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27일

 

선한 목자이신 사랑의 하나님,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가 주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타는 듯한 열기로 대지를 뜨겁게 덮으며 거칠게 숨을 쉴 수밖에 없던 여름이 가을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계절에, 자연의 신비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확인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선선한 바람과 함께 주님의 선선한 손길도 느낄 수 있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 도입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길 축원한다.

 

다원주의 사회와 고도로 발달된 최첨단 시대에, 예수는 누구시며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과연 우리에게 예수가 필요할까? 세속화된 시대는 예수는 더 이상 우리의 주가 아니며 예수 없이도 세상은 괜찮다고 말한다.

 

오늘의 말씀은 우리 신앙의 핵심과 본질이 무엇인지를 밝혀준다. 잘 알다시피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이다. 이 본문을 대하면서,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교회 나온 지 얼마 안 된 어느 할머니께서 ‘오빠’라고 대답하셨다. 이유를 물어보니까, 예수님도 하나님께 아버지라고 하고, 자기도 하나님께 아버지라고 하니까, ‘오빠’라고 대답한 거다.

 

예수님은 의미를 담기에 따라서는 우리의 ‘친구’가 되시기도 하다. ‘연인’이 되기도 하고, ‘오빠’도 될 수 있다.

 

그런데 이정도의 고백으로는 안 된다. 오늘의 말씀에서도 이런 식의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v.14). 그런데 말씀을 자세히 보니까, 고백이라고 다 같은 고백이 아니다. 음부의 권세가 흔들지 못하고, 천국의 열쇠를 갖게 되는 고백이 있다.

 

 

  • 내용

오늘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자. 예수님과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도착했을 때, 주님은 뜻밖의 물음을 던지신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은 풍문에 들은 이야기들을 전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에 하나라 하나이다.”

이들은 모두 과거에 유명한 선지자들이었다. 말 한마디로도 시대를 호령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풍문에 떠도는, 예수를 누구라 하는지 모르셔서 물으셨을까? 그럴 정도로 소통이 안 되고 귀가 막히신 분이 아니다. 제자들의 믿음과 고백을 듣고 싶으셨다. 귀가 여린 사람들은 남들이 하는 말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 말에 자기 생각도 따라간다. 자기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시련을 믿음으로 견디거나 이기지 못한다. 그래서 야고보서1:6은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닷물결과 같다고 했다. 시련 앞에서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말씀한다. 누구든 어려움을 극복할 만한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이 말씀은 믿음을 전제로 하는 말씀이다. 그마 만큼 주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중요하다.

 

주님께서 물으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백한다.

 

옳다. 주님은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바로 이 믿음의 고백이 음부의 권세가 흔들지 못하고, 천국의 열쇠를 갖게 되는 신앙의 비결이다. 예수님은, 베드로를(원래 이름은 시몬) 칭찬하시면서, 그 이름을 베드로(반석)라 부르셨다. 그리고 그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며, 천국의 열쇠를 주시리라 말씀하셨다.

예수님에 대한 어떤 경험적인 고백이든지, 친근한 고백들 다 좋지만, 이 고백을 진정으로 하게 될 때, 음부의 권세를 능히 이기고 천국의 열쇠를 갖게 된다.

 

 

  • 음부의 권세를 이김

정말 그런가? 이것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이 약속의 말씀이 베드로만을 위한 말씀일까? 베드로는 믿음의 거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감히 쳐다볼 수 없는 높고 높은 신앙의 수준이 요구되는 문제라 생각하는가?

 

베드로전서 2:9을 보자.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에게 약속하셨고, 주님을 붙들었던 베드로가 체험하고 경험한 것이다. 그의 간증이라 할 수 있다. 간증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와 역사가, 주님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의지하는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하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주의 하라. 자기만의 의를 드러내는 것은 참된 간증이 아니다. 때로 누군가의 간증을 들으며 불편해지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이런 경우다.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내는 것이 참된 간증이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교회의 반석이라고 하셨다면, 베드로서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바는 거기에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들이 바로 우리란 이야기이다.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 이러한 보석 같은 존재들로 교회와 세상에 자리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온다. 정말 이 믿음의 고백을 통해 음부의 권세를 능히 이기고 천국의 열쇠를 갖게 되는 것일까?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이런 기가 막힌 사연을 전한다. 1:8-10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을 줄 알았으니…”

 

살 소망이 끊어지고, 사형선고를 받은 줄로 알정도로 심한 고난을 당했다. 음부의 권세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사역을 박해하고 핍박했다. 아시아 만이 아니다. 여러 곳에서 그랬다. 다만 아시아는 한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루스드라에서는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의 돌에 맞아 죽은 것처럼 되었다. 유대인들이 시신을 시외에 내다버렸는데, 바울 자신도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났다. 빌립보에서는 어떤가? 한 미친 여자를 이용해 돈벌이를 하는 포주들이 바울을 관청에 모함하여 넘겼다. 유대인들의 여러 가지 음모와 암살계획은 어디를 가든 빼놓을 수 없는 위협이었다.

 

바울은 그때마다 주님의 권세와 능력을 경험한다. 한 마디로 요약하는 말씀이 있다. 고후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느니라.”

 

음부의 권세가 자기를 흔들려 할 때,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두려움, 불안, 공포, 염려, 분함, 원망, 적개심… 이런 것들에 사로잡혀 아무 것도 못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 대신에, 자유함이 있었다. 주님은 그에게 찾아오셔서 위로와 용기와 힘을 주시고 담력까지 주셨다. 음부의 권세가 그를 흔들지 못하고, 오히려 이겼다는 말이다.

 

심지어 사도행전 19:11-12에서 전하는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음부의 권세가 날뛰는 것은, 예수의 권세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속으면 안 된다.

 

 

  • 천국의 열쇠

여러분 예수님을 잘 믿고 있는가?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으면 바로 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겠는가? 병고침의 역사가 일어나고, 가정의 불화가 그치고 화목해진다.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욕심과 분쟁으로 인한 죄악된 마음들이 씻기고 평강이 찾아온다. 화평하지 못하던 삶의 자리에 평화라는 변화가 선물로 찾아오고, 우리의 삶의 자리에 천국이 열린다.

 

다시 묻겠다. 천국의 열쇠를 가졌는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데, 믿음이 없어 따르지 못하고 허약한 크리스천이 돼버린 것은 아닌가? 예수와 함께 날마다 죽고 있는가? 자신의 욕심, 욕망이 죽는 대신 그리스도가 사시고, 자신의 의가 죽는 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여러분 안에 사시는가?

예수님 잘 믿는 것은, 예수님 믿어서 어떤 누군가나 어떤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너무 오래 걸리고, 그러다가 실족하게 되고, 나중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제일 쉽고 빠른 방법이 있다. 자기가 변하는 거다. ‘내가 변해서 남을 변화시켜야지’라는 것도 교만이다. 이미 거기에는 자기 기준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변해서 예수님을 닮아서, 누군가에 빛이 되어주고, 나무 같은 존재가 되어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는 충분하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약함 중에 강함 되길 바라신다.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이지만, 그렇다고 허약한 영적 체질을 가지고 이 땅에 사는 것이 아니라, 강하고 담대하게 능력 있게 복된 삶을 이 땅에서 살기를 바라신다.

 

여러분, 이 시간 그 비결을 깨닫길 바란다. 이러한 신앙의 체험과 간증의 첫 시작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과 고백에서 비롯된다.

로마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9-10)

 

이 신비를 여기서 말로 다 할 수 없는데, 마음으로 믿기로 결단하고, 확신하며 입으로 고백하는 순간,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던 눈과 귀가 열린다. 믿음은 설득과 증명함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결단과 고백을 통해서 발생한다.

 

이 고백을 통해서 우리가 체험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첫 번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두 번째는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을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 말씀하고 있다. 인과관계를 따질 부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믿게 하셔서 고백하게 되느냐? 고백하니 믿게 되느냐는 식의 말이다. 말에는 권세가 있고 힘이 있기 때문에 체험하고 믿음으로 고백하는 경우도 있고, 입으로 시인하고 고백하여 믿게 되는 경우가 있다. 마치 깨닫고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말하다가 깨닫는 경우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럴 경우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자기 생애의 모든 수수께끼들이 신앙의 눈으로 보이면서 풀리는 체험을 한다. 그동안 내 인생에서 하나님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벌써부터 나와 동행하고 계셨던 주님의 발자취를 보게 된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은 누구신가? 다시 한 번 깊이 깨닫고 결단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빌립보 가이사랴’ 이 지명이 눈에 펼쳐진다. 로마 황제의 이름이 신적인 존재(To the Emperor Caesar the Son of God, 하나님의 아들)로 높여지고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고 하는 스로건과 깃발이 도시 곳곳에 휘날리고, 제국의 질서 속에서 최첨단의 삶과 생활을 표방하는 신도시가 지어졌다. 로마의 황제에게 바치기 위해 ‘가이사랴’로 지어서 ‘봉헌’(?) 했다. 그 속에서 예수를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세속화된 시대, 과학, 의학, 최첨단 기술 만능주의, 황금만능주의 시대, 인공지능이 인간의 정신과 영혼까지도 대신 할 수 있다고 믿어지는 시대, 여전히 예수가 우리의, 여러분의 그리스도인가?

여러분, 예수를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며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이 시간 결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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