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30일
죄인들을 불러서 거룩하게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오늘 복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수해를 당한 이웃들의 아픔 때문에 온 국민의 마음이 무거워져 있는 때에, 주님께서 펼치실 치유의 역사를 소망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닫혔던 마음이 열리고 상심한 마음이 위로 받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께서 샘을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각종 들짐승에게 마시게 하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공중의 새들도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귀는도다.(시편104:10-12)
- 구조
오늘 우리는 성경을 통해 찬양과 감사의 노래를 듣는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고 보이셨다.
말씀의 구조를 보자.
1-4절은 찬양과 감사의 고백이다.
5-6절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이한 일을 판가름 해보라고 한다. 그리고
7-45절은 그 구체적인 내용이다.
1) 7-23절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2) 24-45절은 모세와 아론을 통해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인도하신 전과정을 파노라마처럼 그리고 있다.
- 세 가지 키워드
제가 이 시편을 묵상하면서 찾은 세 가지의 키워드가 있다.
9-10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이삭과의 ‘맹세’ 그리고 야곱과의 ‘율례, 곧 영원한 언약’이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되게 하실 것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믿고 구원하심을 확신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로 주실 것을 영원히 사모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때로는 고난이 놓여 있다. 뜻대로 안되는 것처럼 보인다. 낙심은 사탄의 전략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낙심하고 있는 동안, 저는 악마의 교활한 웃음을 보는 것 같다. 우리 속에 속삭인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우리를 유인한다.
그런데 시인은 믿음의 눈을 떴다. 그 역시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 눈으로 보니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2)이 눈에 들어왔고 자랑거리가 생겼다. 마음의 즐거움(3), 그것은 비밀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았을 때만 얻는 선물이다.
그 사연을 들어보자.
1) 첫 번째 나그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가나안에 있을 때, ‘나그네’ 였다. 왜 나그네였을까? 나그네였다는 것은 그들의 소유가 되지 못했다는 것인데, 성경을 읽어보면, 그 거주지는 분명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소유지였다. 브엘세바는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계약을 맺어, 더이상 누구도 침범하지 못할 곳이 됐다. 심지어 창세기23장을 보면 에브론의 밭과 그에 속한 굴과 나무들을 거저 받을 수도 있었지만, 돈을 지불하고 샀다. 18절에 그곳이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되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삭 때도, 야곱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브라함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 번 브엘세바의 계약이 있었다. 우물을 파면 그랄의 목자들에게 빼앗기기를 반복했지만 결국 자기의 소유가 되었다. 야곱 때는 창세기 37장을 보면 이렇게 증거한다.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그런데 왜 ‘나그네’라고 할까?
시편105편 12절, “그들의 사람의 수가 적었다.” 한 마디로 힘이 없었다. 그러니 나그네나 다름 없었다. 하나님은 분명히 11절에서 보는 것처럼 “가나안 땅을 주어 소유가 되게 하리라.”는 약속을 주셨지만, 현실적인 삶은 자기 소유권조차 주장할 수 없을 만큼 법적이든, 사회적이든 보장받지 못하는 처지였다.
2) 두 번째 나그네
맹세는 언약보다 더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주신 약속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대로라면 어느 순간에는 힘이 없어 나그네와 다름 없는 처지에서 벗어나야 마땅한 것 아닌가? 그런데 23절을 보라.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감이여 야곱이 함(가나안의 아버지)의 땅에 나그네가 되었도다.”
이번에 나그네 됨은 앞에서의 나그네 됨과는 다르다. 앞에서는 힘이 없어 나그네 였지만, 이제는 애굽으로 이주함으로써 완전히 소유권을 상실하고, 정말 말그대로 나그네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괜찮다. 애굽에서 어느 정도 기대되고 보장된 지위가 있다. 이것만 잘 되면, 가나안에 대해 나그네됨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의 약속은 완전히 빗나갔다. 애굽에서 크게 번성하고 강해졌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요셉이 있을 때 애굽에서의 생활은 좋았지만, 그 이후에 상황이 달라졌다. 애굽 사람들의 마음이 변했고, 그러나 이스라엘은 한 순간에 노예로 전락했다. ‘영원한 언약’(베릿트 올람)은 맹세 보다 더 강한 것이다. 앞에서의 언약과 맹세는 유한성을 가지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지만, 영원한 언약은 그야 말로 영원성에 기초한 약속이다.
그런데 어떤가? 나그네는 아니지만 나그네 처지에서, 정말 나그네로, 그리고 노예로 전락했다. 이것은 언약에서 맹세로, 그리고 율례 영원한 언약과는 반대되는 모습 아닌가?
- 기이하신 하나님의 섭리
시인은 기이한 일을 봤다고 고백한다.
먼저는 가진 것과 힘이 있다고 나그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학대하고 구박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다. 16절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그러면 야곱의 집안 형편은 얼마나 어려워졌겠는가? 참 기이한 일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될 것을 아시고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다.”고 고백한다. 그것도 종으로 팔려가도록 말이다. 발에 차꼬를 차고, 포승줄도 아닌 쇠사슬에 묶여서 말이다. 그러기에 어느 누구도, 그 일이 구원자가 예비하시는 섭리인 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나중에 어떤 인물이 됐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이런 것을 볼 때, 하나님의 경륜은 유한자가 어찌 다 측량할 수 있으랴? 그러기에 우리가 일이 절망적이라고 낙심하거나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설령 “저주의 영”(그것이 있다고 가정하여)이 우리를 그렇게 이끌어 가는 듯한 두려움이 들더라도, 하나님은 요셉의 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신다. 불행한 역사를 선한 역사로 바꾸신다고 말이다.
오늘 인생에 고통이 따르고 절망스러운 일이 있는가? 마음이 괴롭고 어두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가? 이 시간 하나님은 기이한 방법으로 섭리하시는 능력을 믿고 마음의 평강과 소망을 갖기를 원하신다.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라.” 음성을 듣기를 원하신다.
두 번째 기이한 일은 애굽에서 하신 일과 광야에서 하신 일이다. 하나님은 애굽을 재앙으로 흔드셨다. 그런데 이스라엘 12지파 어느 누구도 비틀거리지 않고 탈출했다. 그것도 신기하지만 광야는 더 신기하다. 광야는 엄연한 생존의 현장이요 현실이었다.
구름기둥,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에서 물이 흐르는 사건들이 있었다. 절박했을 때였다. 그래도 자연적인 우연이라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40년이 그와 같았다. 어찌보면, 40년 동안 광야로 이끄신 하나님과 그 처지가 원망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40년간 한 번도 부족함 없었고, 의복이 헤지거나 발이 부르트지 않고, 무사히 광야를 거쳐 온 것을 보면, 그것은 한결 같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인의 영적인 깨달음과 고백이 있다.
언약에서 맹세로 그리고 영원한 언약으로 이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나그네 처지에서 나그네와 종으로 악화되는 것 같았지만, 42절을 보면, 하나님은 직접 하신 거룩한 말씀과 그의 종 아브라함을 잊지 않고 기억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 맺음말
여러분 복음을 믿으시는가? 그런데 현실은 그와는 정반대인가? 시인은 믿음의 눈을 떴다. 우리 역시 믿음의 눈을 뜨고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헤아리자. 내 생각과 정반대의 일을 하시는 것 같지만, 한 사람을 앞서 보내신 하나님의 경륜을 기억하라. 광야에서 주님의 보호날개 아래 품으심 같이 우리를 품고 계시기에, 아무도 그 품에서 그 새끼를 빼앗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