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18일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가 주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초여름부터 폭염이 쏟아지는 계절에, 주님이 시원케 해주실 위로와 희망을 기대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낙심했던 마음이 새로운 용기로 넘실대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 달란트를 부탁해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다. 아마도 수도 없이 들어왔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에게 소유를 맡겼는데, 각각 그 재능대로 금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를 맡겼다.

19절 “오랜 후”, 주인이 돌아와 결산을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오늘 말씀의 내용이다.

 

다섯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겨 주인에게 가져왔다. 주인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했다.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두 달란트를 더 남겨 주인에게 가져왔다. 이도 역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은 땅에 감추어 두었다가, 고스란히 가져왔다고 주인에게 내놓는다. 주인의 재산에 전혀 손실이 없었다. 그런데도 책망을 듣는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26)

 

앞의 두 사람은, 칭찬을 받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21, 23)

 

그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하지만 나중의 사람은,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30)

 

주인의 즐거움에서 외면당한다.

 

이 예수님의 비유가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주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 받는 성도가 돼야 한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책망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1. 논쟁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이 비유의 중심은,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다. 거기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그리고 논쟁을 일으킨다.

주님의 비유에는 단순히 교훈을 주는 내용이 있는가 하면 논쟁을 유발하는 비유가 있다. 예컨대 ‘공중의 새와 들에 핀 백합화’에 대한 비유는 듣는 이로 하여금 위로와 용기를 준다. 반면에 누가복음 16장과 같은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와 같은 내용은 논쟁을 일으킨다. 옳지 않은 청지기는 ‘문서위조’의 방법으로 주인을 속였는데, 칭찬을 받는다. 그러면서 주인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메시지를 남긴다. 여기서 이 이야기를 다 할 수 없는데, 논쟁을 일으키는 대목이다.

크로산이라는 유명한 신학자는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확신하며 믿는 신념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을 흔들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고 말이다.

 

첫째는 돈이 돈을 벌게 하는 법인데, 왜 각각 차등지급을 했을까? 손익을 남기는 데에도 투자의 임계점이라는 게 있다. 당연히 5달란트를 받았던 사람이 더 유리하고 1달란트를 받았던 사람이 더 불리하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이런 불합리하다고 여기는 것과 접하며 살 때가 있다. 그런데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달란트라는 액수 자체가 워낙 큰 액수이다. 1달란트가 적어도 20년치 일반적 연봉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v.15 “각각 그 재능대로” 이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주어진 몫에 대해 충실하면 된다. 우리 삶 속에서 그것이 삶이든, 사명이든, 어떤 처지와 형편이든, 주님께서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 그 몫을 다하는 것은 진정한 성도의 삶의 자세다.

 

그런데, 두 번째 더 큰 논쟁거리가 있다. 주인은 왜 주인의 것을 도로 가져온 한 달란트 받았던 자를 책망했을까? 전혀 손실이 없었다. 나름대로 잘 지켰다. 이익을 남기지 못했다는 것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받을 만한 일인가? 만약 손해를 가지고 주인에게 나왔다면 어땠을 것인가? 요즘 같은 세상에서 보면 손실 없이 가져왔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다행인가?

주인은 어떤 최소한의 성과물이라도 가져오기를 바라는 캐릭터로 내비친다. 이 ‘주인’을 ‘주님’이라고 바꿔서 생각해본다면, 주님께 나아올 때, 어떤 최소한의 공로나 삶의 성과물을 가지고 나아와야 하는가? 주님은 그것을 바라실까? 그렇지 않으면 책망하실까?

 

이 때문에, 이 비유의 교훈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불편해한다.

 

27절을 보면, 그 주인의 모습은 의문을 더한다.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게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오늘 현대인의 인식에는 당연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에 대한 찬반논쟁을 생각해보자. 당시에 경건한 가문에 속하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거룩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세속적인 사람들이나 하는 천한 짓이었다. 율법을 보자.

 

출애굽기22:25 “너희가 너희 가운데서 가난하게 사는 나의 백성에게 돈을 꾸어 주었으면, 너희는 그에게 빚쟁이처럼 재촉해서도 안되고, 이자를 받아도 안된다.”

 

신명기23:19 “너희는 친족에게 꾸저 주었거든 이자는 받지 말아라. 돈이든지, 곡식이든지, 이자가 나올 수 있는 어떤 것이라도 이자를 받아서는 안된다.”

 

레위기25:36-37 “그에게서는 선이자를 받아도 안되고, 어떤 이익을 남기려고 해서도 안된다. 네가 하나님 두려운 줄 안다면, 너는 선이자를 받을 목적으로 돈을 꾸어주거나, 이익을 볼 셈으로 먹을 거리를 꾸어 주어서는 안된다.”

 

바벨론 포로기라는 위기와 변화를 거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에스겔18:13 “변리를 위하여 꾸어 주거나 이자를 받거나 할진대 그가 살겠느냐 결코 살지 못하리니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은즉 반드시 죽을지라.”

 

이렇게 볼 때, 27절 말씀과 관련하여 이런 찬반논쟁이 있었고, 그것을 유발시켰다.

 

당시에 로마제국치하에서 실물경제체제에서 화폐경제체제로 전환되고 금융산업이 대두되던 현실이었다. 현실과 타협하며 살 것인가? 신앙을 지키며 살 것인가? 토라(율법)에 근거해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로마의 관습에 따라 살고 있는가? 우리는 유대인들의 세상에서 사는가, 아니면 이방인들의 세상에서 사는가? 하나님 아래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로마의 지배 아래 살고 있는가? 우리를 책임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인가 아니면 로마인가? 로마인처럼 사는가, 유대인처럼 사는가? 오늘 우리에게도 자문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세상적인 것을 교회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가, 오히려 복음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 비추는가? 세상에서는 세상살이 방식으로, 교회에서는 은혜로운 모습으로 이중적인 삶을 살지는 않는가? 등등

 

 

  1. 주인에 대한 무지와 오해

비유의 내용으로 돌아와 보자. 이제부터 은혜를 나누려고 하는 핵심이다. 주인은 왜 한 달란트 받았던 종에게 이렇게 라도 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는 것일까? 주님은 이렇게라도 살기를 원하시는 것일까?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 그는 주인을 전적으로 오해하고 있었고 무지했다. 그렇기에, 결코 그 뜻을 받들 수도, 따를 수도 칭찬받을 수도, 종이 되어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수도 없다.

 

24-25절에 이 종은 주인에 대해 뭐라고 하는가?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바로 이게 오해다.

 

26절이하에서,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면 왜 27절과 내용과 같이 라도 하지 않았느냐는 주인의 반문이다. 즉 주인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인가? 아니라는 것인가?

 

만약 정말 이렇게 생각했다면 그는 주인에 대해 오해한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 주님을 오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 어떤 성과나 공로나 자랑할 만한 삶의 결과물을 가지고 나오기를 원하시는, 때로는 무섭고 엄한 분이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 같고, 내세울 만한 것이 있으면 주님께 나아오겠다고 한다. 때로는 바리새인과 같은 모습으로 나아와 하나님께 자기의 공로를 내세우고 의를 자랑하려고 한다. 우리 주님에 대해 이런 오해를 하는 신앙인들이 많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시는 분이다.

이사야는 55장에서는 긍휼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가를 지불할 아무런 능력이 없어도 주님은 우리의 영적인 목마름과 주림을 채우기를 바라신다.

 

누가복음에서도 같은 맥락의 비유가 나온다. 은화 10므나(1년치 연봉)를 10명에게 나눠줬다. 여기서 언급하는 경우는 세 가지이다.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긴 사람, 다섯 므나를 남긴 사람, 그리고 한 므나를 그대로 가지고 온 사람. 나머지 7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저는 그 7명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그 중에는 아무런 성과 없이 나온 사람은 없었을까? 어쩌면 손실을 가지고 나온 사람은 없었을까?

세상일에 실패했어도 주님은 두려워하거나 자책하지 않고 주님께 나아오길 원하신다. 그런데 오직 주인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고 잘 못 알고 있고 변명과 핑계를 대는 사람만 주인의 권세와 능력에 들지 못하고 있다.

아시는가? 주님도 실패하셨다. 십자가가 그것을 말해준다. 세상적으로 보면 말이다. 그러나 그 실패를 부끄럽게 하지 않으시려고, 하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 예수님을 살리셨다. 로마서 6장은 이렇게 말씀한다.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이 시간 주님을 바로 알고 믿으라.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의 실패, 상처, 부끄러움, 손해,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새 생명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 살기를 바라신다.

 

 

  1. 무지를 넘어선 교만

내용을 유추하고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더 큰 문제가 있다. 주인에 대해 정말 오해했더라면 주인이 27절과 같이 하지 않았느냐고 하는 말처럼, 뭔가는 했을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무엇인가? 그는 실상은 주인을 무시하고 귀찮게 여기거나 우습게 여겼다. 그리고 그 부탁을 건성으로 대했다.

바꿔 생각해보자. 우리가 주님이 공로를 바라시는 분이라고 잘못 알았다고 치자. 그러면 그 강박적인 두려움 때문에라도 정말 더 열심히 뭐라도 해볼 텐데, 실상은 어떤가? 사실 우리 안에 주님에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을 잃어버리고 값없이 주신다는 은혜에만 취해있지는 않은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 우리의 모습인지도 모르겠구나, 회개의 거리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라는 것은 알지만, 알게 모르게, 부지중에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습게 여기며, 맡겨주신 것을 귀찮게 여기고, 하나님 위에 있으려 하지는 않는가? 그랬던 마음이 있다면, 주님은 이아침, 우리가 그것을 뉘우치고 새로워지기를 바라신다.

우리에게 한 주간의 삶을 맡겨 주실 때, 어떤가? 소중하게 대하고 있는가? 감사히 여기고 있는가? 그것이 좋아 보이는 것이든, 그렇지 않아 보이는 것이든 간에 말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달란트는 무엇인가? 그동안 달란트란 재능, 자질과 잠재능력 같은 것만으로 여겨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영적인 깨달음을 주셨다. 그것은 뿌리고 가꾸기만 하면, 저절로 싹이 돋고 열매 맺는 것이다.

아주 개인적인 일이다. 몇 주 전에 초등학교에 다니는 한 아이를 소개받았다. 아버지와 떨어져 산다. 그 아이에게는 불안과 분노가 있고 이따금씩 분출되고 있다. 그 영향인지, 산만하고 10분 이상을 어떤 일에 열중해서 하지 못한다. 시간을 자꾸만 묻고, 피곤해한다. 사랑과 지속적인 관심을 필요로 하는 아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시는 달란트인 셈이다. 그 안에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하나님이 하실 시종을 사람이 어찌 다 헤아리고 측량할 수 있을까? 성의 있게 대하고, 사랑으로 대하고, 관심 있게 대할 생각이다. 관심으로 돌보고 가꾸고 소중히 여기기만 하면 저절로 열매맺고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달란트의 영적인 의미를 깨닫지 못하니, 그것이 신앙의 짐이고 부담이고, 복음의 기쁨을 발견하지 못하고 비복음의 무게에 눌려있다.

그러고 보니, 여기 모이신 모든 분들이 저에게는 제게 맡겨주신 달란트다. 그러기에 더 소중하고 귀하게 생각한다. 여러분의 영혼과 범사가 잘되고, 신앙적으로 성장하고 승리하면, 하나님께 제가 칭찬 받을 것 같다. 아니 확신한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를 알고 은혜와 구원에 참여하면, 한 므나로 열므나를 남긴 착하고 충성된 종과 같은 것이다.

 

아내도, 남편도, 자녀도, 자기와 관계하는 모든 것들이 달란트다. 예컨대 남편이 속썩인다고 무시하고 방치하면 주님이 뭐라고 하실까? 맘에 들면 잘해주고, 맘에 들지 않으면 나몰라라 한다면 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영상)

 

지혜를 내라. 용기를 내라. 그리고 주신 삶의 몫을 잘 감당하여 칭찬받는 주의 자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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