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16일, 부활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새 생명의 기쁨을 온 인류에게 허락하신 소망의 하나님, 기쁜 부활절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하염없이 다가오는 유혹의 깃발들을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피하느라고 지친 심령들이, 무덤을 깨치고 일어나셨던 주님의 승리를 힘입어 소생하고자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머리 숙인 저희에게 희망을 한 아름 안겨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39)
- 우리에게 요청된 믿음
부활의 아침, 주님 앞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빈다. 봄꽃들로 아름답게 물든 곳곳마다 인파가 몰려들어, 그 정취를 맛보고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과 대통령 탄핵이라는 시국을 겪으면서 고통받은 시민들이 모처럼 자연이 주는 선물을 만끽하는 것 같다. 그 잠시잠깐의 풍경만으로도 보통사람들의 마음은 위안을 얻는다.
대선정국과 전쟁발발의 가능성에 대한 염려가 시민들 가슴의 한 켠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하지만 예수 부활의 소식을 접하는 이아침,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은 봄꽃 하나도 귀하게 여기시고 꽃피우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자. 모든 생명과 존재가 귀하다. 그러기에 사랑과 존중과 배려와 용서의 마음을 포기할 수 없다.
예수님은 어둠과 죽음과 사망의 권세를 깨뜨렸다. 그것을 불러왔던 것이 무엇인가? 그러나 그것을 깨뜨리신 주님은 오늘 우리가 어떤 믿음과 결단이 있기를 바라실까? 자기와 색깔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성향이 달라도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만이 모두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믿는 것이, 이 부활절의 아침 우리에게 요청되는 믿음이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의, 그 값진 승리를 믿는 것이 바로 이 부활절 아침 우리가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할 믿음이다.
- 무덤, 그리고 삶의 자리에서
여인들이 예수의 무덤을 찾았다. 거기서 천사는 예수의 부활 소식을 알렸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부활 아침 예수의 무덤은 슬픔과 애통의 장소가 아니라 놀람과 기쁨과 영광의 장소가 되었다. 마리아는 동산에서 울고 있을 때, ‘마리아야’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다. 다락방에 두려움에 떨며 숨어있던 제자들은 주님 찾아오심으로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았고 담대함과 용기를 가졌다. 부활하신 주님이 호렙산 떨기나무에 붙었던 불꽃처럼 제자들의 심령에 붙으니, 세상밖에 나가서 부활하신 주님을 전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를 만나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던 어두운 눈과 귀가 열려, 가슴이 뜨거워지고 환희와 기쁨이 넘쳤다.
무덤만이 아니다. 삶의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베드로는 고기 그물을 걷어 올리는 자리에서 주님이 결코 낙심치 않도록 힘주시는 은혜를 체험했다. 주님은 마치 친절한 이웃의 모습으로 제자들 곁에 오셔서, 손 수 조반을 지으시고 와서 먹으라고 따뜻한 섬김과 자상함으로 예비해두신 은혜를 먹여주셨다. 심지어 의심하던 도마까지도 보여서 믿는 게 아니라 믿기에 보이는 믿음의 원리를 깨달았다. 바울은 말할 것도 없다.
주님은 고통과 절망, 죽음밖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인생의 눈물과 슬픔 속에서, 예수의 부활을 믿고 용서와 사랑의 평화의 길을 가고자 하는 이에게 기쁨과 능력과 용기를 더하신다.
- 마가의 부활의 의미
오늘 성경말씀은 부활절 설교본문으로는 잘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저는 이런 생각을 한다. 매년 부활절을 맞아, 오늘 내게 다가오는 부활의 의미는 무엇일까? 부활은 단순히 ‘믿는다’는 막연한 신앙고백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구체적인 우리의 신앙고백이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부활을 말할 수 있는가? 성경과 초대교회 속에서 혹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인물은 없을까? 오늘 본문에서 바로 그것을 발견했다.
오늘은, 세월호 침몰3주기 되는 날이기도 하지만, 주후 73년 로마에 대한 유대인의 마지막 항전이 진압되고, 철옹성과도 같았던 ‘맛세다 요새’가 함락된 날이다. 마가복음이 기록된 시기는 바로 그러한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9절에서 귀신의 이름을 ‘군대’(레기온_로마의 사단급 병력)로 지칭하고 있는 것도 이런 것을 반영한 것이다.
복음서는 단순한 기억의 기록이 아니다. 공동체의 교훈과 가르침을 반영하고 있다. 믿음으로 적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전에 말씀드린 바 있다. 마가복음은 이중적 구조로 돼있다. 전반부는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이적, 후반부는 예수님의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수난. 이적을 베푸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고난 받았다. 그러나 그것을 이기시고 죽음과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셨다. 이것이 마가가 증거하고자 했던 복음의 포인트였다.
달리 말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주후 70년경 부활절을 맞은 신앙공동체는 부활을 어떻게 이해하고 경험하고 했던가?
마가가 마가의 공동체 안에서 느꼈던 신앙적인 문제가 있다. 믿음생활을 오래 전부터 했고,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바랐던 이들이 실상은 예수를 안 믿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저 사람 교회는 다니지만, 예수는 안 믿어.’ 이렇게 말하는 것과 똑같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에 대해 세 번을 예고하신다. 그때마다 제자들은 처음엔 무지했고, 다음엔 오해했으며, 마지막에는 배반했다. 무지, 오해, 배반. 그것이 제자들의 모습이었다. 교회 안에 팽배해 있던 이런 신앙의 문제 때문에 고심하고 있었다.
어떤 목사님들이 이런 말씀을 하신다. ‘아무리 설교 하고 말씀을 잘 전해도, 그 때 뿐이더라. 변화가 없다.’ 이런 탄식과 마가의 탄식이 맞물려 있다.
예수님의 부활소식에 대한 제자들의 모습은 무엇인가? 16장 8절, 11절, 13절을 찾아 읽어보자.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그들이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두 사람(엠마오도상의 제자)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14절에 주님은 제자들의 식사자리에 나타나셔서 어떻게 하시는가?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사실상 마가공동체의 신앙심 깊다고 하는 이들의 불신앙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세상 속의 교회의 모습을 보자. 유다가 안보를 이유로 무기를 준비하고 칼을 들고 전쟁도 불사해야 하는 것으로 방향을 결정했을 때, 신앙인들의 모습과 그 공동체, 교회는 어땠을까?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신앙인들이 신앙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러나 이념과 정책의 문제로 접근하는데 동화되곤 한다. 마가 공동체의 문제도 그렇다. ‘예수님을 믿지만, 따르지는 아니하고, 교회는 교회요, 세상은 세상이요.’ 그랬다.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8:34).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따르는 자들이 두려워했다(10:32).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그 길을 따르는 것을 어리석게 여기거나 주저했다. 세상풍파와 파도에 복음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기까지 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방법을 좇지 않았다.
마가가 보기에 오히려 초신자나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보다 못할 때가 많았다. 오늘 교회가 어느부 분에서는 세상만도 못한 경우가 있다고 느낄 때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름 없는 어떤 여자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는데, 그가 예수를 믿는다(14:3이하). 그리고 로마의 백부장(이방인)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를 두려워하고 주저하지만 맹인 바디매오가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준다. 10장 52절에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영어로 말하면 on the road가 아니라 on the way라는 뜻이다. 단순히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를 따랐다는 것이다.
마가의 고민은 이것이었겠다. 교회가 예수의 길을 가지 못하고 세상의 길을 갔다. 주님의 평화를 따르지 못하고 세상의 평화를 따랐다. 교회는 세상과 달라, 예수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데, 어긋나 있었다. 예수에 대해서 무지, 오해, 배반하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된다. ‘싸드에 대한 찬반’, ‘대북문제’, ‘전쟁위협에 대한 문제’ 등에 대해 오늘 교회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런데 교회는 어떤가? 예수님과 어떤 연관관계를 맺고 있는가? 오히려 세상 사람보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보다 못한 것은 아닐까?
- 세상에 대한교회의 메시지.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으로서의 교회는 어떤 입장을 견지해야 하는가?
첫 번째 주님은 평화를 파괴하는 무력과 전쟁의 영이 떠나가길 원하신다. 10절 군대귀신은 그 지방에 주둔해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주님은 원치 않으신다. 전쟁은 분명히 이런 군대 귀신 들린 이들을 양산해 낼 것이다. 엄청난 상처와 고통을 주고 그 무엇으로도 싸맬 수 없고 붙들어 둘 수 없다.
우리 안에 전쟁과 다툼과 분쟁을 일으키는 영이 주둔해 있으려 한다. 사람에게 칼을 갈고 복수하려고 하고 파괴하려고 한다. 미워하게 만들고 다투게 만든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이웃과 그리고 자기 안에서. 그러나 이것을 용납하지 않고 허락하지 않는데서, 경험해보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된다.
두 번째는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신다. 더러운 귀신을 제거하는 비용으로 돼지 때 2천 마리가 소모됐다. 동네사람들은 그 영혼이 온전케 된 것을 기뻐하지 않고, 물질적 손해에 대해 걱정하며 예수님을 떠나시게 한다. 세월호 인양에 드는 비용을 문제 삼는 이들의 민낯과 다를 바 없다. 언제든 대량인명살상과 막대한 재산손실로 이어질 수 있는 무기구입비용은 문제삼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통해서, 고마우신 우리 주님이 부활을 확신하게 된다.
세 번째,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된다. 나 자신에 대해서 그렇고, 또 내 안에 그 마음 주심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영적인 체험과 확신 가운데 서게 된다. 특별히 마가는 유대전쟁의 피해로 상처입은 수많은 영혼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상처를 싸매시기 위해 일하고 계신 주님을 발견했다. 먼저 갈릴리로 가 계시겠다고 하신 주님이 아픔과 상처 가운데 절망하며 울고 있는 동족, 지체, 사람들 사이에 일하고 계심을 보았던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가 고난의 현장에 관심을 갖고, 찾아가거나 돌봐야 한다.
그러니까, 오늘의 말씀은 단순히 군대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신 주님의 능력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부활의 의미 아래에서 예수님을 뜻을 깨닫고 따르고자 했던 마가의 구체적인 신앙고백을 살펴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의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주후 70년경, 마가가 경험했던 부활의 의미는 무엇인가? 전쟁 혹은 그 위협과 위기 등으로 인한 상처와 고통, 천하보다 귀한 영혼이 유린되고 버려지는 현실, 자비나 긍휼이 없고 무심하고 척박한 세상 속에서 주님은 치유하고 고치시고 회복하시기 위해 찾아오신다. 그리고 예수님의 길을 걷길 원하신다. 평화의 아침을 여시는 분을 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