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30일 부활 3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셔서 새힘과 소망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 사월의 마지막 주, 부활절 셋째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세상에서 분주하고 바쁘게 살면서, 어두워지고 캄캄해졌던 우리의 심령이 주님의 밝은 빛으로 환해지며, 무겁게 짓눌려 길을 잃었던 우리의 인생길이 주님의 인도하심대로 새 길을 발견하기를 원하며 나왔사오니, 머리 숙인 저희에게 빛되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되찾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여 주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3:6)
- 세월호 사건과 부활
세월호와 관련하여 신기한 일이 있는데,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세월호 침몰, 그 때문에 졸업장을 받지 못하게 된 250명의 아이들, 졸업식이 시작되자 한 무리의 새떼가 단원고로 날아들었다.(사진1) 졸업식이 시작되자 새들은 학교 주위를 몇 번이나 원을 그리며 비행했고(사진2), 식이 진행되는 동안엔 옥상에 내려앉아 한참을 기다렸다(사진3). 그렇게 졸업식을 마친 후 학생들이 다 돌아가고 나서야 단원고 옥상을 지키던 수십 마리의 새들은 다시 하늘로 흩어졌다.
이날 졸업식에 참석했던 사람들과 유가족은, ‘아이들이 새가 되어 다녀갔다보다.’고 서로 위로하고 울었다. 우연한 일을 사람들이 ‘끼워 맞추기’식 해석일 수 있다. 그런데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아픔을 가진 이들에겐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가 됐다. 영적인 눈으로 보자면 하늘은 이런 식으로라도 위로의 선물을 보내는 것은 아닐까?
세월호가 인양되던 날, 찍힌 사진이다. 오랫동안 하늘에 떠있었고, 석양에 비친 광경을 찍었다. 가짜뉴스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이날 공군비행이 있었다는 둥, 그래픽 합성이라는 둥, 비과학적이며 원시적 사고라는 둥, 이야기를 쏟아냈다. 가짜 뉴스도, 조작된 사진도, 비행기가 지나가면서 생긴 것도 아니었다. 여러 군데에서 다양하게 찍힌 사진들이 올라왔다. 그저 미스터리할 뿐이다.
이 이야기를 부활절 아침에 할까 생각했다가, 미루어 지금 살펴보는 이유가 있다. 예루살렘 입성 때 주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물론 그 현상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러나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어떤 이들에게는, 진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은폐되길 원하는 사람도 있고, 위로와 격려로 용기를 내어 진실을 마주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상처를 가진 이들의 가슴과 응어리를 정치적, 정략적으로 이용하고 왜곡시키고 변질시켰던 시도들에 대해, 하나님도 분노하고 계셨고 가만히 지켜보고 계시지만은 않았다.
왜 이야기를 부활절이 지나 세 번째 주에 언급하는가? 자칫 신비주의에 매몰되게 할까봐서 그랬다. 그러나 부활이라고 하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믿음은 우리가 차분히 우리의 삶과 세상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분변하는 가운데, 더욱 또렷이 새겨지고 확신을 갖기를 주님께서 바라신다.
죽은 소녀를 보시며, 잔다고 말씀하시고, ‘일어나라’ 깨우셨던 주님의 능력이 보이시는가? 부활절 세 번째 주를 맞아, 잠든 이를 깨우시는 주님의 능력이 더욱 새롭게 다가온다. 주님은 우리가 부활의 능력을 믿으며, 일어나길 바라신다.
-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예수님께 와서 논쟁을 자처한다. 어떤 사람이 장가를 들어 자식이 없이 죽었다. 모세의 율법대로 동생이 형의 상속자를 위해 형의 아내를 취했다. 칠 형제가 있었는데, 둘째가 죽고, 셋째가 차례대로 죽어 나중에는 막내가 형수를 취했다. 마지막에는 형수까지 죽었는데, 부활의 때가 되면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는 것이냐고 물었다.
주님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다.” 말씀하시면서, “부호라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환희와 영광이 빛나는 부활을 말씀해주신 것이다.
이야기 말미의 내용은 무엇인가?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무슨 뜻인가?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은 조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의식을 고쳐주신 것이다. 그들은 열조로 돌아간 이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살아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위대하고 훌륭한 믿음의 조상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뜻은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다. 족보와 혈통만을 따지면서, 모세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이들에게 세상은 투쟁하고 쟁취해서 지배하고 군림하며 섬김을 받아야 승리하고 복된 세상인 것이다.
세례요한은 일찍이 유대 광야에서 ‘회개하라.’며 세례를 베풀 때, 이렇게 말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면, 자기 출생과 상황에 대한 자만심은 그 자체로서 불신앙이다.
사두개인들은 제사장을 비롯한 종교지도자 그룹인데도 실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것을 자기지식과 상식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는 것은 죽은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배제되고, 살아있는 자만이 하나님 사랑에 포함된다는, 죽은 자와 산 자를 비교하는 말씀이 아니라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열조로 돌아갔고 부활이 없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부활을 강조하기 위한 말씀이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는다. 사두개인들보다 나은가? 그렇지 않다. 예수께서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에게 이야기를 잘 했다, 코를 납작하게 해줬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 서기관이 찾아왔다. 사두개인들보다 자신들이 더 나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 했다. 주님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의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다. 모세의 자리에 앉으려고만 한다. 모세의 자리를 탐하는 한,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믿지는 않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참부활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믿는다고 하면서 믿지 못하는 바리새인과 같지는 않은가? 혹은 부활이 없다고, 다만 기념일이나 행사일 뿐이라고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어떻게 사는 것이 부활의 능력을 믿으며, 바라는 삶인가?
- 살아계신 주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무리들이 듣고 놀랐다. 왜 놀랐을까? 단순히 말씀을 거침없이 잘하셨기 때문인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살아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인가?
이렇게 생각해보자. 위대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 하신 살아계신 하나님! 어떻게 다른가? 달리말하자면 사두개인, 바리새인이 미화한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 나그네였고, 연약했고, 인생의 아픔과 상처가 많았지만 그들과 함께 하시어 믿음으로 이기게 하신 하나님.
그렇다면 부활신앙은 누구를 바라보는 것인가? 위대하게 된 조상? 미천한 인생을 붙드시는 하나님?
바울이 로마 감옥에 수감됐다. 바울은 누구를, 어느 분을 바라보았는가?
믿음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특징이 있다. 자기능력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자기능력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그 능력 밖의 일을 만났을 때 낙심하고 절망하고 포기하기 쉽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능력 밖의 일을 만났을 때, 기도의 자리에 먼저 앉는다.
바울은 어땠을까?
자기 능력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비천함에 처한 상황과 풍부함에 처한 상황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에게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기 능력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능력 밖의 일을 만났을 때, 더 이상 능력과 힘이 남아있지 않아 절벽을 경험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이것을 체험한다.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을 말이다. 힘이 되시고 위로가 되시며 용기가 되어주셨다. 기도로 소망의 제목을 주시고, 간구로 역사하시고 이루어주심을 체험한다.
감옥에서 빌립보에 보낸 편지에 이렇게 쓰고 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 그분은 아브라함에게도, 이삭에게도, 야곱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연약하고 부족하고 나그네와 같았던 험한 세월을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이 아시고 인도하셨다. 우리 모두에게도 마찬가지 이다. 내가 알 수 없는 인생의 부분까지도, 구석까지도 살피시고 헤아리신다.
아무도 세월호가 다시 떠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기대는 했겠지만 끝내 힘겨운 싸움에 지쳐 결국에는 유야무야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는 단원고 졸업식장에 새떼가 날아온 것이나, 하늘에 세월호 리본 모양의 구름이 수놓인 것에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얼굴’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제목을 세월과 부활이라고 지은 이유는 이렇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간 ㅈ시간을 의미한다면 부활은 영원한 시간을 의미한다. 전문 용어로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라고 하는데 주님은 우리가 영원에 잇대어 부활의 시간을 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는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두개인과 같은 영적인 상태에서 깨어나기를 주님께서 바라신다. 부활을 말하기는 말하고 믿되 모세의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는, 출세와 성공의 복, 번영신앙을 위해 믿는 바리새인과 같은 믿음을 넘어서길 바라신다.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께서 능력주시고 소망주심을 믿는 부활신앙으로 우리의 일상을 담대하게 살기를 바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