”

 

웬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교장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아마 어이없을 것이다.

 

저는 교장의 말에서 이것이 바로 이시대의 자화상이요, 비극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장 선생이 나쁜 사람이거나 개념이 없어서 저렇게 말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런 말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신입생 모집 기간에 이런 일이 터져서 학생 모집이 안 될까, 걱정이네요.”

 

특성화고등학교의 문제가 사회이슈가 되고 있기 때문에, 그 학교는 이런 걱정이 없이 안전하다는 말을 하려다 보니까, 말실수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학교는 안전하니까 걱정 말고 보내셔도 됩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누구보다 학교와 학생들을 사랑하기에,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비극의 시작은 무엇인가?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 수 없는 현실. 함께 대책을 진지하게 논의하고 방지책을 세워가지 못하고, ‘나만 아니면 돼’, 혹은 ‘나랑은 상관없어’라고 애써 외면하려는 현실, 이런 것들이 우리를 비극으로 몰아넣는 것은 아닐까?

 

기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아동노동이 성했던 19C 산업혁명 시기의 영국도 아닌데, 21C 한국에서는 10대들이 공장에서 일하다가 손가락, 발가락이 잘립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학교의 인식입니다.” (2017.12.2. 한겨레, 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학교만의 인식일까? 죄악된 세상, 어두운 세상에서 누구랄 것 없이, 우리가 가진 무의식은 아닐까? 어둠을 방조하고 무관심하고 깨어있지 못한 것 말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셨다. 가이사랴, 디베랴 신도시가 건설되고, 거기에 발맞추어 발전해가던 성읍 예루살렘, 미석으로 지어진 화려한 성전이 상징하듯, 외관상으로 보면 그럴싸해보이는 성읍 예루살렘, 하지만 그 현실은 척박하고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이시대가 밤이 지나도 화려한 불빛과 조명이 늘 환하게 밝혀있지만, 정작 어두운 세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예루살렘이 그랬다.

주님은 그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탄식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바 되리라.”

그 예수님의 눈물이 이 땅에도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 같다.

 

 

  1. 그리스도의 빛을 영접하라.

요한복음 1장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5).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9),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셔야 했는지 깨달으라. 예수님께서 세상의 어둠을 비추는 빛으로 오셨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다. 가난한 자, 병든 자, 마음이 상하고 무거운 자, 절망과 상처와 고통 가운데 있는 자, 슬픔과 괴로움에 순간순간이 캄캄한 자, 그 곁에서 빛이 되어주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시기를 바라신다(골1:13).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체험을 살펴보자. 주님을 빛으로 영접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붙잡기 위해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그 도중에 그는 예수님을 만났다. 하늘로부터 홀연히 빛이 나타나 바울을 둘러 비췄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4) 여기서의 사울은 바울의 본래이름(히브리식)이다.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그 빛이 너무나도 강했었던지, 그는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눈이 멀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다메섹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예비해놓으셨다. 바울은 마을에 들어가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아나니아를 만났고, 하나님은 아나니아를 통해 바울이 다시 볼 수 있게 하셨다.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17b-18)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오늘 말씀의 맥락에서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겠다.

사울의 어두움을 밝힌 사건이라고 말이다.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눈이 멀었던 사람인지도 모른다.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는 우병우의 레이저 버금가는 눈빛을 가졌던 사람이다. 사도행전9장1절에,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그러나 그에게는 어둠이 가득했던 사람이다. 율법, 정죄, 위선, 불의, 미움, 거짓, 이루 말할 수 없는 죄들이 그 안에 가득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지만, 육신으로는 죄의 법에 농락당하면서, 끊임없는 자기와의 싸움에 지쳤던 사람이기도 하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서야 자신의 어둠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 자신 스스로 빛이 아니라 어둠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의 눈이 멀게 된 것은, 세상적이던 눈, 인간의 어리석은 눈, 교만과 오만의 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눈, 편견과 자만의 눈… 이런 것들이 멀게 된 사건이었다.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영접했다. 세상적인 지식은 초등학문에 불과했고, 고상한 지식은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었다. 세상의 자랑은 배설물과 다름 없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자랑이야 말로, 그가 깨달은 최고의 자랑이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흑암의 권세에 있던 이를 건져내셔서 복음의 빛을 전하는 일꾼으로 사용하셨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빛으로 붙들어 사용하길 원하신다.

 

 

  1. 그리스도의 빛을 영접하기 위해 마음의 빗장을 활짝 열라.

참 반가운 기사를 접했다. 4대강이 지어지고서, 금강 세종보· 백제보를 5년만에 처음으로 개방했다. 수위가 낮아지면서, 고였던 물로 인해 강바닥은 시궁창 같이 오염된 펄들이 가득했다. 절망적이었다. 그런데 보문을 조금 열었을 뿐인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신기하게도 백로와 왜가리들이 돌아왔다. 그리고 흐르는 물들이 썩었던 펄들을 조금씩조금씩 씻어낼 것이라고 생각하니, 희망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런 것 아닐까? 우리가 강림절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영접하는 사건이 곧, 보문을 열고 고였던 강물이 흐르게 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 말이다. 우리의 마음의 빗장을 조금이라도 열고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함으로, 희망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그 빛이 때로는 사랑의 빛으로, 용기의 빛으로, 지혜의 빛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는 신비의 빛으로 사방에 비춰지길 주님께서 바라신다.

 

정호승의 밤하늘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 별들이 하나씩 있지 /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 서로의 마음속에 있는 그 별을 /

빛나게 해주는 일이야 / 바마늘에 저렇게 별들이 빛나는 것은 /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별들이 / 빛나기 때문이지 .

 

빛은 그리스도다. 어둠은 바로 나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으로 영접하므로, 누군가의 마음속에서도 그 별이 빛나게 해주는 일을 바로 여러분이 하시라.

Leave a Comment

빠른 문의

이메일로 문의를 남겨주시면 빠른 시간 내에 연락드리겠습니다.

Not readable? Change text. captcha t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