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3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9월의 첫 번째 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역작들이 넓은 들녘에서 고개를 숙이며 황금 노을을 이루어 가는 계절에, 알곡 되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원하여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신앙의 아름다운 열매를 내어 놓을 수 있도록 변화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이사야54:4
- 사랑을 위한 시리즈 설교
5-3=2, 오해하고 있을 때, 세 번만 참고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는 뜻.
2+2=4, 이해하고 이해하면 사랑하게 된다는 뜻,
4+4=8, 이 뜻은? 사랑하고 사랑하면 팔자(八字)도 고칠 수 있고 바뀐다는 뜻.
이번 주부터 추수감사절까지, 우리에게 사랑의 장(章)이라고 알려져 있는 고린도전서13장을 시리즈로 설교하려고 한다. 명제가 분명하므로 오늘 말씀의 결론은 짧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작품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위한 걱정이 아니라 사랑으로 산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늘에서 한 천사가 떨어졌다. 그는 신의 말을 거역했다. 어떤 남자가 쌍둥이를 낳고 나무에 깔려 죽었다. 그런데 신이 그 아내도 데려오라고 했다. 천사는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쌍둥이를 가슴에 안고 있는 여자에게서 아이들을 떼어놓을 수 없었고, 그를 차마 데려올 수 없었다. 갓난애들이 불쌍했다. 그냥 신에게 돌아갔다. 그래서 신은 그 벌로 땅에 내려가서 세 가지를 배워오라고 한다. 그 중에 하나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 지 배우라는 것이었다. 천사는 세상에 내려와서 이런 저런 일을 겪다가, 수년 전 그 쌍둥이를 보게 됐다. 한 여자가 그 아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잘 키우고 있었다. 그러면서 바로 이 말을 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 자기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생의 원동력과도 같다. 사랑은 물론 추상명사이고 뭐라 말할 수 없다. 고린도전서는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예언의 능력과 모든 비밀한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모든 것을 구제하고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한다.
사랑은 여러 가지가 있다.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 아가페, 친구과 이웃간의 사랑 우정, 남녀간의 사랑. 부모의 자식 사랑은 감정을 뛰어 넘지만, 다른 것들은 감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낭만도 아니다. 현실이고 실전이고 명령이며 사명이다. 그리고 그 완성을 위한 훈련과 연단이기도 하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사랑은 오래참고’라는 부분을 나눠보려고 한다.
- 사랑은 오래 참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한 아이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왜 이렇게 흰머리가 많아?”
“다~, 너 때문이야! 네가 공부를 잘하기를 하니, 엄마 말을 잘 듣기를 하니? 엄마가 속상해서 슬퍼지게 되면, 얼굴에 주름이 지고 머리카락이 하나씩 흰색으로 변하는 거야! 그러니까 엄마 말 잘 듣고, 공부 잘해! 알았어?”
엄마가 대답했다. 그러자 아이는 미안한 듯, 울먹이더니,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외할머니가 불쌍해!”
오늘의 ‘나’가 있기까지 오래 참고 기다려준 사람이 있다. 이것을 잊지 말라. ‘사랑은 오래 참고’ 이것과 관련해서 말이다.
잠언4장의 말씀이 떠올랐다.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내 법을 떠나지 말라.”(1-2)
부모로서 자녀에게 훈계의 말을 할 때, 이미 예상하는 것은 자녀가 그 훈계의 말을 다 깨닫거나 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잠언의 말씀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노라.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3-4)
했었노라고 말이다.
깨달음과 성숙과 성장은 오랜 기다림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오래 참는다.’는 완성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미완의 존재’가 완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바라보고, 참고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을 갖게 만든다. 그리고 그 중도에 있는 이에게는 희망적이고 소망을 주는 말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이 속성은 사실 하나님의 자비를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이다.
로마서2:4)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로마서9:22)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출애굽기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지혜문학이라 할 수 있는 잠언에서 ‘오래 참음’은 인간의 가장 지혜로운 미덕이라 할 수 있다.
잠언14:29)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잠언16:32)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오래 참으신다. 심지어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하시기까지,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도록 참으시고, 관용을 베푸신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가 있다.
- 참아서 후회하는 법은 없다.
우리는 어떠해야 하는가? 사람이 참아서 후회하는 법은 없다. 오히려 그 때 참지 못해서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참는 것이 지혜다.
모세가 끝까지 참았더라면 어땠을까?
출애굽 백성이 광야 가데스에서 물을 얻지 못하여 아우성이었다. 매번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함께 하시는데도 불평불만이었다. 인도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지칠 만도 하다. 계속적인 비난과 책임에 대한 공격을 받으면 화가 날 수 있다. 그래도 조금 더 참았더라면 좋을 뻔했다.
민수기 12장을 보면 모세는 이런 저런 비방을 받았을 때, 잘 참았다. 그래서 이렇게 성경은 이렇게 증거 한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3)
잘 참고 너그럽게 받아넘겼다. 신기한 것은 그때마다 안 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방법과 과정과 시간대로 일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기하고 놀라운 방법으로 역사하셨다.
그런데 민수기 20장 2절을 보면 가데스에서, 식수 문제로 불평하는 백성들과 심하게 다투었다. 거친 광야생활에서 힘을 보태주기는커녕 자꾸만 흠집을 내려는 사람들에 지치고, 원망스러웠을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어떤 뉘앙스의 말일까? 시편106편은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그의 뜻을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그의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33)
무슨 말인가? 그 순간을 참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헌신하고, 이끌어 가야 할까?’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그동안 쌓였던 울화가 일순간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모세가 잠시 잊은 것이 있다. ‘이러나저러나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인데,’ 하나님의 사랑을 대신 해서 영광을 나타내야 할 사명을 잊었던 것이다.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하나님께서도 오래 참으시는데, 모세가 그 자비로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셈이 됐다.
(군대생활에서 고참이 됐을 때 일이다. 신병이 작은 실수를 했다. 괜찮다고 했는데도, 밤에 몰래 신병에게 얼차려를 줬다. 굉장히 그러면 기분이 나쁘다.)
하나님은 모세가 120세가 되도 기력이 팔팔했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셨다.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랑은 참는 거다. 그래야 복을 받는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 되는 때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참지 못해서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격’이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아내고 관용을 베풀기를 바라신다.
반면에 다윗은 어떤가? 사울에게 두 번씩이나 복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잘 참았다. 수많은 대적자들이 그를 시기하여 괴롭히고 모함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딱 한번 실수할 뻔했다. 다윗이 나발에게 치욕적인 대우를 받았다. 양털을 깎는 날은 잔치하는 날이었는데, 사람들을 보내 음식을 얻으려 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광야에 피신해있을 때, 그 소유를 지켜주고 돌봐주듯 했다. 선대했다. 그래서 쉽게 잔치음식을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나발이 완전히 무시하고 거절했다. 이런 거절의 설움과 무시도 당해본 사람은 안다.
다윗은 화가 나서 칼로 무장을 하고 나발 집을 쓸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을 보고 참을 수 있었다.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말한다.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삼상25:29)
정말 하나님은 사울을 비롯한 많은 원수들의 모함과 위협에 대해 다윗을 생명싸개 속에 싸매놓고 지키셨다. 시편의 많은 부분에서 다윗은 원수들의 괴롭힘과 위협으로 고통을 당하지만 그것을 눈물로 기도하며 하나님께 맡기고 참고 인내하며 견뎠다.
다윗에 대해 성경은 뭐라고 증거하는가? 곧 오래 참음에 대한 결과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삼상3:1)
참고 인내하는 중에 은혜도 평강도, 복도 따라 온다.
주의하라. 오래 참지 못하고 혈기를 부리는 중에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와 같아, 신앙을 잃고 믿음을 잃을 수도 있다.
- 쉴만한 물가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과제가 하나 있다. 어떻게 오래 참을 수 있을까?
“쉴만한 물가, 혹은 잔잔한 물가가 필요하다.” 그것은 위기의 순간에 꼭 필요하다. 거친 인생의 풍파와 메마른 삶의 환경 속에서 주님은 여러분의 쉴만한 물가가 되어주시기를 바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