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13일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며, 열방을 공의로 다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 뜻 깊은 광복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압제의 포효가 그치고, 자유를 맨 사슬이 풀리던 날, 해방의 감격으로 이 민족이 흘린 눈물을 상기하는 때에, 또 하나의 언덕인 평화통일을 염원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 됨의 찬가를 부르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시142:7)

 

  • 세상의 복음들

복음이란 무엇인가? Good News 좋은 소식. Gospel.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좋은 소식은 무엇인가?

 

TV를 보다보니까, 유익한 정보가 참 많다.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살아가는 법, 부동산을 비롯한 제테크 방법, 여가와 문화의 다양한 알짬정보들을 들을 수 있다. 황금알, 고수의 비법, 동치미 등등의 프로그램은 패널들이 나와 자신의 인생의 노하우와 비법, 가치관과 생각들을 공유하며 재미와 의미를 더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의식도 그렇게 바뀌어가는 것 같다.

 

황금알에 나왔던 이야기인데, 시집 잘 간 여자의 4등부터 1등까지의 등수가 있다. 역대 최고의 공감을 자아냈다고 한다.

 

4등은 남편이 늙어서까지 연봉이 높은 여자

3등은 명품 걸치고, 들고 다니며, 모임 때 회식비 다 내는 여자

2등은 혼자만 늙지 않는 여자

1등은 자기 남편은 불효자, 자기 자식은 효자인 여자.

이 말을 듣던 한 패널은 경찰생활을 하면서, 왕년에 놀던 여자가 오히려 시집 잘 가서 호강하는 걸 봤다라며, 행복한 인생을 위해서 중요한 비결이 무엇인지 암시적으로 말을 했다.

 

정말 우리 인생을 다채롭고 행복하게 해줄만한 것들이 많이 소개된다.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Good News가 되고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앞으로 집을 산다거나, 출세하게 된다거나, 세상의 부귀와 영광을, 믿음으로 얻게 될 것이라는 것은 복음이 될 수 있을까?

 

 

  1. 복음들과 복음

오늘 제목이 복음들과 복음이다. 복음이 다양한 형태의 것들이 될 수 있는가? 아닌가? 복음이란 무엇이고 믿음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보려고 한다.

 

기원전 31년 9월 2일 저녁 무렵,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7세 여왕이 마크 안토니우스와 함께 알렉산드리아에서 자결을 했다.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립파 함대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을 갔었다. 옥타비아누스는 20년에 걸친 로마의 내전에서 승리자로 등장했다. “경배를 받으실 분”이라는 ‘아우구스투스’로 선포됐다.

 

로마제국의 신학자들은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장 신적인 아우구스투스의 탄생일을 맞아, 우리는 만물의 시작과 같은 날로 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이 해체되고 혼란 속으로 빠져들 때, 질서를 회복했으며, 또한 온 세상을 새로운 모습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축복으로 탄생하시지 않았더라면, 세상은 제 멋대로 파멸 당했을 것입니다.”

 

20년간 지속된 전쟁의 소용돌이와 혼란 속에, 그것을 종식시켰다고 하는 것은 영웅의 출현과도 같은 것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로마제국의 신학자들은 영웅을 한 차원 끌어올려, ‘평화의 주’로 신격화했다. 그러면서 평화의 주의 탄생을 의미하는 달력의 교체를 선포한다. 우주가 이 황제로 인해 교체되었음을 신학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그 신의 탄생일은 그분 안에 속하는 복음을 처음으로 세상에 가져다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구세주이고, 새로운 창조와 평화를 가져오신 분이시다. 아우구스투스의 탄생으로 세상이 복음적으로 바뀔 것이다. ’

그런데 여기에서 사용하는 복음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앙겔리아. 복수형태다. 복음들이라는 뜻이다. 복음의 다양한 모습들로 세상은 살기 좋아지고, 풍요로워지고, 평화로울 것이다. 그 체제 안에서 복음들이 실현될 것이다. 그런 희망을 주었던 말이 바로 유앙겔리아이다.

 

마치 현대사회에서 의학과 과학이 발달하고 4차 혁명이 일어나고, 수많은 인생의 행복에 대한 비법과 콘텐츠가 쏟아지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어느 것을 고를까, 기대에 부풀어 있는 것과 같다.

 

 

  1. 복음

그런데 성경은 이에 대해서 정면으로 도전한다. 유앙겔리아(복음들)라는 복수형태를 사용하지 않는다. 유앙겔리온. 복음이다. ‘복음들’이 있을 수 없다. 이것도 복음이고, 저것도 복음이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의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바울도 갈라디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살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세상에서 우리의 행복에 대해 말하는 것들이 정말 행복이고 복음이 될 수 있는 지 생각해보라. 오늘날 한국교회는 과연 무엇을 복음으로 제시하고 있고 믿고 있는가? 혹시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그리고 다른 것들이 복음이 된 것은 아닌가? 본말이 전도된 것은 아닌가?

 

오늘 말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다른 복음서들 – 복음서(책)들이다. 복음들이 아니다. – 특별히 요한복음과 잠시 비교해보려고 한다.

오늘의 말씀은 오병이어 사건 뒤에 나타난 것이다. 누가복음은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이 없다. 아이들이 일기를 처음 쓰기 시작할 때, 하루에 대해 나열한다. 그런데 글쓰기를 배우면서 그날의 의미 있는 중요한 일에 집중해서 쓴다. 마찬가지로 누가는 선교적인 복음을 전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문맥의 흐름상 이 부분은 언급하지 않았다. 중심문장을 뒷받침하는 문장이 아니었다.

요한복음에서는 오병이어 사건 뒤에 이 부분을 간략히 전하는 대신에, 배를 타고 예수님과 그 일행을 좇던 무리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을 떠나갔지만, 베드로와 제자들이 남은 것에 대해서 기록한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하고 무리들에게 했던 주님의 말씀은 이것이었다.

“너희들이 나를 따름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먹고 배부름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떠나갔다.

그러나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말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에 대해서 요한은 분명하게 대조시키고 있다. 굳이 말하자면 예수를 통해, 세상적인 것들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들이 복음이라고 좇는 것이다. 잘 먹고, 성공하고, 출세하고, 세상에서 유익하게 되는 것들을 얻으려 예수를 찾는 것이다. 이런 목적으로 예수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실 수 있지만, 본말이 전도된 게 문제다. 믿음은 일용할 것을 구하고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중에, 일용할 것들은 저절로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던가?

 

요한복음에서 베드로의 고백을 이끈 체험적 사건은 풍랑 속에 찾아오신 예수님을 영접한 사건이라고 쉽게 유추할 수 있다. 풍랑이는 바다에 예수님께서 물위로 걸어 가까이 오심을 보고 놀랐다. 하지만 “내니 두려워 말라.” 음성을 듣고, 배로 영접하니, 가려던 땅에 이르렀다. 이렇게 짧다. 그런데 마태는 요한이 짧게 언급한 것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1. 구원의 소식 복음

이제 마태복음을 자세히 살펴볼 차례다.

그들은 벌써 맞은 편으로 떠났건만 도착하지 못했다. 마치 인생의 깊은 밤, 세파의 큰 물결에 고생이라도 하듯이, 24절은 거스르는 바람의 물결로 고난을 당했다. 밤 사경이다. 오후 6시에 다음날 오전 6시까지의 시간을 4로 나누어 계산했다. 사경은 그 마지막, 즉 가장 깊은 밤이다. 그 때까지도 건너가지 못하고 갈릴리 호수를 표류했다. 예수님께서 호수 위로 걸어오셨다. 제자들은 유령인가 하고 무서워 소리질렀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주님의 목소리였다.

주님의 음성에는 온 우주만물이 순종하는 듯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베드로가 만약 주시면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주께서 ‘오라.’ 하시자 정말 기적과도 같이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걷고 있었다. 주님의 말씀의 능력과 권세를 확신하라.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서 이와 같은 용기와 담대함을 주신다. 고기잡던 베드로가 밤새 잡은 고기가 없지만 말씀을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순종했을 때, 역사와 능력이 일어났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며 주님의 응답을 구할 때, 우리 심령 가운데 평안함과 함께 들려주시고 느끼게 해주시는 주님의 음성과 마음은 불가능한 일이 없을 것만 같이 만든다. 베드로가 그랬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말씀이 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주님을 바라보던 시선을 놓친다. 의심이 들고 주님보다 바람을 보고 심한 파도를 본다. 그리고 물속에 빠져가듯이, 상황의 고난과 어려움에 점차 믿음과 용기를 잃어버린다. 어쩌면 복음적인 것들로 삼았던 것들이 오히려 우리를 흔드는 파도나 바람처럼 여겨지게 된다.

주님은 베드로를 붙잡으시고 건져주셨다. 예수님께서 함께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치고 풍랑이 잠잠해졌다.

 

여러분 복음들과 복음의 차이는 무엇인가? 단순히 우리의 삶이 윤택하고 잘되게 되는 것, 호강하고 행복한 것들은, 믿음의 실상들로 우리에게 실현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복음이라고 할 수 없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며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의 표.

 

이 시대는 수많은 복음들을 쏟아낸다.

 

어떤 미혼모가 있는데, 딸아이는 4살이다.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동년배 남자를 만났다. 그에게도 5살짜리 딸이 있다. 몇개월 동거하다가 둘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 서로 의지하고 살만하다해서 혼인신고까지 올렸다. 어느 날 둘이 대판 싸웠나보다. 자기 아이만 챙기는 모습 때문에 갈등이 일어났다. 결국 이혼하기로 했다. 주변에서 그런 말들을 한단다. “어떻게 그런 놈하고 사냐? 너를 위해 이혼하는 게 맞다.”고 말이다.

 

세상이 말하는 복음이란 이런 식이다. 나는 그렇게는 못산다. 내 행복을 위해서 살겠다. 이것이 이시대의 복음들이다. 나에게 손해 보는 일 당하면 참지 말아라. 사람들이 마음은 거칠어지고 용서와 관용이 없다.

 

세상에서 잘사는 비법들, 행복하게 사는 비결들, 마치 우리 귀에 복음들처럼 들리나, 진정한 복음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진정한 복음은 나를 사랑하셔서, 내 영혼과 생명을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사시고 구원하시는 주님의 은혜이다. 죄와 저주와 사망 권세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곧 복음이다. 그에 대해서 ‘복음들’이 있을 수 없다.

 

요한복음에서 사람들이 먹고 배부를 수 있을 것을 기대하고 예수님을 좇았다. 로마제국의 신학과 세상풍조가 가져다주는 희망과 기대는 ‘로마의 평화’가 실현되고 잘 살게 될 거라고 했다. 그러나 로마의 평화 그 이면에 일어난 수많은 부조리들을 보라.

 

다른 복음들이 아니라 예수 복음을 믿고 주님을 영접할 준비가 됐는가? 그 믿음과 용기가 있는가?

많은 크리스찬들이 있지만 예수를 닮은 사람 만나기 참 어렵다. 교회가 복음을 좇지 못하고 복음들을 좇아가는 듯 하다. 하지만 우리 교회 만큼은 예수를 닮고 예수를 좇는 교회되길 바란다.

 

Leave a Comment

빠른 문의

이메일로 문의를 남겨주시면 빠른 시간 내에 연락드리겠습니다.

Not readable? Change text. captcha t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