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는 설교음성화일이 없습니다.)

2017년 8월 20일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우시는 사랑의 하나님, 거룩하게 구별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은은한 바람과 엷은 미소로 조심스럽게 가을이 다가오는 계절에,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기 원하여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우수어린 눈물도, 답답한 가슴도, 어눌한 육신도 주님의 음성으로 위로받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사하시리이다.(시65:2-3)

 

  1. 야곱은 누구와 함께 갔는가?

야곱이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이 살아있다는 믿기지 않는, 어리둥절한, 꿈과 같은 소식을 듣고, 이집트로 가게 됐을 때, 누구와 함께 갔는가?

요셉은 아버지를 태우려고 좋은 수레를 보냈다. 이집트 총리에 대한 의전이 그 앞에 당도했다. 한두 대였겠는가? 최소한 야곱과 그 아들들의 처자들을 태웠다. 가축과 가나안 땅에서 얻은 재물과 최소한의 세간살이도 옮겨야 했다. 최종 숫자 70명 중, 이주(移住)한 수는 66명인데, 그 수는 야곱의 며느리들을 뺀 수이다. 그에 딸린 사람들까지 세면, 규모와 모습이 어땠을지 상상해보라.

야곱은 누구와 함께 갔는가? 흔히들 그의 권솔(眷率)들을 먼저 생각한다. 야곱의 아들들, 며느리와 손자손녀와 종들의 수를 센다. 그런데 야곱이 정말 함께 내려간 상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야곱이 홀로 자신을 마주한 시간, – 그 시간은 복잡한 감정이 그를 흔들어 놓는 시간이었다. 회한, 두려움, 걱정, 염려, 불안 – 그 시간에 찾아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라.”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과 동행하시고, 때로는 앞서가시며 예비하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섭리하시는 분이시다. 그 의미는 이런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하신다. 그런데 요셉과도 함께 하셨다. 사실 개별적으로 보자면, 야곱의 형제들과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누구의 하나님이신가? 야곱과 요셉, 그리고 요셉의 형제들? 모두의 하나님이시지만 그 사이의 개별적인 섭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의와 나라를 드러내신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와 뜻과 계획을 다 헤아릴 수 없고, 알 수도 없지만, 하나님은 그 사랑을 믿고, 함께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신다.

 

 

  1. 제자들이 도망갔지만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종종 주님과 함께 하려하지 않는다.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다. 주님이 잡히시던 때, 주님을 버리고 다들 도망갔다(마26:56, 막14:50). 세상 살면서, 주님을 외면하고 모른척하며 산다. 주님을 배반하고 불신앙의 죄를 범하기도 한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세상적인 것들을 먼저 사랑하기 일쑤다. 주님을 예배하고 찬송하고 영광을 돌리기보다, 자기 자랑과 유익과 재미에 빠지기 십상이다. 순종보다는 불순종을, 충성보다는 방종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님’을 따르기보다는 자기 방법과 생각과 뜻을 따르다가 길을 잃어버렸는지조차 모를 때도 있다. 자기 이익 앞에서는, 그것까지도 내려놓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기 보다는, 철저히 자기 이익 때문에 주님을 배반한다. 영적으로 위기상태다.

우리의 영적 상태를 더 위태롭게 만드는 것이 있다. 무엇인가? 그렇게 하는데도 아무 일 없다는 것이다. 모래성에 나뭇가지를 꼽고 쓰러뜨리는 사람이 지는 게임 기억나는가?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다 하나님께 큰 거 한 방 맞을지도 몰라.’ 불안해하면서도 주님과 이상하게도 척력(斥力), 밀어내는 힘이 작용한다. 이것이 우리의 곤고함이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원하나 또 다른 한 법이 있어, ‘죄의 법이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이러한 것 때문에 영적으로 절망하고 넘어지고 영적으로 포기한다.

 

요한복음에서는 이런 신앙의 문제 중에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것을 깨우치게 해주는 부분이 있다.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는 중에 예수님은 어떠셨는가? 그 도망간 제자들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거나 미워하거나 괴로워하거나 탓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제자들이 무사히 가도록 주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청하고 있다는 것이다. 13장에서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느니라.’는 말씀과도 같다.

제자들도 주님과 함께 붙잡혀서 고난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거나, 주님을 버리고 도망간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진노로 갚으시거나 보복하시거나 벌을 내리시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라 그가 무사한 것이 주님의 뜻이었다. 요한은 이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나(자기) 자신만 생각하면 영적으로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에 실망하고 넘어지고 괴로울텐데 주님을 바라보고 진정으로 주님의 뜻을 생각한다면, 주님을 의지해서 다시 새롭게 일어서야 한다.

 

그래서 주님 앞에 다시 나아올 수 있고, 주님은 용서하시고, 믿음을 회복시켜 주신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제자라는 직분도 사명도 복권시켜주신다. 마치 베드로에게 하셨던 것처럼 말이다.

율법으로는 버림받고 진노를 받았을 우리가, 복음으로는 다시 주님을 따를 소망이 생겼고 믿음이 생겼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았다. 이 믿음과 확신을 갖기를 바라신다.

 

  1. 알곡과 가라지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한 비밀을 비유로 하신 말씀 중 한 부분이다. 종들이 와서 주인에게 밭에 가라지가 너무나 많다고 보고한다. 분명 좋은 씨앗을 뿌렸는데,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주인은 원수가 이렇게 했다고 탄식한다. 어느 때나 시샘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못된 마음을 품고 이런 식으로 앙갚음하려는 사람이 있다.

종들이 말한다. “가라지를 뽑을까요?”

주인은 그냥 두라고 말한다. 왜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도 때로는 분간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분명한 것은 다 자라 본 뒤에 확실히 가를 수 있다. 그래서 주인은 추수 때까지 두었다가 추수꾼들이 먼저 가라지만 모아 불사르고, 곡식은 모아서 곳간에 넣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37-43절은 이 비유를 푸는 열쇠를 제공한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다.

 

이 세상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교회도 마찬가지다. 가라지와 곡식이 공존한다. 그런데 그것을 성급히 가르고 뽑을 수가 없다. 가라지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알곡일 수도 있고, 알곡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가라지일수도 있다. 이 세상이 선과 악이 확연히 나뉘는 것이라면 참 쉬울텐데, 그렇지 않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도 흑백논리 때문에 얼마나 많은 희생과 피를 흘렸는지, 겪어왔다. 그리고 가라지와 알곡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서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진리에 대한 기준? 선에 대한 기준? 미에 대한 기준? 힘이 곧 진리라고 믿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익과 자본이 곧 선이라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인공미나 우리도 모르게 강요된 아름다움을 좋은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지금까지의 모습으로 본다면 바리새인들, 유대인들, 서기관들은 스스로 알곡이라고 자부하지만 가라지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자만할 수 없는 것은 기독교인이라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자기는 결코 가라지일 수 없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그런 장담을 하던 사람이 나중에 더 교만해져서 하나님 배반하는 경우도 있고, 하나님 앞에 늘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정말 알곡인 경우도 있다.

사실 오늘 말씀을 우리가 접하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 내가 가라지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니라고 부인하고 장담하지만, 오히려 누군가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단정 짓고 가라지라고 비난할 수 있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사실은 내가 가라지일수도 있다.

 

가라지를 미리 뽑아내려는 것은 곡식에게 갈 양분을 가라지가 함께 가져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가라지와 알곡이 서로 경쟁을 하면서 정상적인 곡식이 고통을 받기 때문이기도 하다.

왜 이 세상은 선과 악이 공존하고, 이유모를 고통과 고난이 따르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을 맞는가? 그러나 마지막 때를 바라보며 참고 견뎌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서 가라지는 불살라지듯 한 형국을 맞지만, 알곡은 하나님 나라에서 해 같이 빛나는 형국을 맞게 된다.

 

 

  1.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그런데 오늘 말씀은 가라지와 알곡이 예정론적으로 따로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된다. 영적으로 보면 내 안에도 선한 마음, 악한 마음이 공존한다. 사람은 누구나 그렇다. 어떤 마음에 반응을 하느냐에 따라 악인이 될 수도 있고, 선인이 될 수도 있다.

 

주님의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34절에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앞서에서는 이사야서를 인용한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리라. 그렇게 된 것은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흔히 아무나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를 쓰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 하신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을 깨닫게 하고 듣게 하는 좋은 방법이 비유다. 즉 주님은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비유를 쓰셨다.

이사야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이에 대해 부정적으로 선포했지만, 주님은 “보고 듣게 된 이들에 대해” 복음적으로 선언하고 계시다. 율법은 보기는 보아도 볼 수 없고, 듣기는 들어도 들을 수 없으면, 하는 수 없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이어진다.) 복음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어 복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시면서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 말씀하신다. 들리는 사람만 들으라는 말씀인가? 아니다. 누구든지 깨닫길 바란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어떻게 되길 바란다는 말씀일까? 알곡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인가? 가라지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인가? 당연히 깨닫고 알곡처럼 되라는 말씀이다.

51절에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제자들은 뭐라고 대답했는가? “네, 그러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비유들은 예정론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과 믿음에 대해 도전을 하면서 결론적으로 어떤 삶을 선택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인가? 그렇다. 알곡이다.

 

 

  1. 알곡이 되기 위하여

베드로와 야곱에게 적용해봤다. 베드로는 스스로 알곡이라고 자부했을지도 모른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고, 나중에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을 때는 어땠을까? 자신이야말로 가라지라고 비관하고 자괴감을 갖지는 않았을까?

야곱은 어떨까? 인생 살면서 아픔을 겪고 요셉을 잃어 오랜 세월 한 맺힌 삶을 살면서 스스로를 버러지 같다고 여겼다.

그런데 하나님은 누구도 그렇게 살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세상이 그렇게 만든다고 하더라도 알곡처럼 살기를 바라신다. 좋은 열매를 맺기를 바라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셨다. 가라지처럼 돼버린 것 같아 초라해지고 부끄러워진 그에게 찾아오셔서, 그를 회복시켜주시고 양무리를 치게 하셨다. 알곡의 삶을 살도록 새롭게 하셨다.

야곱은 누구와 함께 이집트에 갔는가? 하나님이시다. 버러지 같은 인생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그와 동행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집트에 가면 어쩌면 더 수모를 당하고, 영적으로 보자면 하나님 앞에서 가라지 같을지도 모르지만, 그와 함께 동행하신 하나님은 그를 놓지 않으셨다. 약속대로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어 나오게 하셨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주님은 그래서 동행하시며 힘주시길 원하신다. 주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 같지만, 주님은 그대로 주의 뜻대로 살기를 바라시고 찾아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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