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눈(갈라디아서5:16-24)

천국의 눈(갈라디아서5:16-24)

 

 

 

2017년 7월 23일

피조물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가 주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인간의 욕심과 죄악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때에, 복의 원천이신 주님이 주실 위로와 희망을 기대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지치고 피곤한 심령에 새로운 힘과 용기를 더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8)

 

 

한국 사람들을 맨붕에 빠뜨리고 지옥에 떨어진 듯한 고통을 주는 법이 있다.

 

  • 천국의 계시

세상 사람들은 천국이나 지옥이 어디 있느냐고 말한다. 또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정말 있느냐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듣기는 했지만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천국이나 지옥은 가보지 않았으니 알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믿지 않거나 의심한다. 그런데 이미 어떤 사람은 지옥에 살고 어떤 사람은 천국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국과 지옥을 바라 볼 수 있는 신비한 눈을 열어주신다. 믿음의 눈도 주셨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도 주셨다. 그리고 소망이라는 특별한 눈을 주셨다. 이것을 계시사건이라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눈에 보이지 않으니 볼 수 없다. 눈에 보이도록 시각화 한 것을 우상이라고 하고 그것을 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 형상화 할 수 없는 하나님을 믿도록 증거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현존하심과 영광이 꽃핀 분이다. 괴로움과 염려 근심 걱정에 싸여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물을 법할 때, 주님은 ‘공중의 나는 새를 보라.’, ‘들의 핀 꽃을 보라.’ 말씀하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섭리와 임재가 우리 삶 속에도 깊이 개입해 있음을 깨닫길 바라신다. 하나님을 바라보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억지로라도 보려고 인위적인 황홀경에 빠지고 환몽에 취해서가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보라고, 볼 수 있다고 가르쳐주셨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길을 잃었을 때, 전도의 문을 열수 없을 줄 알았다. 그러데 하나님은 루디아를 예비해놓고 만나게 하셨다. 우리 인생길에서 막힌듯하지만, 예상치도 못한 아홉길이 열리는 경험을 한다. 우연이 아니다. 뜻하지도 않았던 사람을 만나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선물이 전달되기도 한다. 신앙인은 그래서 믿음과 순종으로 좁은 길도, 거친 길도, 막혀보이는 길도 용기있게 담대하게 걸을 수 있다.

 

천국에 대한 것, 지옥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천국은 내세에 가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 가운데에도 알 수 있다. 그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천국의 큰 소망이, 표류하기 쉬운 우리 인생에서 구원의 푯대를 향하여 방향키 역할을 한다.

 

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그 길을 따랐고, 끝장날 것 같았던 일도 승리했다.

하갈이 아브라함 집에서 사라에게 쫓겨났을 때, 생존권을 잃어버리고 죽는 일밖에 없는 줄 알았다. 자기는 어찌되도 상관은 없는데, 하나 있는 아들이 죽는 것은 차마 볼 수 없어 구슬피 울었다. 하나님도 그 처지를 슬퍼하셨고, 가만히 볼 수 없어 하갈의 눈을 밝혀주셨다. 곁에 있던, 그러나 보지 못했던 샘물이 보였다. 볼품없는 가죽부대에 물을 담아 아이도 마시고 자기도 마시자, 마음은 진정되고 새 힘이 솟아올랐다. 지금은 가죽부대에 물을 담아 마시는 처지지만, 하나님께서 그 아이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리라는 소망 넘치는 음성이 그 심령에 다가왔다. 천국이 그에게 활짝 열리는 체험이 아니고 무엇인가? 가난하고 굶주리고 생존권의 위기를 겪으며 통곡하고 슬피 우는 이에게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지 않으신다. 이 땅에서 천국을 열어주시고 체험하게 신다.

그래서 주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내세에서만 천국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천국이 열리고 다가오는 것이다. 주님은 그 복음을 먼저 듣고 깨달은 이들이 그것을 전하라 명령하신다. 그리고 미련한 방법처럼 여겨지는 전도로 복음이 전해진다.

 

주님은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말씀하셨다. 또 주기도문 첫머리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기도하도록 가르쳐 주셨다. 기독교인은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갈망하고 소망하며, 이 땅에서부터 일구는 삶을 살기로 결단한 사람들이다.

 

하나님 나라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과연, 이것은 아는지 모르겠다. 자기가 이미 지옥 속에 갇혀 지내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다.

세상에서 떵떵 거리고 산다고 정말 잘 사는 것 아니다. 어떤 제약회사 회장이 운전기사에게 막말을 했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그 육성이 풀버전으로 돌아다니기에 들어봤다. 자기가 갑질을 해도 될 만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고 저러고 있지만, 굉장히 마음이 곤고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해도 그 심령은 매일 같이 위태위태한 처지에 있다. 지옥을 이미 떠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그는 그걸 보지 못하는 것 같다. 물론 그는 자기는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천국지옥 상관없이 자기 뜻대로 살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더 문제다. 지옥을 짊어지고 살면서 천국을 보지 못하니까 말이다.

 

 

  1. 천국을 위한 일굼

우리가 천국을 이 땅에서부터 일구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육체의 욕심은 성령을 거슬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게 한다.

 

1) 기도하는 삶을 살라.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을 들으며 살아야 한다. 18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라 하니라.”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신다. 그것을 깨닫는 삶은 기도하는 삶이다. 주께로부터 성령을 통해 주시는 음성에 순종하고 충성할 때, 인도하심을 따라 살게 된다.

 

성령이 우리의 영과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한다고 로마서는 말씀하고 있다(롬8:16).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신다(엡3:16)고 에베소서 말씀이 증거하고 있다.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지 못하니까, 자꾸만 율법 아래에 있게 된다. 자기 생각, 자기 고집, 자기 방법, 즉 육체의 방법대로 행한다. 그러다가 시험당하여 죄를 범한다.

 

이것은 철두철미한 바울의 체험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들어야 한다.

 

그는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요, 율법에 철두철미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율법 아래 있지만 그가 스스로 만난 자기는 가식적이요, 외식하는 사람이요, 자유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스스로 고백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지만 자기 속에 또 다른 법이 있어 죄의 법에 사로잡히는 것을 보았다. 쉽게 말하면,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심리와 같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아서 남들은 모르지만 자기 속에 “우상숭배, 주술, 원수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짓는 것, 분열함, 이단, 투기, 술취함, 방탕함” 죄의 법이 구더기처럼 도사리고 있는 자신을 봤다.

1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슬렀다. 그것 때문에 괴로웠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탄식했다.

 

이상하지 않은가? 왜 하나님 법 아래에서 우상숭배와 주술 같은 것들이 생기고, 원수를 만들고 당을 짓게 되는 지 말이다. 율법에 비춰지는 자기 의와 성공에 대한 욕망이 또 다른 우상을 만들어 낸다. 자기 행위가 율법에 미치지 못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주술이 생겨나고, 율법에 대한 완고한 고집 때문에 당을 짓고, 원수를 만들어낸다. 율법에는 자유함이 없었다.

이랬던 바울을 상상해보라. 스데반이 돌에 맞아 처참하게 죽는 것을 보면서 혈기가 등등했고,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자기만 의롭다고 생각했고 법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사람이 주위에 한명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까지도 불편하게 한다. 얼마나 불행하게 살고 있는가를 모른채 말이다.

 

2) 두 번째는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 샘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은혜를 마셔야 한다.

하갈이 쫓겨나 광야에서 울고 있을 때, 샘물을 발견하고 물을 마셨다. 우리가 마셔야할 샘물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영원히 마르지 아니할 샘물이시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고 말씀하셨다. 하갈이 하나님의 약속과 복있는 비전에 눈을 뜨게 됐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샘물을 마시는 자마다 천국의 눈이 열리고 보게 된다.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그전에는 몰랐다. 자신이 얼마나 부끄럽고 추하고 곤고한 사람인지 말이다. 옛사람의 옷을 벗어버리니, 심지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을 믿음으로 사모하며 주님께서 갈아입혀 주신 새옷을 입고 보니까, 천국의 일꾼으로 결단하게 됐다.

 

예수님을 만나면 새생명에 눈을 뜬다.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던 사람이 성령을 따라 산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옷입는다. 용기를 잃고 늘 좌절하고 세상의 법칙에 매여 살던 사람이 예수님 때문에 용기를 얻고, 소망을 가지고 믿음의 법칙을 따라 산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보인다.

 

3)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가 되라.

 

67-9을 보라.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22절에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들이 열거되어 있다. 사랑, 희랑,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천국은 단순히 죽어서 가는, 이 세계와 분리된 내세가 아니다. 논쟁거리도 아니다.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발견하고, 그 씨앗을 심는, 소망 있는 자에게는 희미할래야 희미할 수 없는 선명한 세계이다.

이 열매들이 이 세상에서 욕심으로 맺는 성공, 출세, 권력, 부와 명예 등등의 것과 비교하여, 비교할 가치도 없음을 아는 사람들은, 오늘 천국을 바라고 그 씨앗을 심기로 결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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