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수 한 그릇의 감사 (마태복음10:40-42)

냉수 한 그릇의 감사 (마태복음10:40-42)

 

 

2017년 7월 2일 맥추감사주일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는 공의의 하나님, 오늘 맥추감사절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무더위와 장마 비 사이로 살며시 불어와 땀방울을 식히는 작은 바람이 고맙게 느껴지는 계절에,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를 가슴 가득히 안고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저희들의 마음을 기뻐 받아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한 해의 중점 맥추감사절

수탉이 물을 먹을 때, 그릇 속의 물을 주둥이로 물어 고개를 젖힌 뒤 삼킨다. 이런 닭의 물 먹는 모습을 보던 한 인도주의자가 “저렇게 고개를 내렸다올렸다 하려면 굉장히 힘들 거야.”하면서 혀를 찼다. 그러자 옆에서 듣던 현실주의자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다 먹고 살자면 할 수 없죠. 목을 안 들면 그나마 한 방울이라도 목구멍으로 넘어가겠습니까?”라고 했다. 이때 같이 있던 한 그리스도인이 “두 분 말씀이 맞군요. 하지만 저 수탉은 한 모금 물을 마실 때마다 하늘을 쳐다보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이 더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살았을지, 눈에 보이는 듯하다.

 

한 해의 절반이 지나고, 절반이 시작된다. 그 사이에 맥추감사주일을 맞았다. 한 해의 중점을 감사로 찍으라는 하나님의 섭리일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았던 한 해의 절반은 더 없이 행복했다. 나머지 절반도 그럴 것이다. 물론 여건과 상황이 좋아서가 아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소망 때문이다. 이 시간 다 증언하지 않아도 여러분의 삶 자체가 간증이요, 복음서의 한 페이지나 다름없다.

 

 

  1. 유래와 의미

맥추감사주일의 유래는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에 맥추절에서 비롯됐다.

 

출애굽기23:16절에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이 절기와 관련해서 몇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다.

우선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의 소산물을 먹었을 때, 만나가 그쳤다(수5:12). 만나는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께서 젖먹이에게 주신 양식과 같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맥추절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됨에 대한 감사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뿐이 아니다.

그러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보라. 모세는 느보산에서 이렇게 말한다. 40년 광야를 지나는 동안 “네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은혜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고백이다. 광야를 지나면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깨닫게 하셨다. 마냥 젖먹이 아이와 같은 상태로 광야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분명코 성장하고 성숙해 갔다. 그러니까, 그에 대한 감사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의 신앙과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해가고 있다고 확신한다. 제자리걸음인 것 같아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좋으신 하나님은 우리를 성도의 온전한 모습으로 변해가도록 ‘은총’을 선물로 주신다.

 

다음으로 떠오르는 것은 추수할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말씀하시는 첫 대목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의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19:9-10)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19장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었고 광야에서 나그네였다(출22:21).”

 

중요한 섭리가 있다. ‘감사’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취하고 채우는 데 있지 않다. 욕심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덜어내고 비울 줄 알고 남겨둘 줄 알아야 한다. 덜 있어야 하는데, 덜이 없다. 그게 ‘더럽다’라는 말을 파생시켰다. 행복이라는 깨끗한 감정이 아니라 불행이라는 더러운 감정이 들어 감사를 모르게 만든다.

 

이렇게 본다면 맥추감사절은 ‘취함’이나 ‘소득’, ‘채움’에 대한 기쁨에만 취해 있어서는 결코 진정한 감사를 드리기 어렵다. 배려와 나눔에 대한 감사를 동반해야 한다.

 

 

  1. 예수님 시대

나의 형편은 그렇지 못하며, 아직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도 없다고 말할 사람이 있는지도 모른다. 꼭 많이 소유해서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다. 작은 것을 나누지 않고 나중으로 미루는 사람은, 막상 상황이 나아지고 좋아져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저는 이런 고민의 목소리를 예수님 당시, 로마제국의 사회경제 치하에서 점점 삶이 팍팍해져 가는 사람들의 한숨 소리 속에서 듣는 듯하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토지를 잃어버리고, 소작농은 날품팔이로 전락해갔다. 땅을 빼앗긴 사람들은 마치 비정규직 노동자들 같았다. 예수님의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하루하루 생계가 막막하고, 품꾼으로 써주는 사람이 없어 빈둥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주님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 대하여 동무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세대와 같다고 비유로 말씀하셨다. 이것을 보면, 피폐해진 사람들의 심성이 어땠는지를 가늠케 한다.

주님은 이를 불쌍히 여기셨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길을 잃어버리고 소망을 잃어버린 이들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마을과 고을고을에 두루두루 복음을 전하도록 전도여행 보내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을 오라고 부르셨다.

 

‘하나님 나라’ 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생각보다 좌절의 상태는 심각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실패로 끝났다. 그는 처형을 당했고, 목이 달아났다. ‘다시는 없을 기회’라고 여기는, 너무나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실망도 컸다. 절망의 학습효과라고 부르자.

예수님이 또다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복음을 들고 나섰을 때, 예수라고 별반 다르겠는가, 사람들은 의구심을 가졌다. 절망의 학습효과 때문이었다. 마음은 차가워질 대로 차가워져 있었다. 물론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에도 감당치 못하겠다. 나보다 더 크신 이가 오신다. 바로 여기 있는 분이시다.” 증거했지만, 식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역동적으로 일으키기에는 쉽지 않았다.

 

복음서에서 사람들에게 고질병처럼 도지는 것이 있다. 보아도 보지 못하는 의심!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예수님께 묻는 장면을 생각해보라.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예수님께서 표적을 보이고 이적을 보여도, 그때뿐이었고, 의심은 여전했다.

 

오늘날 우리 시대와 삶의 자리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퀵을 배달하는데, 배달물건이 3상자, 총 10kg내외라는 말을 듣고 갔다. 그런데 가보니, 신청한 주문과 달랐다. 4상자에 60kg이 넘었다. 추가요금이 발생한다고 말하자,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차로 가는데 상관이 있느냐, 아파트에서는 엘리베이터로 올리는데, 왜 비용이 더 들어야하는지 모르겠다고 따졌다.

이렇게 염치없고 뻔뻔한 사람도 있구나 생각이 든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넉넉한 사람이 그러는 게 아니었다. 까탈을 부리는 사람들은 여유롭고 넉넉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물론 소유의 많고 적음은 별개다. 주님은 누구를 더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셨을까?

그도 역시 어렵게 장사하면서, 하도 장사도 안되고 이래저래 떼이는 게 많다보니까, 비용을 조금 아껴보자고 그러는 것이다. 그도 분명 누군가의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일 것이다. 여기에는 단순히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생계와 생존이라는 더 절박한 문제가 달렸다. 그렇기에 편안한 자리에서 시시비비를 가리고 함부로 정죄할 수 없다.

 

주님은 당시에도 이런 식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거칠고 까탈스러운 사람들로 변해가는 것을 보면서 ‘목자 없는 양과 같음’으로 인하여 탄식하셨다. 사회적 균열 속에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말해야 하는 난제를 가지셨다.

 

각박한 세상 속에서 복음을 전하고 전도하기가 참 힘들다. 예수를 믿지 못하고, 이적과 표적을 원하나, 보아도 보여도 믿지 않는다. 어쩌면 그 심령 내밀한 곳에는 붕대로 싸매고 있는 깊은 상처들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1. 반전

세례요한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우리 예수님의 반전이 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제자들이 따라야 할 순종의 메시지가 있다.

 

오늘 말씀은 제자들을 파송하는 장면 끝부분이다.

5-15 마을에 들어가서 천국이 왔다고 복음을 전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며 평안을 빌라는 내용.

16절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 시대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어떤 어려움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42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

 

바로 이게 반전이다. ‘냉수 한 그릇’ 대접 받아봤는가? 특별히 부탁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심하게 목이 타는 것을 알고, 냉수 한 그릇 떠다주며, 해갈하도록 하는 배려. 그 고마움에 감동받은 적 있는가? 아무 것도 아닌 듯한 그 작은 대접에 피로가 녹고 속상한 마음이 위로를 받는다. 힘을 얻는다.

 

인간의 깊은 내면에 대한 이해와 해법을 너무나도 쉽게 꿰뚫어보신 것 아닌가!

진심어린 고마움, 어떤 좋은 것을 대접해주고, 생색낼 만한 것을 나눠줘서가 아니라, 나그네에게, 객이게, 이웃에게 진심 어린 마음으로 냉수 한 그릇이라도 떠주는 마음, 무엇으로도 비할 수 없는 감사의 마음이다. 팍팍한 마음, 인색한 마음, 나눌만한 여유가 없는 사람도 이 고마운 마음에 변화가 꿈틀댄다.

 

어려울 때를 지나본 사람들은 안다. 어떤 사람들은 연락이나 만남을 기피한다. 그래도 괜찮다 하는 사람은 만나서 위로해주고 격려해주는 사람이다. 그런데 가르치려, 자칫 욥의 친구들로 돌변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정말 좋은 사람은 누군가? 아무 말 하지 않고 따뜻한 밥 한 끼, 된장찌개, 소박한 집밥이라도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 들어주는 사람 아니던가?

 

상투적인 맥추감사절이 아니라 냉수 한 그릇에도 감사를 느껴보자. 거창한 긍휼이나 자비가 아니라, 진심어린 긍휼과 자비의 마음. 그 힘은 가벼운 듯하나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다.

 

맥추감사주일, 주님은 율법을 완성시키시는 분이시다. 맥추절에 이웃에 대한 배려로 밭모퉁이를 다 거두지 말 것을 말씀하셨다. 현실은 그것을 지키기 어려워 맥추감사가 형식이 됐다. 그런데 주님은 ‘냉수 한 그릇’에 있은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따뜻한 감사의 마음을 통찰하셨다.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고, 피폐해져가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로 바뀌길 원하셨다.

 

최저 시급을 정했더니, 어떤 업주들은 그 이상으로 줄 수 있는 것도, 그 시급에 맞추어 준다고 한다. 오히려 정당성이 됐다고 한다. 이웃 사랑에 대한 진심이 냉수 한 그릇으로 족하다는 자기 당위성으로 삼는 사람은 없으리라 믿는다.

 

주님은 우리가 이웃에 대해서, 고난받고, 어려운 처지와 형편에 놓인 사람들에 대해서, 나그네 같고, 거류민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 진심 어린 마음을 갖기를 원하신다.

냉수 한 그릇도 얼마나 시원한 감사와 고마움이 될 수 있는 지 깨닫기를 바라신다. 주님은 확증하신다.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니라. 여러분이 그 냉 수 한 그릇 떠주며, 시원케 하는 사람이 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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