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11일 성령강림절 후 1주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 환경선교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산과 들의 초목이 온 대지를 푸르게 물들인 계절에, 자연과 하나 되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바라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가슴마다 자연을 통해 다가오는 주님의 음성이 전율되어 퍼지게 하여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당나귀의 운명은?

당나귀가 빈 우물에 빠졌다. 농부는 슬프게 울부짖는 당나귀를 구할 도리가 없었다. 그 우물은 쓸모없는 우물이라 파묻으려고 했던 터였는데, 당나귀가 빠지고 말았다. 농부는 동네 사람들을 불러 우물에 흙을 부어 묻기 시작했다. 자, 이 당나귀의 운명이 어떻게 됐겠는가?

 

오늘 말씀에서는, 우리 인생에서 고난을 이겨내고, 더 강해져서, 그리고 그 속에서도 분별된 사명이 있음을 놓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며 승리하라는 말씀을 전하려고 한다.

 

 

  1. 오늘 말씀의 내용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된다. 무슨 잘못을 저질렀거나 범죄해서가 아니다. 유대인들의 종교 감정에 반했기 때문이다.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않았다면 석방될 수도 있었는데, 예루살렘에서 재판이 이루어지면 유대인들 때문에 억울하게 재판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에, 공정한 재판을 받고자 일찌감치 로마에 상소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도 그 시기와 무지함으로 인해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 압송되는 과정에서 유라굴로라는 풍랑을 만났다. 오늘 말씀의 내용은 바로 이에 대한 것이다. 로마로 출항하기 전부터 날씨가 좋지 못했다. 그래서 바울은 이 항해가 원만치 않다고 경고했다. 선장이나 선원도 아닌 바울이 어떻게 알고 이런 충고를 할 수 있을까?

바울은 여행의 달인이다. 전도여행을 세 차례나 다녔다. [내일 일]은 모르지만, [내일 일]을 예비하시는 주님께, 기도로 [내일 일]을 의탁했고, 그럴 수밖에 없었고, 그 거칠고 척박한 여행들을 완수할 수 있었다. 로마로 압송되는 피고인 신분이지만, 그 배에 함께 하는 선주와 선원들, 호송하는 사람들을 비롯해서 일반 승객이나 상인들까지 무사한 여행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는 바울의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나 11절을 보면, 바울의 호송을 책임지는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다. 세상적으로 보면 당연하다.

마침, 13절 “남풍이 순하게 불매”, 날씨가 좋아지는 듯했다. 바울의 우려가 기우였을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출항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려한대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불었다. 배는 뒤집어질 듯했고, 사공들은 비바람과 싸우며 사투를 벌였다. 폭풍우는 그칠 줄 모르고 더 거칠어졌다. 이럴 때면 꼭 바다에 귀신이나 악마가 사는 듯하다. 자신들을 삼킬 듯 했다. 배에 선적됐던 짐을 바다에 버리고, 여러 날 동안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20절은 “해도 별도 보이지 않고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배멀미를 생각해보라.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었고, 차라리 물에 빠져 드는 편이 더 편안하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 인생에서도 동일한 일을 만난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런 인생을 만나고 있는 사람도 있다. 인생의 풍파가 불고 위기가 닥친다. 소망이 끊어지고 절망뿐이다. 배 멀미처럼 인생의 멀미가 일어난다. 참기 힘든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차라리 죽음에 빠져 드는 편이 더 편안하다고 느낄 만큼 고통당한다. 포기하고 좌절한다.

 

몇날며칠을 바울도 고생했다. 그런데 바울의 모습과 그 시점을 보라. 바울은 배 안의 사람들을 위로하며 용기를 북돋는다. 22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라.”

광풍이 잦아들어서가 아니다. 여전히 폭풍이 심하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지만, 바울은 힘을 다하여 사람들을 안심시킨다. 바울은 이 고통과 무관해서,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역시 멀미가 심하고 고통스럽고 두렵고 무섭기는 마찬가지다. 그 시점은 구원의 여망이 사라졌을 때이다. 고통이 끝나고 사라졌을 때가 아니라 최고로 극심해졌을 때이다.

바울은 무슨 근거와 배짱으로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일까? 23절에,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그 곁에 서서 말씀하셨다.”고 한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계속 기도하는 심정을 가지고 있었으리란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의 실존과 우리의 실존이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지면서도 확신에 서지 못하고 불안해한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리라, 더 좋은 것 주시리라, 생명을 주시리라 바라면서도, 잦아들지 않는 광풍을 보면서 낙담하고 고통스러워한다. 바울은 어떤 신앙을 가지고 이겨낼 수 있었을까?

 

 

  1. 믿음으로 견디는 바울

생명과 안위가 위협받는 폭풍과 풍랑 속에 바울의 믿음이란 무엇인가?

첫째, 현실이 바라는 소망과 달라보여도, 주님께서 찾아와 힘과 용기를 주시고 담대함을 주시는 주님의 은혜와 함께 했다. 결과가 어떻게 될까에 대한 문제는 나중문제다. 먹은 것을 다 토하고, 더 이상 토할 것이 없을 지경이어도, 주와 함께라면 그 자체만으로도, 주님은 힘과 능력이 되어주신다. 요동치는 배 안에서 아무 것도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없다. 하나님뿐이다.

두 번째는,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더 확고한 믿음을 위해 도전과제로 삼아야할 문제이다. 우리는 삶의 문제를 사느냐, 죽느냐에 맡길 때가 많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에 두었다.

24절,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이 말씀이 단순히 가이사 앞에서 재판받아야 하는 문제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붙잡혀 감옥에 갇혔을 때였다. 그 고독의 시간에 주님이 찾아오셔서 말씀하신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그러니까 가이사 앞에 선다는 말은 단순히 재판받는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복음이 로마에서도 증거 돼야하는 사명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려했을 때, 사람들이 말렸다. 각 성에서, 예언하는 사람들의 입술을 통해서 바울에 대해 말하기를, 그곳에 결박과 환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증언했다(행20:23).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ㅇ르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왜 자기의 생명이 중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 말 뜻은, 그의 생명을 자신의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에 두지 않고, 하나님의 사명에 맡겼다는 결의를 말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만하면 됐다 하고, 불러 가시면 하는 수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그 사명을 위해 길이 되어주시고 피할 길을 내시고,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은혜까지 허락하신다.

 

실제로 그가 로마로 압송되는 과정을 보면, 피고인이 압송되는 모습이 아니라 벨릭스 총독, 아그립바 왕, 버니게, 베스도 등 유력인사들에게 전도하고 복음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 사명 주시기에 생명까지도 주신다.

 

세 번째, 그에게 전혀 의심이 들지는 않았을까? 그도 사람인데 왜 그런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결단도 믿음이다. 결단이 서야 한다. 아니, 결단해야 확신 있는 믿음 가운데 서게 된다. 결단하지 못하면 믿음은 흔들리기 마련이지만 결단해야 흔들리지 않는 믿음 가운데 굳게 서게 된다. 그리고 승리하는 것이다. 25절 말씀이 그런 바울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간밤에 찾아오셔서,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위로하시고 안심시켜주셨던 주님에 대한 믿음도, 현실에 직면하고 사람들을 대하면서 흔들리고 흐려질 수 있다.

그러나 25절에서 우리는 바울의 믿음의 결단을 볼 수 있다. 그는 주님이 함께 계심을 믿음으로 결단하고 담대해졌다.

 

저는 이 지점에서 보람과 긍지와 자부심을 가진 성도의 모습을 만난다. 무엇인가?

바로 ‘복음적인 사람’의 역할과 사명이다.

 

배멀미와 경제적 손실, 아니 큰 타격을 입고 실의에 빠졌으며,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진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힘을 북돋아주는 바울의 모습 속에서, 우리가 이런 역할을 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것을 깨닫는다. 그도 같은 환난과 고통 속에 있지만 복음적인 사람으로 배 안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다.

 

 

  1. 당나귀의 운명

농부가 동네 사람들을 불러와 우물을 묻기 위해 흙을 부었는데, 당나귀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당나귀 머리 위로 흙이 떨어졌다. 주인이 자기를 포기하고 이대로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울부짖었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웬일인지 당나귀가 잠잠해졌다. 당나귀는 위에서 떨어지는 흙더미를 털고 털어서 바닥에 떨어뜨렸는데, 발밑으로 흙이 쌓이면서 점차 흙더미를 타고 올라올 수 있었다. 그리고 무사히 그 우물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오늘도 또 반복한다. 안되는 것 같아 보이고 안되는 것 같아보여도, 나에게 곤경과 위기가 끊임없이 찾아오고 덮는 것 같지만, 나를 구원하시고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있는 것 아닌가? 때로는 환경이 흙더미로 나를 덮어 오지만 오히려 믿음으로 지혜와 인내와 용기를 가지면 자신이 더 성장하고 높아질 수 있는 디딤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성도는 주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폭풍과 풍랑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풍랑을 함께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야 한다.

선장은 자신의 경험과 안목을 의존하고 항해를 강행했다. 세상이 그와 같다. 그러나 인간의 고집과 아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다. 믿음과 그 결단이 있는 성도의 확신 가운데 하나님은 구원의 섭리를 나타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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