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26일, 성령강림절 후 마지막주, 왕국주일
끊임없는 계절의 변화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으로 피조물을 인도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가 주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엉성해진 길 옆 가로수의 달랑거리는 잎새가 겨울이 왔음을 알려주는 때에, 주님께서 주시는 새 희망을 가슴에 품고자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어루만지심으로 새로운 용기를 얻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보다 높으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까지 이르나이다.(시108:4)
- 주님 앞에 나온 사람들
여러분, 주님께로부터 복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셨는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부와 명성과 지위와 능력을 주시는 것? 질병에서 고침 받고,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
그것은 부가적인 것은 될 수 있어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사모할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성경은 ‘다른 복음은 없나니’라고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다. 그 이유를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 앞에 나온 사람들은 어땠는가?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인생이 그마 만큼 고달픔과 고생의 연속이다.
주님은 궁핍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병든 자에게는 치유와 회복의 이적을 나타내셨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 중에는 기적을 경험하고 이적을 경험한 사람들이 많다. 어느 누구도 주님은 외면하거나 모르는 척 하신 일이 없으시다. 심지어 삭개오나 죄인이나 세리에게도 찾아가셨다. 밥 한 끼 함께 하셨다.
물론 이방 여인을 외면하시는 듯 했다. 그 여인은 모멸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모멸감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다만 수로보니게 여인을 성경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교훈은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외면당하거나 응답받지 못할 것에 대한 걱정이나, 혹은 모멸감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진짜 가르치려는 것일테다.
사람에 대해서 이런 염려 때문에 방어기제가 발동하고 상처 받기 위해 경계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고, 우리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아신다. 주님 앞에 나아온 우리가 주님 안에서 새로워지고 회복되고 고침받기를 바라신다. 주님 안에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깨닫고 확신하기를 바라신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사람들, 그 모두가 기적과 이적과 능력을 경험했지만, 진정으로 주님을 만났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주님은 그토록 바라셨지만, 오히려 주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스스로 떠난 사람들도 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진정으로 만나지 못한 이유가 능력을 체험하지 못했거나 기적과 이적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10명의 나병환자 중에 고침 받고 돌아와 감사를 드렸던 것은 사마리아인 한 명 뿐이었다.
에베소 교회의 알렉산도와 후메내오를 보라.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고 한동안 교회를 위해서 헌신했던 사람들이다. 즐거움과 기쁨의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에서 파선당했다고 성경이 증언하고 있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가룟 유다를 보라. 그는 주님을 배반했다. 은 30에 주님을 팔아넘겼다.
그래서 주님은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기까지 하셨다(마7:21).
- 파선의 위험
학자들은 기복적이고 현세적인 믿음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고 주님을 따라 나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찾는 까닭은 표적을 본 까닭(예수가 그리스도라는 표적)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궁핍과 필요를 채워주시고 부요하게 해주실 것이라는 것만을 기대한다. 그러나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은 별 관심이 없다.
현세적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어려움이 있을 때, 뭐라도 의지하는 마음으로 자기 문제를 주님께 들고 나온다. 그 문제만 해결되면 주님을 잘 믿을 것처럼 대한다. 그런데 자기 문제가 해결되면, 더 이상 주님이 필요치 않게 된다.
그렇다면 내세적인 것은 문제가 없을까?
어느 모임에서 오랜 만에 만난 어떤 집사님이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 목사라는 직함이 있었다. 목사가 되기까지 정규코스를 밟자면 10년, 좀 빨리 하더라도 6-7년은 족히 걸린다.
예전에 성경공부를 하면서 하나님의 창조, 피조세계 보존에 대해 가르쳤다가 엄청나게 반발을 하면서 이의를 제기 했던 분이다. 종말이 빨리 와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종말이 늦추자는 거 아닌가, 주님 오시기를 기대하는 신앙을 가졌는지 집요하게 공격했던 사람이다. 이상한 괴변을 가지고 있었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주님 다시 오심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된 종말론에 물든 사람이다. 주님께서 세상이 다 망가지고 부서지고 파괴된 뒤에 더 이상 쓸모없어질 때 오신다고 언제 말씀하셨는가? 그 때와 시기는 아무도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셨을 뿐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세상을 파괴하고 불의와 잔인한 폭행과 횡포를 일삼으며 세상을 어지럽히며 스스로 그리스도(적그리스도)연 하는 자를 심판하신다.
내세에 대한 강한 믿음은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정말 주님을 이해하고 만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든다.
이때 놓치게 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서원과 결심을 스스로 저버리기 일쑤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수고와 헌신을 잃어버린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도록 일구지도 않는다.
- 믿음의 푯대
그렇다면 우리가 복을 받는 믿음의 푯대는 어떤 것을 표준으로 삼을 수 있을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만 정리하고 결단하려고 한다.
첫째 부활의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능력을 공급받기를 바라신다. 12절 바울은 “예수 우리 주께서 나를 능하게 하셨다고 고백하고 있다.”
우리의 믿음은 연약해서 늘 흔들리기 일쑤다. 기도했더니 자기 생각대로 상황이 바뀔 줄 알았는데, 그대로더라고 말하는 사람, 기도하면 뭐가 달라지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불신앙도 주님을 바로 믿고, 주님을 따르는데 걸림이 된다.
그런데 우리의 상황과 현실은 그대로인지는 모르지만, 주님을 믿음으로 붙들면 주 안에서 능력을 옷 입고, 새 힘과 용기를 얻은 자는 상황을 이기고 변화시킬 수 있다.
바울과 실라가 어둡고 깊은 감옥에 갇혔다. 어떤 처형이 내려질지는 모르는 처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매를 많이 맞은 상태였고, 육신은 찢길 대로 찢긴 상태였다. 발에는 절대 풀 수 없는 차꼬가 채워진 상태였다. 보통 이럴 때 절망과 고통이 엄습해온다. 찬송과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 두렵고 무서움에 몸서리를 친다.
그런데 얼마 후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모든 문이 다 열렸다. 하지만 이 결과가 중요한 게 아니다. 바울은 그 밤에 실라와 함께 주님을 찬송하고 기도했다. 오늘 말씀 14절에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다.”고 고백한다.
찬송과 기도를 하면서 주님 안에서 주님의 능력을 힘입는 시간이었다. 거기서 힘과 용기를 얻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이러한 복과 은혜를 얻기를 원하신다.
두 번째는 그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사명을 맡기신다. 다시 12절을 보라.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아무에게나 하나님께서 사명을 맡기시는 것이 아니다.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감당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그 상황을 맡기시는 것이다.
어려운 가정환경, 자녀양육, 사회봉사, 교회에서의 역할 그 어느 것도 마찬가지다.
그 과정 가운데, 필히 깨닫는 것이 있다. 바로 죄에 대한 고백, 내가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비방자, 박해자, 폭행자였다. 일반적인 세상의 눈으로 보면 아니라고도 말할 수 있고, ‘내가 왜 저런 죄인이란 말인가?’하는 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 나니, ‘죄인 중에 괴수’였음을 깨달았다. 주님을 만난 거의 확실한 증거가 바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을 귀신처럼 눈으로 보고 신령의 소리처럼 귀로 들어서가 아니다. 그러니까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한다.
기복적이고 현세적이고 내세적인 신앙은, 왜 내가 죄인이며, 왜 내가 고통을 받아야 하느냐고 항변하는데 그친다. 저주받는 것 같은 삶의 현실에 대해 원망과 불평이 쏟아질지 모른다.
그런데 복음을 깨달은 이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닫게 된다. 나를 용서하시고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존재이지만, 그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보배를 가지고 귀한 사명 감당하기를 바라시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절로 흘러넘친다. 사명을 감당하면서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다. 십자가 붙드는 믿음 가운데 내게 능력주시는 주님을 만난다. 이 믿음의 체험이 지금 이시간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란다.
사명을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교회, 편안하고 자기 신상에 유익한 교회를 다닌다는 자부심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주어진 일, 맡겨주신 일, 힘들다 하지 않고 묵묵히 사명 감당하는 것이 멋진 신앙의 모습 아닌가? 주님께서 바라시는 믿음의 푯대가 아닌가?
(영상)
우리가 예수 안에서 홈런을 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미 홈런을 쳤는데도, 1루에 머물러 아웃 안되려고 뒹글고 있는 부끄러운 모습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