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7일 부활절 4주, 창립7주년기념주일, 어린이주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을 부르시는 사랑의 하나님, 뜻깊은 교회창립주일과 어린이 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마음 깊숙이 다가오는 꽃 소식을 안고, 분주히 벌 나비가 여행하는 5월의 첫 번째 주일에, 어린 아이들의 순진함으로 덧입기를 바라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머리 숙인 저희에게 잃었던 순수함을 되찾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여 주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 창립 7주년이자, 어린이 주일, 부활절 4주. 이 시간 예배의 자리에 나온 여러분 모두에게 좋으신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으시길 축원한다. 지난 7년간 교회가 이렇게 성장해온 것을 돌이켜보면서, 살아계신 하나님께 참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린다. 참 많은 어려움과 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그 때마다, 오히려 사랑의 손길로 도와주셨다. 우리 교회는 간증이 찬 많은 교회다. 특별히 지난 1,2년간 돌아보면서, “안 되는 것 같아 보여도(×2), 믿음으로 결국은 되는구나!”하는 것을 보여주시고 확신을 더하셨다. 교우들이 어려움과 위기와 환난 중에도 참고 견디며, 복을 받는 것을 보면서, 어디를 가도 자랑할 만하다.
지난 연회 때, 어느 선배 목사님이 개척교회 힘들지 않느냐고 물으셨다.
아니라고 대답했더니, 왜 아니냐고 물으셨다.
우리교회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어느 교회는 살아계시지 않느냐고 반문하셨다. 그렇긴 하다. ^^
그런데,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지만 교우들의 삶과 신앙 속에 체험과 간증으로 살아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우리 교회는 그런 교회라고 말씀드렸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게다가 ‘우리 교회는 이런 교회입니다.’ 말을 덧붙였다.
‘교우들이 설거지나 여러 가지 궂은일들은 나름대로 도맡아 하시는데, 왜 나만 하는 것인지 불평하지 않는다. 비교하지 않는다. 예컨대 전도사님은 나이도 있으신데, 교우들이 즐겁게 이야기 나누도록 혼자서 이것저것 하실 때가 있다. 교회에 와서 편안하게 있도록 섬겨주시는 것이다. 교회에 와서 홀로 청소를 하고서 뿌듯한 마음으로 가시는 분도 있으시다. 누가 알아주거나 칭찬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서 즐거워할 줄 안다. 저마다 자기 자리에서 맡은 일을 할 때, 억지로 하거나 인색함으로 하지 않고 섬김의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한다.’
이런 것들은 제자훈련이나 배움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렵고 힘든 여건 속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안되는 것 같아 보여도, 불가능한 것 같아 보여도, 결국에는 승리를 경험했다.
- 초대받아 나오신 분들께 권면한다. 우리가 인생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무엇이며,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인가? 적어도 환난 중에, 혹은 절망하고 낙심한 중에 가장 좋은 것은 돈이나 사람이 아니다. 돈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있다하고 하더라도 인생 자체를 복되게 만들지는 못한다. 사람 역시 사람은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다. 시편은 이렇게 고백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네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은 인생 중에 나타내 보이신다. 그리고 도우신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2)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했고, 그 사랑을 알기에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42:1) 주를 간절히 찾았다.
이 시간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시길 빈다.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이라는 것을 알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걸림이 되는 것이 있다. 죄로 인한 두려움이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 그의 안색에 불편한 심기가 그대로 드러났다. 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는가? 가인은 하나님을 향해 낯을 들지 못했다. 죄의식이나 죄책감 때문이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 때문에 하나님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이 점을 깨닫지 못한다. 대신에 자신의 일이 안되는 것만 원망하고 아벨을 시기했다.
성경은 바로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 참된 기쁨이 없는지, 불행한지, 하나님을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는지, 그것이 죄 때문인데도, 깨닫지 못하고, 이유도 모르고, 자기 고집대로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를 절대적으로 사랑한다고 확증해주신다. 아흔 아홉 마리 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와 같이, 가출했던 탕자가 거지꼴이 되어 돌아와도 아들을 반기는 아버지처럼, 너무나 애타게 우리를 찾으시고 반기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로마서5:8은 우리에게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지극히 사랑하신다.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새롭게 거듭나길 바라신다.
-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말씀은 쉬우면서도 잘 알려져 있는 말씀이다.
씨를 뿌리는 자가 씨를 뿌렸는데, 일부는 길가에 떨어졌고, 또 일부는 바위 위에 떨어졌다. 또 가시떨기 속에 떨어졌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졌다.
어떤 결과가 일어나겠는가? 그 예측은 쉽다.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새들이 발견하고 먹어버렸다. 없어졌다는 말이다. 바위에 떨어진 씨는 어떤가? 싹이 나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다. 가시 떨기에 떨어진 씨앗은? 싹이 나고 자라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가시에 막혀 열매를 맺는 데는 실패했다. 그런데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달랐다. 백배의 결실을 보았다.
신앙생활은 이와 같다고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복음을 들어도 길가에 떨어진 것처럼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을 깨닫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들을 때에는 힘이 생기고 기쁨도 경험한다. 조금 믿음이 생길락 말락 한다. 그런데 한두 번 교회에도 나아오지만 그것으로 그친다. 혹은 지속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듬성듬성 왔다 갔다 하는 데 그친다.
세 번째 케이스는 개인적으로 참 안타깝게 생각하는 지점이다. 믿음이 생기고 신앙생활을 잘 하며 성장하는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지점에서 염려와 근심 걱정, 재물에 대한 욕심, 세상적인 재미와 기쁨에 가로막히고 만다. 문제가 생겼을 때, 조금만 더 잘 참고 견디면 결실이 있게 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포기하고 주님을 멀리한다.
지난주에 궁정교회에서 다녀갔다. 지역장 되시는 권사님이 물었다.
“목사님, 언제가 제일 힘드십니까?”
“교우들이 여러 가지 삶의 문제로 힘들어하고 아파할 때입니다.”
진심어린 대답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더 아플 때가 있다. 그 어려운 문제를 하나님께 믿음으로 맡기고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포기할 때이다. 실패는 바로 포기할 때라고 하지 않는가? 믿음에서 파선당하고 탈선할 때, 그리고 눈에 뻔히 보이는 멸망의 길을 갈 때이다.
여기 모인 분들은 어떤가? 주님은 우리가 네 번째 단계로 향하는 믿음의 결단과 다짐이 있기를 바라신다. 나의 상태가 이 세 단계의 어느 지점에 있다면, 돌이켜서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처럼 믿음의 결실과 그 체험과 간증이 있기를 바라신다.
내 생각대로, 원하는 대로의 기쁨이 없다고 해서, 빨리 속단하거나 단정짓지 말고 조금만 더 참고 견디며 인내하면서 믿어보시기 바란다. 믿음의 완성과 승리는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처럼 백배의 결실을 얻는 것과 같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혹은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믿으면 무엇이 좋을까? 이스라엘 백성은 인생에 견줄 수 있는 광야생활을 40년간이나 했다. 모세는 그러면서도 의복이 헤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았으며, 약속의 땅에 당도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음으로 가능했다고 말한다. 광야와 같은 인생에서 먹을 것, 마실 것 없고, 쉴 곳도 없었는데,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하나님이 계셨다. 바로 그분이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보호날개 아래 품으시고 광야를 거쳐 온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어두움 가운데 비추이는 빛이었고, 그 빛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였다. 바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선한 싸움 싸우고 달려갈 길 달려가며 믿음을 지킬 수 있는 힘이었다. 마태, 마가, 누가에게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그 세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고 성장해가는 비전이었다. 길을 잃은 이들에게는 새 길이었고, 인간적인 한계에 부딪친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었으며, 하나님과 말씀은 그 자체로 큰 힘이며, 능력이며, 기적이었다.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말씀은 물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풍랑이 세차게 이는 가운데, 제자들이 탄 배는 전복될 위기에 있었다. 주님은 물 위를 걸어오셨고, 베드로로 하여금 물 위를 걷도록 하셨다. 예수님의 이런 기적과 능력은 우리 삶 속에서 여전히 체험되어지고 경험할 수 있다. 아무것도 의지할 것 없고, 발을 디디고 설만한 발판이 없지만, 그래서 물속에 빠져 익사하고 말 것 같지만, 빈 손으로 시작했던 인생이 승리와 성공으로 바뀌는 사례가 무척이나 많다. 그래서 소망과 희망을 잃지 않고 용기를 낼 수 있다. 믿음이 있을 때에만 이것을 체험하게 된다.
창립주일을 맞이하여서, 이런 생각을 했다. “앞으로 더욱 부흥하고 성장하며, 교회에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혼 구원과 하나님나라에 대한 사명에 관한 설교? 구체적인 비전 있는 설교? 교회부흥과 성장에 관한 설교? 전도의 열심, 뜨거운 기도, 성령충만한 영성이 있는 교회, 거창한 슬로건을 내건 설교?
그런데 제게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거창한 사명, 비전, 소명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요행을 바라거나 욕심을 품지 말고 꾸준히 성실히 지속적으로 노력하며 결실을 맺으며 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한신 몸된 교회에 대한 것이다.
주님은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다고 말씀한다. 이것만 보면 대단하다. 큰 비전과 꿈과 목표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그 과정에 대해서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15절.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얼마나 소박한 말씀인가? 풀이하면 이렇다.
“좋은 땅에 떨어지는 것들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서, 그것을 굳게 간직하여, 참는 가운데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1)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착한 마음, 좋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들어야 한다.
2) ‘지키어’ 그것을 굳게 간직할 수 있어야 한다.
3) 결실 때까지 참음과 인내로 견딜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매우 기본적인 신앙의 원리이다.
어느 순간 때가 되면, 울면서라도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된다. 그 결실의 질량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앞으로도 우리교회와 우리의 믿음이 매우 기본적인 신앙의 원리에 충실히 서길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