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10일
길고 지루했던 여름날을 거두시고 선선한 바람과 함께 아름다운 결실의 계절을 펼치시는 창조주 하나님, 오늘 복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더 높아진 파란 하늘과 두둥실 떠가는 양떼구름으로 가을이 슬그머니 다가온 때에, 계절을 통해 주시는 평화를 바라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진리로 영혼을 채워 주님의 평화를 누리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이사야59:20)
지난주에, “사랑은 오래 참고”라는 내용으로 말씀을 나누었다. 혹시 관련된 일들을 겪지 않았는가? 그때, 얼마만큼 말씀대로 순종했는가? ‘오래 참음’은 타인에게 대해서만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실망하고, 넘어지고, 부서져도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서 여전히 참으시고 사랑하신다. 그러기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참고 용납하고, 부족한 점은 견디어 승리할 수 있기를, 하나님께서 바라신다.
오늘은 “사랑은 온유하며”라는 내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한다.
먼저 온유하다는 뜻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 따뜻하고 부드러움
“온유하다”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엑스레스토스”에서 온 말인데, ‘친절하다.’, ‘착하다.’, ‘덕스럽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터넷 백과사전을 찾아보니까,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마음이 부드럽고 행동이 친절함. 고통이나 억울함, 심지어 굴욕 속에도 내면적으로 부드러운 심령을 견지하고 겸손히 참아내는 고상한 인격을 뜻한다.”
한자로는 따뜻할 온(溫), 부드러울 유(柔)자다. 따뜻한 사람, 차가운 사람에 대해서는 구분이 어렵지 않다. 부드러움이란 무엇일까? 부드러울 유자는 창을 뜻하는 모(矛)자 아래 나무 목(木)자를 썼다. 뜻으로 풀자면, 칼이나 창은 날카로워서 함부로 잡을 수 없다. 부드러울 유는 창의 날카로움을 감싸고 잡을 수 있도록 하는 나무가 된다. 누구나 자기 안에 날카로운 칼이나 창이 있다. 평소에는 따뜻하고 온화할 수 있다. 그런데 고통이나 억울함을 당하거나 굴욕을 당할 때, 유(柔)한 마음이 없으면, 말로써 행동으로써 스스로 찔리거나 베이기도 하고, 남을 찌르거나 베기도 한다. ‘유’와 관련된 마음은 바로 그것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이야 말로 정말 유하고 온화한 분이셨다. 특별히 죄인들,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 실수하고 넘어지기 쉬운 이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 모습은 투박하고 뾰족하고 모가 난 모습일 수도 있지만 주님의 온유함 앞에 강퍅하고 거친 마음들까지, 심지어 세리장 사케오까지도 녹아내렸다.
- 온유할 수 없는 현실
어떻게 온유할 수 있을까?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물론 어떤 사람은 선천적으로 온유한 사람이 있다. 기질면에서도 그럴 수 있다. 마음이 약해서 누군가가 상처받거나 손해를 보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감수하려고 하고, 관계가 깨지는 것이 싫어서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고 용서하고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온유하게 살다보면 세상살이 속에서 득이 될 게 하나도 없다. 온유한 사람은 성을 잘 내고 화를 내며, 신경질적인 사람들 속에서 손해를 보거나 상처를 받는다.
천당 위에 있는 동네는 분당이라고 한다. 조물주 보다 더 높은 사람이 있다는데, 누군 줄 아는가? 건물주라고 한다.
주중에, 어느 목사님이 건물주의 횡포에 몹시 속이 마음이 상하여, SNS에 하소연을 했다. 이사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부터 하수구가 계속 막혔다. 약품으로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서, 수리해달고 했는데, 그때마다 직접 돈을 들여 뚫으라고 했다. 주인이 나 몰라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다. 1년에도 몇 차례나 사람을 불렀다. 매번 20만 원 정도 들었다.
어느 날 건물 주인이 밑도 끝도 없이 공사비를 청구했다. 아래층에서 천장에 물이 샌다고 항의하니까, 그 위층에 사는 사람이 고쳐야 한다고 수리비를 청구한 거다. 게다가 아래층에 새는 물로 인해서 파손된 것들을 변상해야 한다고 그것까지 청구했다. 공사비와 변상금을 내지 않으면 월세 보증금에서 제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막무가내였다. 목회자라는 걸 악용하는 전형이다. 월세 밀린 적 한 번도 없는데, 이런 식으로 해도 되는 건지 의견을 구했다.
이 글을 보자, 어느 건물주인 성도분이 세입자 때문에 겪는 괴롬을 하소연했다. 늘 월세 밀리기 일쑤인데다가, 사사건건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시비와 불평이었다. 예를 들면 창문에서 비가 샌다고, 사전 동의나 허락도 받지 않고, 수리했다고 수리비를 청구했다. 그것도 적정가격이 아니라 터무니없는 가격이었다. 만약 안주면 월세를 그만큼 안내겠다고 일방적으로 억지를 부렸다. 자기가 많이 배운 거, 법적인 지식이 많은 거 앞세워서, 혼란케 만들었다.
하박국의 탄식이 들리는 듯하다. ‘어찌하여 착한 사람들이 억울함이나 고통을 당하고 악당 같은 사람들이 더 잘되게 되는지’ 하나님께 하소연한다.
세상 살면서 어떻게 온유할 수 있는가? 온유한 게 능사인가? 착하고 온유하고 친절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피해를 당하기 쉽다. 사람들이 살면서 갈등하며 분쟁이 생긴다. 때론 완고한 사람들 때문에 착하고 온유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한다. 사람이 좋게 대하고 친절하게 잘해주면, 그에 보답하는 게 아니라,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 게 현실이다. 온유하던 마음까지 거칠어지고 마음의 평정심을 빼앗긴다. 그래도 온유해야 하는 걸까? 아니 온유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고 어떤 유익이 있는가?
“온유 : 고통이나 억울함, 심지어 굴욕 속에도 내면적으로 부드러운 심령을 견지하고 겸손히 참아내는 고상한 인격”
말이 쉽지, 참 어렵다.
- 온유함의 상급
신앙은 안 되는 것 같고 안 되는 것 같으나 되는 역사라고 누차 강조한다. 온유함은 참 어려운 것이고, 성령의 열매에 포함될 정도로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온유함이야말로 그런 역사가 이루어지는 신비라 할 수 있다. 당장은 손해 보는 것 같으나, 그래서 속은 쓰리고 몸을 상하게 되는 일이 생기지만, 온유함은 땅을 기업으로 얻게 되는 약속과 함께 성취되는 신비를 경험할 수 있다. 어쩌면 하나님은 온유함을 통해서 우리를 복되도록 연단시키시고 단련시키시는 지도 모르겠다.
이삭은 그랄 목자들에게 그가 판 우물을 번번이 빼앗겼다. 이삭을 시기했고, 투기했다. 그리고 괴롭혔다. 처음 빼앗긴 우물은 에섹이다. 다투었다는 뜻이다. 두 번째 빼앗긴 우물은 싯나다. 대적했다는 뜻이다. 다퉈보기도 하고 대적해보기도 했지만 결국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장소를 옮겨 판 우물이 르호봇이다. 그 범위가 넓었다는 의미이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창26:22)
이번에는 그랄 목자들과 다투지 않았다. 대적할 필요도 없었다. 그가 빼앗긴 것에 집착하고 괴로워했더라면 더 넓은 장소를 얻을 수 있었을까? 때로는 우리가 양보하고 온유함을 지키는 대가(對價)로 하나님께서 더 큰 것을 허락하신다.
그런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것을 놔두고 스스로 떠나야 했다. 얼마나 아까운가? 브엘세바에 올라갔는데, 거기서 물을 얻지 못하면 어떡할까? 걱정됐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성경은, 거기서도 우물을 팠고 물을 얻었다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장막을 쳤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했다. 하나님의 것을 구분했고, 온전한 믿음으로 주의 이름을 불렀다. 기도했다는 말이다. 걱정과는 달리 하나님은 우물을 예비해 놓으셨다. 복 받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갚으시고 채우시고 형통케 하신다.
온유함이 결국은 승리하는 원리를 두 가지만 생각해보자.
① 교육학에는 “하아로우의 실험” 이라는 이론이 있다. 심리학자인 하아로우 교수가 이런 실험을 했다. 젖을 먹는 아기 원숭이들 앞에 엄마 원숭이 대신 두 개의 인형을 만들어 놓았다. 하나는 철사로 엄마 원숭이처럼 만들고 그 가슴에 우유병을 넣어두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부드럽고 두꺼운 천으로 만들어 그 가슴에 우유병을 넣어두었다.
첫날에 아기 원숭이들은 두 인형 속에 있는 우유를 모두 빨아 먹었다. 그러나 다음날부터 철사로 만든 인형에게로는 가지 않고 천으로 만든 인형에게만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드럽고 두꺼운 천으로 만든 엄마원숭이 인형의 우유를 먹었다.
이 실험을 통해 동물들도 부드럽고 온유한 것을 원한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인간관계도 그렇다. 날카롭고 딱딱하고 매정한 사람보다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을 서로 찾는다. (출처http://blog.daum.net/hiymoon/16258897)
② 부부를 위한 세미나에서 한 유명한 강사가 이런 간증을 했다. 그는 결혼 초기에 부부싸움을 하면 어떻게 해서든 부인을 굴복시켰고,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싸움에서 이길 때마다 점점 더 부인이 자신을 존경하지 않는 것을 발견하였다. 한참을 고민한 그는 방법을 바꾸어 싸움을 하면 꼭 져주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부인은 전보다 더 남편을 존경하더라고 했다. (출처http://blog.daum.net/hkchoi42/7357231)
온유한 사람에게 사람이 모이고, 지는 것 같으나 결국은 이긴다.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세상의 이익은 모일 수 있으나, 관계는 끊어지고 삶의 환경은 척박해진다. 풍요하나 풍요가 없고, 다 가진 듯 하나 다 잃어버린다. 의인은 기근의 날에도 풍족할 수 있지만 악인들은 멸망하고 사라진다. 왜? 누구나 어려움을 당할 수 있는데, 의인은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돕지만, 악인은 돕고 싶어도 도울 수가 없다. 그에게는 도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 온유의 은총
어떻게 온유할 수 있을까? 그 비책을 딱 한 가지만 생각해보자. 오늘의 결단과도 같다.
주님의 은혜와 은총이 우리의 마음을 덮으시기를 바라신다. 그것을 사모하라. 자기의 노력과 의지만으로는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다윗은 사울이 죽이기 위해 추격해올 때, 그의 마음은 격동하고 요동하기 쉬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어 주시고 건져주시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는 사무엘하22장36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주께서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칼부림의 고통을 붙드시고 마음의 평강을 지켜주셨다. 온유함을 잃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한 건, 온유함을 잃지 않고, 주님의 평강을 바라면 바랄수록 신기하게 수 많은 음해와 모함 속에서도 그의 추종자가 늘어갔다. 손해를 보는 것 같으나 사람을 얻었고, 나중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하여, 평화로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다윗은 시편 37편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악인 때문에 분을 내거나 노하거나 불평하지 말라고 말이다. “오히려 악을 만들뿐이라.” 대신에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간증한다.
혈기를 부리고 악행을 부리는 자들은, 혹은 세상적인 방법과 수단으로, 세상의 것들과 이익을 다 가질 것 같지만, 그의 팔은 부러지고 만다. 그렇지 않더라도, 어차피 들풀처럼 메마르고 안개처럼 흩어질 인생이다.
시편37:21은 이렇게 말씀한다.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 도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은혜를 베풀고 자비로울 수 있는 능력, 온유한 사람, 내적인 강건함이 있는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런 비유로 말씀을 정리하고 싶다.
생쌀과 밥, 어느 쪽이 온유한가? 생쌀이 아무리 기름지고 품종이 좋아도, 밥이 되지 못하면 먹지 못한다. 끓음과 뜸들임으로 밥이 될 수 없다면, 밥상에서 쓸모가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밥처럼 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천국 밥상에서 쓸모없을지도 모른다.
세비어 교회에 누군가가 새로 왔는데, 사역거리를 찾게 하고 맡겨주었다. 그 때, 교회는 그에게 이런 자유를 준다. “실수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세상에서 실수하지 않으려고 강박관념처럼 단단하고 거친 마음을 가지고 살았다. 교회에 처음 와서도 마찬가지 마음이었다. 신앙생활에 성공하겠다. 교회활동과 역할에 활동하겠다. 처음으로 교회는 그 마음을 녹여주었다. 그 마음에는 자비심이 솟아나기 시작했고, 관용이라는 것을 배워갔다.
주거환경이 열악한 사람들의 집을 고쳐주는 사역을 했다.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집을 고쳐주면 주인이 집값을 올리는 거다. 두 번째는 가난한 집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람들이 대상자를 선정할 때, 자격을 논했다. 첫 번째는 적절히 대처했다. 두 번째는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자기가 받은 자유를 누군가에게도 나눠주겠다는 마음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했다. 성령은 변화를 선물로 주었고, 역사가 일어났다.
한 주간 온유함에 대한 연단과 훈련이 있거나 생길 때, 믿음으로 잘 이겨내고 승리하시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