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9일 성령강림절 후 5주
영원토록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사랑의 하나님, 복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무덥고 습해서 우리의 신앙이 나태해지기 쉬운 계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인 순종과 겸손으로 예배하기를 원하여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뜨거운 태양 아래 나무그늘처럼, 우리의 마음을 시원케 하사, 위로와 힘을 얻으며,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시57:2)
- 귀에 거슬린 사울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이겼다. 늘 승리는 벅찬 감동을 준다. 개선문으로 환궁 할 때, 아낙들이 나와 환대했다. 전장에 나갔던 남편이나 아들을 기다리던 여인들과 아빠를 기다리던 아이들이, 無事歸還을 축하하며 노래와 춤으로 맞았다.
사울왕정이 시작된 이래, 이스라엘은 효과적으로 국토를 수호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 군을 이끌고 출천했다가, 이번에도 역시 아들, 남편, 아빠를 무사히 돌아오게 한 사울에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는 것이다.
소고와 경쇠의 요란한 소리는 승전의 기쁨을 돋궈주었다.
그런데 유독 사울의 귀에게만 굉장히 거슬리는 소리가 있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얼핏 들으면 그럴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 말을 이렇게 받아들이는 사울을 보면, 얼마나 배배꼬였는가를 생각할 수 있다. 다윗은 잘 알려진 인물도 아니었고, 장수라고 할 수도 없다. 이런 노래를 부른다고 해서 왕으로서 시기할 이유가 없다.
이 말이 사울을 무시하고 다윗을 높이려고 부른 노래일까? 민간에 떠도는 사울에 대한 여론을 반영하는 말일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만약 그런 의도가 있었다면, 왕 앞에서 감히 이 노래를 부를 수 없었을 것이다. 여인들은 왜 이런 노래를 부른 것일까? 이 말을 해석하자면 이런 것이다.
전령을 통해 전장에 대한 소식이 수시로 들려왔다. 왜 이토록 전투가 오래 지연되고 있는가? 성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걱정했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다윗을 전장에 보내 형들의 안부를 살폈다. 전투가 길어지는 이유는 골리앗이라는 쉽지 않은 상대가 블레셋 전투 전면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 이스라엘에 남아있는 부녀자들, 아녀자들에게도 전해졌다. 그동안 사울 왕이 전승에 전승을 거두고 전공을 세웠기에, 크게 염려는 안 들지만, 그래도 전장에 나간 집안 남자들이 걱정되고, 무사히 돌아오기를, 애태웠다.
다윗이 골리앗과 맞선 내용은 이미 잘 알고 있다.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림으로 전쟁은 일순간에 종결됐다. 우리 인생에서도 풀리지 않을 것 같던 문제들이 순식간에 해결될 때가 있는 것이다. 아무튼.
어느 전쟁이나 혁혁한 공을 세운 장수가 있는 법인데, 장수도 아닌 다윗이 개선장군이 된 셈이다. 그가 골리앗을 쓰러뜨림은 만 명이 목숨 바쳐 감당해야 할 일을 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인들의 노래는 단순히 그것을 노래한 것일 뿐이다. 다른 의도는 없다. 사울 왕이 정상적이라면 어떠해야 하는가? 함께 칭찬하고 그 전공을 치하하면 된다. 그렇다고 그 공이 다른 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결국은 다 사울왕의 것이다. 그렇다고 다윗이 왕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천천의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만만의 부하를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듬직한가?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았을 그 말이 사울의 귀에 거슬렸다.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혹시 自激之心은 아닐까?
- 사울의 두려움
왜 이런 마음을 갖게 된 것일까? 두려운 것이다. 12, 15절을 보면, ‘그(다윗)를 두려워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더 근원적인 게 있다.
어떤 사람이 어떤 행동이나 마음을 가질 때,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유보다 더 깊은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라. 표면적으로 보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다윗에 대한 시기심 때문인 것 같지만, 성경을 자세히 깊이 읽어보면 그 때문만은 아니다.
두려운 것이다. 뭐가 두려운 것일까? 조금 거슬러 올라가자면, 골리앗과 대결하는 다윗의 모습을 통해, 사람들은 보지 못한, 사울 자신만 본 것이 있다. 무엇일까?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면서 투구와 갑옷을 입고 칼과 창과 단창을 들고 나가는 대신에 담대한 믿음의 갑옷으로 옷 입고, 여호와의 이름을 들고 나갔다. 다윗은 골리앗에게 말한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노라.”(삼상17:45)
사울은 다윗이 골리앗을 맞선 모습에서 무엇을 보았나? 하나님의 현존하심이었다. 그리고 또 무엇인가? 자기에게는? 자기 안에는? 어떤가?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안 계시려고 안 계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버렸다.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지 않는 크나큰 두려움이 그를 감쌌다. 1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부리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렸다고 말씀한다. 선하신 하나님이 악령을 부리기도 하신다는 말인가? 그런 뜻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크나큰 두려움에 짓눌린 영적 현상이다.
하나님을 알고 믿지만,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외면하며 살 때가 있다. 하나님의 내적인 부재. 기억하라. 하나님의 임재는 무엇으로 충만히 채워지는 줄 아는가? 순종과 충성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사울은 이미 스스로 하나님보다 높아졌다. 순종과 충성보다는 자기의 뜻과 의와 생각과 욕망으로 채우기 시작했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임재를 어떻게 자기 안에 충만히 채울 수 있겠는가? 사무엘은 이것을 꿰뚫어 보고, 제사보다 순종이 났다고 일침을 가한 적도 있다.
하나님의 내적인 부재가 점점 깊어지면, 돌아가려는 마음도 깊어지지만 어느새 하나님과 나와의 간격이 너무나 멀리 벌어져서 돌아갈 엄두를 못 낸다. 그럴만한 힘이 우리에게는 없다.
사울의 근원적인 두려움은 바로 이것이었다. 하나님을 잃어버렸기에 찾아오는 두려움, 달리 말하면 자기로 가득 채워진 두려움. 반면에 다윗의 모습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현존하심. 그에 비추니 자신의 영적 처지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여러분은 어떤가? 하나님을 내적으로 충만히 채우고 있는가? 이것을 잘 알면서도, 일상의 여러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못하고, 오히려 내 뜻, 내 생각, 나의 자존심, 나의 이기심으로 가득 채우고 있지는 않은가? 순종이나 충성하지 못해, 믿음이 약해 있지는 않은가?
인간에게는 하나님과의 간격을 뛰어넘을 어떤 능력도 없다. 율법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처지는 사울이다. 그러나 복음으로 말하자면 다윗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주셨다.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 내가 구원의 자격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자격을 부여해주셨다. 오늘 하나님은 그 예수의 십자가 의지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우리 심령 속에 가득 채우기를 원하신다.
-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 두렵도다.
사람들은 신앙인에게 하나님이 없을 때, 무시하고 깔보고 얕잡아 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시는가? 하나님 계신 이를 두려워한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강하고 담대하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라.”(수1:6,7)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입성하기 전,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임재하셨고, 믿음과 용기주셨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여호수아 5장 1절은 이렇게 증거한다.
“요단 서쪽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
심지어 기브온 주민들은 먼 나라에서 온 것처럼 꾸미고 여호수아를 속여, 화친조약을 맺을 정도였다. 이스라엘이 두려워서 그랬겠는가? 그게 아니라, 그들과 함께하는 하나님이 두려웠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 시간 우리 안에 거하길 원하신다. 여러분 심령 속에 계시길 바라신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켜야 하나님께서 계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모범적인 사람이라야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지했던 것이 있다. ‘사람을 잃어버린 율법’은 이미 하나님의 법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이다. 예컨대 주님께서 안식일 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잃어버렸던 사람을 찾기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줄로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무엇으로 완성되는가? 온전한 사랑.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온전한 사랑으로 완성을 이루셨다.
이 시간 여러분 심령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뜨거워지길 축원한다. 사랑의 능력이 용기가 되고, 지혜가 되며, 소망이 되고, 복음이 되어, 여러분의 삶의 지경에 하나님의 현존하심이 나타나길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