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16일 성령강림절 후 6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거룩하게 구별된 주님의 날에 저희들을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무더위와 장대비가 범벅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계절에, 주님이 주실 안식과 평안을 사모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두려움과 불안을 몰아내고 기쁨과 소망으로 채워지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거룩의 말씀 : 새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시98:1)
- 확신과 의심의 역설
두 가지의 이야기로 오늘의 말씀을 열고자 한다.
먼저는 이운규 집사님이 사고를 당했을 때, 최미자 권사님이 당시 경황없는 상황에 대해 하는 말이 있다. 제가 병원에 도착하자, 저를 보고선, “이제 살았구나!” 마음이 놓이더라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이런 존재가 된다는 것은 참 보람된 일이다. 아마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났을 것이다.
두 번째는 이런 假定이다. 골머리를 앓아야 하는 일이 생겼는데, 예배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딜레마에 빠졌다. 뾰족한 수는 없지만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만 같다. 그리고 예배고 뭐고 그럴 겨를이 없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며 문제를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알고 있지만, 그런데 그럴만한 믿음이 들지 않는다. 그 무거운 짐을 쉽게 내려놓을 수 없다.
하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절망하고 괴로울 때, 찾아오는 확신이다. 반면에 또 다른 하나는 아직은 내가 뭔가 해볼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을 때, 찾아오는 의심이다.
이 두 가지는 사실 동전의 양면 같다. 어쩌면 우리는 인생 속에서 이 위태로운 신앙의 외줄을 타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해서 더 이상 신앙의 위태로운 외줄타기가 아니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라는 복음의 길 위에 서 있음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란다.
- 제자들이 느낀 딜레마
나사로가 중병에 들어, 사람을 급히 보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빨리 와주시기만을 바랐다. 예측된 시간이 있는 법이다. 예수님께서 오셔도 벌써 왔을 시간이다. 그런데 어떤가?!
5-6절에서, 주님은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이 남매를 본래부터 사랑하셨는데,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전해 들으시고 그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
나사로의 위독함 앞에, 마음 졸이며 주님을 기다라는 두 자매의 다급함은 잠시 미루자.
제자들이 생각했던 예수의 딜레마를 먼저 생각해보자. 제자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지, 정작 예수님과는 무관하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해서 황급히 피신했다. 세례요한이 사역하던 곳이었다. 그런데 다시 그곳에 간다는 것은 목숨과 안전이 위협받는 일이다. 들어가야 할까? 말아야 할까?
8절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유대로 가자고 하실 때,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고 했는데, 그리로 가시려 합니까, 물었다.
들어가자니 예수님과 제자들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롭다. 들어가지 말자니 나사로의 생명이 위태롭다. 속태우고 있을 마르다 마리아가 애처롭다.
예수님의 목숨은 일단 차치하더라도 제자들의 안위가 더 중요할까, 나사를 살리고 자매를 돌보는 것이 더 중요할까?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예수님의 인생은 아직도 밝은 대낮인데, 벌써 인생의 밤을 맞을 수 있을까?
여러분이 만약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이 어떤 판단을 내리시기를 바라는가? 생각해보라.
반대로 생각해보자. 여러분이 만약 나사로의 남매 중 하나라면 예수님이 어떤 판단을 내리시기 바라는가?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는 비장하다.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한다. 머뭇거리고 있는 제자들 사이에서 앞장서서 용기를 낸다. 이런 모습은 어떻게 보이는가?
- 낙담하는 마리아와 마르다
예수님께서 가셨다. 마르다가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나와 맞았다. “주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
잠시 뒤에 마리아도 예수님께서 부르신다는 말을 듣고 급히 나왔다. 그리고 똑같이 말한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32)
돌이킬 수 없음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난다.
예수님은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고, 못 고칠 질병이 없으셨다. 37절에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유대인들이 비꼬아 묻는다. 그 맹인은 9장에 나오는 실로암 연못에서 눈을 뜬 청년을 기억나게 하는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비꼬았는데, 이 자매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예수님만 계셨다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을 확신한다. 그 확신이 넘치고도 넘친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원하는 때에 예수님은 오지 않으셨다. 절박한 만큼 아쉬움은 큰 법이다. 그 때는 단순히 ‘원하는 때’가 아니라 1분 1초가 다급하고 절박한 때이다. 최미자 권사님은 제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안도감이 들었다고 했는데, 이 자매들도 바로 이런 것을 바라지 않았겠는가?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기 전에 오셔서 살려주셨다면 이처럼 슬프지 않았을텐데, ‘무엇으로 생명과 시간을 돌릴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마음이 심령을 가득 채웠다.
따지고 보면 이것이 우리가 겪는 신앙의 문제이다. 가장 절박하고 힘들 때, 주님의 응답이 없다. 분명히 낙심이 찾아든다. 거기에 제자들이 느꼈던 것처럼 신앙의 딜레마들이 덧붙여진다. 주님의 방법대로 따라나섰다가는 더 큰 위협을 직면해야 할지도 모르는 난감한 상황에 빠진다. 주님은 내 원대로 문제를 해결해주시지 않고 인생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시지도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다.
- 부활의 주님에 대한 再믿음
오늘 말씀을 통해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복음은 무엇일까? 두 가지를 살펴 볼 텐데, 먼저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4절)
이 표적을 통해서 증거되는 것은 무엇인가? 분명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요, 그리스도시다. 단순히 치료자(즉 문제 解決者)가 아니시다. 만약 그랬다면 누구보다 더 빨리 달려왔을 것이다. 이것을 많은 사람들이 놓치거나 깨닫지 못하는 부분이다. 주님은 죽은 자까지도 살리시는 생명의 주시요, 부활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다.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착오가 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나 마르다가 원하는 때에 오지 않으셨던 것은 분명하다. 사람이 원하는 때에, 자기 기준의 때에 오지 않으면 오지 않았다고 여긴다. 율법적이고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일수록 그렇다. 혹은 믿음이 연약한 사람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오지 않으신 것이 아니다. 오셨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그리고 부활의 믿음을 요청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치료자나 문제해결자로서의 주님을 믿느냐? 부활이요 생명의 주로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을 믿느냐? 그 믿음을 시험하고 계시다.
우리는 이런 신앙을 체험할 때가 많다. 더 이상 인간의 생각과 방법으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벼랑 끝에 서있다고 생각 들 때,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어쩌면 주님께서 능히 하신 일을 잊거나 영광을 잊어버릴까봐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 때문에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신앙을 갖기를 바라신다. 주님은 문제 해결에 그치지 않고 참구원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고 보니까,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이셨을 때, 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따랐다. 주님은 그 따르는 이유에 대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을 생명의 떡이요, 생명으로 경험하지 못하고, 부나 이익을 해결해주는 해결자로 오해했다. 그러나 주님은 저와 여러분의 생명자체가 되어주시는 분이시다. 이 믿음에 이르지 못하고 기복신앙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믿는 것부터 오늘 우리가 새롭게 결단하자.
- 주님을 믿고 따라가라.
다음은 필요 이상의 생각에 대한 것이다. 불필요한 염려나 걱정이다.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비장하게 말한다. 딜레마에 빠져있던 제자들에게 이 한 사람의 용기는 분명코 사기를 높여줬을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라.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있다. 예수님은 위험을 무릅쓰고 죽으러 가자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시다.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절)
생명을 잃어 잠든 이를 깨우러 가자고 하신다. 도마는 용기가 충만한 것 같지만, 주님의 말씀을 정확히 듣지 못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말씀을 정확히 듣지 못하고 자기 이해방식으로 듣고 오해할 때가 많다. 그리고 복받기에 합당한 공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제자됨에 믿음보다 행위를 내세울 때가 많다.
왜 이런 인식의 차이가 발생한다고 생각하는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선입견 때문인가? 자기가 생각하는 습관대로 듣기 때문인가? 주님을 믿으면서 자기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해준다.
제자들이 장님에 대해 물었다. 그가 나면서부터 맹인이 된 이유는 자기의 죄 때문인지, 부모의 죄 때문인지 말이다. 그때, 주님은 그런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말씀하셨다.
- 적용과 실천
잠든 이를 깨우시고, 생명의 양식이 되어주시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는 것을 보는 복음적인 믿음의 눈이 없다면, 제자들은 사람들이 규정해놓은 정죄의 올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율법에 갇혀 살 수밖에 없다.
인생과 신앙의 문제 사이에서 딜레마를 계속 느낄 테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부르신 주님 앞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 한 번도 자유함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이런 고백을 한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3:17) 그의 삶이 편하고 고난이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렇게 고백한다.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1:9-11)
예수를 온전히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었기에,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를 느꼈다. 자기의 원대로 뜻대로 되지 않아도, 부활의 주님을 살리신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는 뜻임을 깨닫고 믿음으로 견뎌냈다. 그는 사망에서 구원을 경험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오늘 우리가 바로 이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하며, 단순히 내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해결자가 아니라 구원자이신 주님을 바라봐야 하지 않겠는가? 기억하라. 거기에서 자유와 기쁨을 선물로 누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