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4일 성령강림절

 

교회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사랑의 하나님, 성령강림절 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나른한 더위가 조금씩 대지를 덮어오는 초여름에, 지친 마음과 몸을 주님께 기대고 새 힘을 얻고자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생명력으로 넘쳐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여 주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시85:13)

 

 

은사를 사모하라

오늘 말씀을 보면, 인간에 대한 이해와 태도 중에, 오늘 말씀만한 것이 있나 싶다. 그 이해는 너무나 긍정적이고 따뜻하고 복음적이다.

 

말씀의 내용은 간단히 하면 이렇다.

성령은 여러 가지 은사를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다. 은사가 다르다고 성령이 다른 것이 아니며 직분과 사역이 다르다고 주님과 하나님이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은 모두 한 분이시지만 각 사람에 맞는 은사와 역할과 사역을 주신다.

 

그리고 오늘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해, 12절 이하의 비유가 사용되고 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가 있고, 많은 지체가 있지만 몸이 하나인 것처럼,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인 교회는 각 성도들이 지체처럼 연결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단순히 역할론에 대한 설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각자 자기 역할이 있으니, 그 역할에 충실하라.’ 이런 역할론에 방점을 두고 읽는다면, 메시지의 진수를 하나 놓치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인간에 대한 긍정적 이해와 따뜻한 배려, 그리고 복음적인 메시지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거기서 우리가 얼마나 십자가 앞에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의 사랑을 덧입어야 하는 지 이유를 알 수 있다.

2. 긍정적 이해, 따뜻한 사랑, 복음적 실천

먼저 긍정, 따뜻, 복음적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이유는 이렇다.

 

첫 번째 어느 누구도 은사 없는 사람, 받지 못한 사람이 없다.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카리스마타)이라는 뜻이다. 개인의 노력이나 ‘열심’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나 주신 선물이다.

말하자면, 누구나 이 선물을 받았는데, 하나님을 만나 선물의 포장을 푸는 것이다. 형식적으로 교회에 다니고, 구원에 대한 믿음의 확신 없이 출석하고, 봉사와 섬김과 충성 없이 오가는 사람은 오래 교회를 다녀도…, 한 번도 이 선물의 포장을 풀어 본 적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런 기회가 없거나 적으니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하기가 어렵다.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누구에게나 그 성격과 모습에 따라 은사를 주셨다고 믿는다면, 타자를 대하는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 부정적으로 대하거나 멸시하거나 무시할 수 없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귀히 여겨야 한다.

긍정적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있다고 치자. 부정적인 사람은 ‘아는 체 한다’고 싫어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긍정적인 사람은 ‘그는 지식의 은사가 있어’라고 좋게 받아들일 수 있다.

은사에 대한 믿음은 인간이해를 기본적으로 긍정적이게 해준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주신 은사를 우리가 함부로 속되다, 나쁘다, 별거 아니다, 라고 부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두 번째, 은사는 하나님의 따뜻한 마음이다. 은사는 누군가에게는 배제되고 누군가에게는 허락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소중히 귀하게 아끼셔서 각자각자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선물이라는 것 자체가 참 따뜻하고 고마운 것이다.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목사님, 저는 은사를 받지 못한 것 같아요.”

“저는 제 은사가 뭔지 모르겠어요.”

“이런 것도 은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고린도 교회 교인들 가운데서도 이런 목소리가 많았던 것 같다. 인식하지 못할 뿐이지, 없는 것, 받지 못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언급하기에 앞서 1절에서 뭐라고 말하는가?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무슨 말인가? 성령께서 하나님의 선물을 자기에게 주셨다는 것을 깨닫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다.

 

은사의 종류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8절부터 보면, 지혜의 은사, 지식의 은사, 믿음의 은사, 신유, 능력, 예언, 영 분별, 방언, 통역의 은사가 나온다. 은사는 여기에 국한 된 것인가? 이것은 예를 들기 위한 것일 뿐, 그 종류는 정말 다양하다. 4-7을 보면,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는 지체로써 쓰임 받는 모든 종류가 다 은사나 마찬가지다.

우리 교회를 보면 이런 것들도 추가 할 수 있다. 빵터짐 은사, 순종의 은사, 관용의 은사 등등.

 

‘남들이(타자가) 나를 어떻게 보는가!’에만 의식하는 사람은 바리새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을 따뜻하게 대하시고 은사를 주심을 알고 감사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다.

 

세 번째 왜 복음적이라고 말하는가? 은사를 통해서 가져오는 결과 때문이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시고 은사를 주시는 목적이 무엇인가? 7절 말씀을 보자.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유익은 이익에 대한 저울질 수준이 아니다. 유익은, 물론 학자들의 견해대로 공동의 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유익은 뭔가 하면,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좋으신 섭리가 드러나는 것이다.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현존하심이 드러나고, 결국에는 복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유익이다.

 

갑자기 마가가 떠올랐다. 잘 아는 대로, 마가는 1차전도 여행 때, 함께 나섰다가 중도에 하차했다. 2차 전도여행 때 다시 동행하길 원했다. 그러나 바울이 심하게 반대했다. 결국에는 마가도 데려가려던 바나바와 심하게 다툰 뒤에 서로 갈라섰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마가는 바울의 기준에 들지 못했다. 마가의 단점만 보였다. 물론 마가에게도 장점이 있었겠지만, 선입견 같은 것을 갖고 있으니 그것을 찾아볼 마음도 없고, 보이지도 못했다. 단점만 크게 보였다.

그런데 나중에 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다들 바울을 떠나서 누가만 남았다는 근황을 전한 뒤에, 바울에게 올 때, 마가를 데려오라고 한다.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4:11)

 

상황이 궁해져서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일까?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는 그랬는데, 주의 일을 경험하고 교회에 역사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볼 때, 바울이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할 때 곰곰이 생각해볼 문제다.

 

교회일이나 주의 일은 꼭 사람의 능력이나 실력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재능이나 능력 면에서 보면 A라는 사람이 월등한데, 오히려 그 보다 못한 B라는 사람이 더 은혜롭게 잘 할 때가 더 많다.

 

말을 참 잘하는 사람이 확실할 것만 같은 것을 자신 있게 말하는데, 그대로 하면 되는가, 아닐 때가 더 많다. 참 막연하고 애매하지만 기도해보자고 불분명하게 말하는 사람이 하는 대로 더 잘 될 때가 많다. 사람들은 분명한 것을 좋아하니까, 불분명한 것을 외면할 때가 많은데, 오히려 분명한 것대로는 안되고 불분명한 것대로 일이 될 때가 더 많다.

 

왜 그런가? 교회의 일이나 주의 일은 사람의 능력으로 감당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로 감당하는 것이다.

 

바울은 약할 때, 강함 되는 시는 주님을 알았다. 믿음이 없을 땐, 결코 깨닫지도 경험하지도 못했던 바다. 가능한 한 약함이나 부족함이 없어야 주님께 영광 돌리고 주의 일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약함을 없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자신의 가시를 뽑아 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주님의 생각은 달랐다. 약할 때 오히려 강함 되시는 섭리를 깨닫게 하셨다.

오히려 연약하고 부족하고 허점투성이인 인간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 은혜 안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신비를 경험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의 일을 할 때는, 그 일에 합당한 은사를 달라고,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며, 주의 능력 의지하여 겸손히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게 되니, 마가가 달리 보인다. (마가의 은사. 글 구성능력, 문장력, 기억력.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을 선물로 주시고, 하나님의 감동으로 마가복음을 쓰게 하셨다.) 그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 이전에 그것을 몰랐을 때는 마가를 인정하지 않았는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알고 나니, 어떤가? 그를 존중하고 아끼지 않을 수 없다. 은사를 통해 유익하고자 함은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낸다.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하다. 나에게 어떤 능력이 없다고, 그래서 감당할 수 없다고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말라. 겸손히 기도하며 구하라. 주님은 은사를 주신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단순히 역할론에 대한 설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들어가고 또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우리가 얼마나 십자가 앞에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의 사랑을 덧입어야 하는 지 이유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자 더 한걸음 들어가면 무엇이 있는가?

고린도 교회의 분열과 갈등, 서로 간에 반목과 질시, 바로 그 상황에 전하는, 오늘의 메시지가 들어있다. 이것들은 사실 자기 스스로 부정적이고, 차갑고, 비복음적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자신의 짐을 내려놓아야, 앞에서 말한 긍정적이고, 따뜻하고, 복음 적인 것을 회복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어야 한다. 기억하라.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의 포장을 푸는 것이다.

남을 반목하거 질시하지 말고, 그 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보아야 한다. 남을 시기, 질투하면서 정작 자기를 긍정하지 못하고 부정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은 나에게 값진 은사를 주셨건만, 타인의 은사만 쫓으려 하다보면 시기 질투한다. 자기를 부정하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고, 자기를 긍정하라.

 

(* 저는 목소리가 작은 것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목소리 좋다고 한다.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결단하라. 복음적인 사람이 되도록 말이다. 어떤 일을 하든지 주님께 은혜를 구하고, 그 은사를 사모하며 그 은혜를 따라 감당하라. 그 유익을 끼치면서 보람과 긍지와 자부심을 갖는 성도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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