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23일, 부활2주

온 세계 만물을 소성케 하시고 푸르게 하시는 하나님,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가 주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온 대지가 생명의 기운으로 약동하는 때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졌던 자들이, 생동하는 생명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 안에서 소생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히7:19)

 

 

  • 냉장고를 여는 요리의 고수들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TV프로그램이 있다. 모두들 알겠지만, 어느 집의 냉장고를 통째로 가져와, 그 안에 있는 식재료로 요리를 만드는 것이다. 레시피가 따로 있지 않다. 요리의 고수들은 순식간에 최선의 요리를 만들어낸다. 역시 고수(高手)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저런 식재료를 저렇게도 사용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해주는 데 있다.

 

어쩌면 오늘의 말씀은 그와 같을지도 모른다. 요한이라고 하는 신앙의 고수가 영적인 식재료들을 통해, 우리에게 만들어 선사한 영의 양식, 이른바 “백 쉰 세 마리 물고기를 낚아 올린 이야기”

 

프로그램을 보면, MC들이 가져온 냉장고 속을 천천히 살펴본다. 우리도, 성경을 찬찬히 살펴보자.

 

 

  1. 요한의 냉장고

우선, 소재는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는 장면이다.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으러 가겠다고 하니까, 다른 제자들도 함께 가겠다고 한다. 그런데 그날 밤 하나도 잡은 게 없다.

 

다른 복음서에서 이 대목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내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마태, 마가는 베드로가 그물을 내렸다가 빈그물을 올린 내용조차 없다. 누가만이 “밤새도록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따랐다가 심히 많은 고기를 잡아 올렸다고 증거한다. 그럼에도 공통적인 것은 “내가 너희를 사람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요한은 이 이야기를 부활의 내용과 연결지어 사용하고 있다.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깨닫는 내용의 재료로 사용하고 있다. 물론 공관복음서의 것과 날짜와 시간이 다르다면 다른 것이다. 공관복음서의 내용은 공생애 중에 벌어진 일이고, 요한복음서의 내용은 부활사건 이후에 일어난 내용이다. 반복되는 일상의 모습이다 보니까,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예수부활이후의 제자들의 모습이 좀 의외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사람을 낚는 어부들이 돼야할 제자들이 왜 고향에 돌아와서 고기를 잡고 있는가? 예수님 부활사건을 목격한 제자들이라면, 더욱 하나님나라와 복음을 위해 활발히 열심히 온몸을 던져 일할 것 같다. 그런데, 고향에 내려와 있다. 게다가 4절에 보면 제자들이 날이 샐 때까지, 바닷가에 서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물론 예수님 승천하실 때, 제자들을 모아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분부가 있었고,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이 있었다. 그 사이의 준비과정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보면 이렇다. 똑 같은 일과 반복되는 일이라도, 그때그때 상황마다 의미가 다를 수 있다.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고기잡이의 일상을 통해서 주님의 제자로 부르신 의미있는 삶을 기억해냈다면, 요한은 고기잡이의 일상을 통해서 낙심치 않도록 도우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떠올리게 한다. 요한이 속한 시대와 공동체에 전하고 있는 메시지이다.

 

두 번째, 미미해 보이는 재료 같지만, 제 눈에는 선명하다. 베드로가 주님을 보고 물속에 뛰어드는 장면이다. 마태, 마가복음에는, 풍랑 중에 주님께서 바다위로 걸어오셨다. 베드로는 물속에 뛰어들어 주님께 다가가다가 점점 물속에 빠져갔다. 주님은 풍랑을 잠잠케 해주신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장면이 6장에 나온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풍랑이 일어나는 상황도 아니고 깊은 물속도 아니지만 주님이라는 말을 듣고 바다로 뛰어내린다. 겉옷은 단정히 두른 상태였다.

 

마태와 마가는 풍랑 속에 물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 재료를 믿음이 부족하고 의심하는 제자들의 모습과 연결짓고 있다. 달리 말하면, 제자들의 모습을 반면교사로 삼아, 주님을 믿고, 담대한 믿음을 가질 것을 요청하고 있다. 요한복음에서 이 이야기는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마음을 진정시켜주신다. 즉 평강을 주신다. 그리고 제자들은 기쁘게 예수를 영접하였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물속에 뛰어든 모습도 그와 같은 맥락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주님을 영접하는 자세 말이다. 내 옷이 젖을까봐, 물이 차가울까봐, 또다시 옷을 갈아입는 수고를 해야할까봐… 이런 저런 이유로 계산하고 저울질 하고, 그래서 망설이고 주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시란 선포와 고백과 증거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향하고 맞이하기 위해 거뜬히 뛰어내린다.

 

세 번째 재료다. 누가복음에서 잡은 물고기가 너무나도 많아서 그물이 찢어졌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명시적으로, 누가복음을 의식한 듯, 11절에 찢어지지 아니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잡은 물고기 숫자도 요한은 큰물고기 153이다. ; 153에 대해서 가장 유력한 설명은 ① 1부터 17까지의 합산(10+7,12+5), ② 666이 네로를 지칭하는 말인 것처럼 153은 익투스(ΙΘΧ)의 축약형, 따라서 ③ 교회와 그리스도의 일체감을 암시하는 말. 요컨대 교회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신앙고백에 대한 싸인 내지는 표식이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누가복음에서는 주님을 따르던 많은 이들 중에 주님을 떠난 이들도 있지만, 요한복음은 부활이후에 끝까지 믿음을 지키던 모범적인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네 번째는 이것이다. 요한복음은 21장까지 있다. 그런데 20장을 끝부분을 보면, 21장은 덧붙인 말씀이라는 것을 한 번에 알 수 있다. 이미 20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 나온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도마에게도 나타나셨다. 그리고 30절-31절을 보면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을 요약적으로 보여주면서 매듭짓고 있다.

 

30절,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다.

31절, 이것을 기록함은 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기 위한 것이다. ② 그 이름을 믿고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자연스레 이런 의문이 든다. 요한은 20장까지 복음서를 매듭지었는데, 21장을 통해 무엇을 덧붙이고자 했을까?

 

 

  1. 영적인 고수가 가르치는 부활사건

자, 요한복음의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요한은 이 복음의 재료들로 어떤 요리를 우리에게 선보이고 있는가?

 

90년대에서 1세기 말 사이, 로마의 박해와 유대인들의 핍박 속에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갔던 성도들에게 요한이 전하고자 했던 가르침은 무엇인가? 첫 번째는 부활체험에 대한 이해에 대한 가르침, 두 번째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대한 가르침, 세 번째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성도가 승리하는 비결 등을 가르치고 있다.

 

첫 번째 부활에 대한 가르침은 이것이다. 유일회적인 사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의 일상 가운데 찾아오시는 분이시다. 처음에는 주님이 곁에 계신 것을 몰랐다가도 밤새 일하다 낙심한 제자들은 바닷가에 계셨던 주님을 알아보았다. 베드로는 ‘주님이라는 증언과 고백에’ 물속에 뛰어내려 주님을 영접했다. 그 주님을 영접함을 통해, 낙심하고 힘겨웠던 마음이 용기를 얻고 지혜를 얻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신앙 속에 믿음의 옷을 두르고 뛰어내리는 결단과 영접하는 결단을 하지 않고서는 부활하신을 여전히 만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 그런데 그렇게 해보라. 주님을 향해 결단하고 영접해보라. 영접이란 무엇인가? 적극적인 맞이함이다. 그때, 능력도 일어난다.

 

두 번째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부활신앙의 바탕위에 서 있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이다. 교회를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을 깨닫고 만난다. 그리고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교회에 나와서 성도는 그때마다 예수님의 부활을 깨닫고, 낙심치 않으며 용기를 내야 한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도 바로 그 부활의 빛 아래서, 이날이 주님의 날임을 고백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어디에 그물을 내리고 어떤 방법으로 해야할지 모를 때, 주님은 오른 편에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방법과 지혜가 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이 있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내 방법, 내 생각이 있지만, 그대로 안 되는 것 같아서 낙심하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혜주시고 그 삶과 길을 인도하신다. 그 길이 최선임을 믿고 순종하기를 바라신다.

주님은 조반을 차려주셨다. 주님이 차려주신 조반을 먹는 것은, 성찬식 사건이나 다름 없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말씀하셨다.’ 육의 양식이 아니라 영의 양식을 사모하고, 주님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는 이는 감히, 그가 어디 계시며 누구신지 묻지 않는다. 12절이 그것을 증거한다.

 

(제 28회 연회 때, 아이패드를 나눠줬다. 운 좋은 사람이 타갈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꼭 필요한 사람에게 주님께서 주신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제가 체험한 시편 23편의 말씀,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은 틀리지 않았다. 생명의 양식이 되신 주님은 우리에게 부활의 힘과 능력을 주신다.)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세 번째, 어지러운 세상 중에, 믿음에서 파선당하고 길을 잃기 쉬운 때에, 부활체험과 그 바탕에 소망을 둔 교회와 성도들은 마침내 승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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