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25일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며, 세상 모든 나라를 공의로 다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 거룩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아리고 쓰린 역사의 상처가 쇠잔한 울음 되어 울리는 이날에, 주님이 그려주실 통일걸개를 소망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닫혔던 마음이 열려서 미움은 사랑으로 증오는 화해로 바꾸어지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믿음의 원리
오늘 말씀에서 믿음의 원리와 성취의 원리에 대해서 은혜를 나눠보려고 한다.
주중에 ‘회장’이라는 직함을 가진 어느 분이, 기독교를 믿어 보려고 3개월이나 교회를 나갔는데,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절박하면 종교를 찾기 마련이고 어느 종교나 본질은 같다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저보고 자신을 믿게 해보라고 했다. 뭐라고 대답했을까?
이렇게 대답했다.
“보여서 믿는 게 아니라, 믿으니까 보이는 것이다.”
10절 말씀도 이것을 뒷받침해준다.
우상은 사람이 깎아 만든 조각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눈으로 확인하려는 욕망이 만들어낸 것들이 모두 욕망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증거를 보여 봐.”
이 말의 프레임에 빠져 쟁론 벌여서는 안 된다. 성경은 그것을 ‘무식한 변론’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말씀한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 그러니까 무의미한 쟁론에 빠지지 말고 – 자기 스스로에게도 말이다. – 창조주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인간의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지고지순하신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믿음의 눈을 열라.
10절 말씀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라고 말씀했다.
믿으니까, 의에 이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뭔지 알게 되고, 섭리를 알게 되며, 계획하심도 알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옳다 인정하심을 받는다.
- 믿음의 정체성
절박함은 처음 예수를 믿게 된 동기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해결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이 시간에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변증, 교리를 다 설명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두 가지만 생각해보자. 우리의 신앙적인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고히 하기 위해서 말이다.
첫 번째는 십자가와 부활이다. 이 함의를 꼭 기억하라. 기독교는 죽어야 사는 종교이다.
베드로전서 2:24절은 이렇게 증거 한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신앙의 눈을 열고 믿음을 갖도록 방해하는 것, 걸림이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죄의 문제이다. 여기서 말하는 죄의 문제는 윤리, 도덕, 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우리의 죄성을 말한다. 고집, 욕심, 시기, 악의, 비방, 자기의 의…. 로마서2장은 이런 것들을 일컬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주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고 자기의 의로 살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예배의 자리에 우리를 부르셔서, 십자가와 부활의 체험이 있기를 원하신다.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역사 말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 때문에 용서할 수 있다.
우리가 스스로 절망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 때문에 힘과 용기를 낼 수 있다.
나의 이익을 위해 욕심을 부릴 수 있지만 타인에 대한 애처로운 마음 때문에 손해를 보고 양보할 수 있다.
자기가 잘 못한 것은 없지만, 타인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어려워하는 연약함 때문에 화목의 십자가를 지는 능력을 부여받은 사람도 있다.
미움, 절망, 욕심, 이기심… 이런 것들은 죄이지만,
사랑과 용서, 용기, 양보와 배려, 화목… 이런 것들은 의이다.
십자가의 도가 믿지 않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구원함을 얻은 우리에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오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믿음을 결단한다면
우리는 여기서 참생명, 영원한 생명, 어느 것으로 불러도 좋은 새생명을 선물로 받는다. 새생명이라고 말하니까, 질병에서 고침받고, 병약함에서 헤어 나오는, 육체적인 의미의 생명이 아니다. 예수를 따라 자기 안에 기쁨이 충만하고 은혜가 가득하며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소망이 넘치는 삶을 말한다.
두 번째는, 거저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어느 종교가 이렇게 믿을까?
종교란 한자 풀이대로, 으뜸이 되는 가르침이다. 인생의 과정에서 길을 모르고 방향을 모르고 살아갈 때, 종교는 으뜸이 되는 가르침이 된다. 그리고 그 인생을 빛나고 푸르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든다. 그 차원에서 종교를 대하고 믿으려면 아무 종교나 믿어도 좋다. 열심히 진지하게 믿으면 말이다.
인간의 노력과 열심으로 종교에 매진함으로써 어느 경지에 이를 수는 있지만, 값없이 아무런 공로와 노력 없이, 아무런 자격도 없는데, 거저 주시는 은총은 돈으로도 어떤 값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사마리아에 있는 마술사 시몬이 성령을 돈으로 사려고 했다. 그럴 수 있는 줄 알았다. 대가를 지불하여 은총을 구하는 타종교의 성격을 단번에 드러내 주는 대목이다.
죽음과 유한함이라는 실존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래서 타종교는 구원을 위해 인간의 공로를 쌓아야 하고, 신에게 정성을 바쳐야 한다. 어떤 대가를 후불로라도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공로 없이 거저주시는 은혜다. 물론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의 생명으로 아주 값비싼 값을 치르셨다. 우리는 이 은혜를 경험하고 체험하며 감사와 기쁨을 누린다. 구하는 자에게 주시고, 찾는 자에게 찾게 하시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주신다.
사람이 다급해지면 종교를 찾게 된다는 말처럼 정말 어떤 절박한 상황에 놓여서 기독교를 선택하게 되는 경우든, 기독교라고 하는 종교를 우연히 선택하고 믿게 되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선택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자기가 할 수 없는 게 있는 것이다. 생명에 대한 은혜와 신비 체험. 이점을 다른 종교는 결코 설명할 수 없다.
약할 때 강함 되시는 주님의 은혜가 있다. 가장 약한 자를 가장 강한 자로 들어 쓰신다. 미련한자로 하여금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만드신다. 쓸 모 없다고 여기는 건축자의 버린 돌을 모퉁이의 귀한 머릿돌로 삼으신다.
애굽에 팔려 갔던 요셉을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삼으셨다. 애굽의 왕자 모세를 들어쓰신 것이 아니라 호렙산 양치기 모세를 들어 쓰셨다. 아무런 자격과 공로가 없지만 하나님께서 귀하게 들어 쓰시는 섭리를 타종교는 설명할 수 없다.
나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 나를 복되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 나와 우리를 붙드시고 만져주시는 인도하심. 주님의 현존을 보이도록 드러내시는 믿음의 원리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이 모든 것들이, 보여서 믿는 게 아니라 믿어서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취의 원리는 무엇일까?
- 성취의 원리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느니라.” 성취의 원리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다. 믿음의 사람은 말부터 바뀐다. 부정적인 언어가 긍정의 언어로 바뀐다. 불신앙의 언어가 확신의 언어로 바뀐다. 불순종의 언어가 순종의 언어로 바뀌고, 율법적인 언어가 복음적인 언어로 바뀐다.
바울이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단순히 입에서 달콤한 말, 긍정적인 말 그러나 허언일 수도 있는 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마술을 일으키거나 마법을 일으키는 말의 힘이 아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또 하나 작동하는 신앙의 원리가 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며 내가 행하리라.”(요14:13-14)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고 고백할 때, 우리는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체험을 한다. 또한 우리가 예수 안에 거하는 체험을 하는 것이다.
누가복음이 증거하고 있는 내용을 보자. 어떤 백부장의 종이 중병에 들었다. 그는 예수의 소문을 들었다. 그는 이렇게 시인한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그 즉시 백부장의 좋이 나았다.
이 시간 결단하라.
주님 뜻 안에서, 나를 향하실 주님의 계획을 소망하며, 입술로 시인하고 고백하라.
주님께서 자기의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이라고 시인하라. 분명코 구원에 이를 것이다.
남편이 복받을 거라고 시인하라. 자녀가 복받을 것이라고 시인하라. 구원에 이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