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9일, 종려주일, 고난주일, 사순절 제 6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를 부르셔서 새 힘과 능력을 채워주시는 창조주 하나님, 복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따스한 햇살 가운데 불어오는 바람이 형형색색의 꽃을 피우고, 초록으로 덮인 대지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계절에, 성령의 바람으로 치유함을 얻기를 바라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머리 숙인 저희에게 평강과 소망으로 채워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히7:19)

 

 

  1. 낯빛

사도 바울과 스데반의 피부색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누가 더 밝을까?

 

스데반이 유대인의 돌에 맞아 순교했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과 그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선명히 보았다. 그의 모습은 성령이 충만했고, 환하게 빛났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마지막 말이었다.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받아주셨다.

 

바울이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때, 바울은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지켜봤다.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다. 스데반의 영광스러운 모습과는 달리 바울은 혈기가 등등했고 적개심과 살기로 가득했다. 예수 추종세력을 소탕하려고 하는 남다른 적의까지 넘쳐났다.

 

둘 중 누가 더 밝은 피부톤을 가졌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아는 것이 있다. 피부색은 밝아도 어두운 얼굴빛이 있는가 하면, 피부색이 어두워도 환한 빛이 있다. 스데반의 얼굴에서는 밝은 빛이 나타났고 사울에게는 어두운 빛이 나타났다. 여러분은 어떤 낯빛을 가졌는가?

 

어떤 사람은 속상한 일, 괴로운 일을 만날 때도 아닌데, 평소 어두운 빛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다. 반대로 참 고통스럽고 힘들 텐데도, 감사를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환한 빛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다. 자기도 모르게 그것은 습관이 되고 일상화 되는지도 모르겠다.

새벽닭이 울 때였다. 보통은 아침이 밝아 옴을 알고 밤새 걱정했던 낯빛도 안도하는 빛으로 바뀐다. 그런데 베드로는 아연실색했다. 핏기 없는 얼굴이 되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이 이것이었구나!” 그제서 깨달았다. 그리고는 얼굴이 퉁퉁 부을 때까지 울었다.

 

 

  1. 베드로의 깨달음

베드로는 무엇을 깨달았을까? 예수님은 줄곧 감람산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하셨다. 평소 여러 가지 기도 중에, 다른 제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베드로에 대해서도 주님은 많은 기도를 드리셨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를 밀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22:32)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도 감람산에서 기도하셨다. 베드로가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

 

주님께서 자기에 대해 하신 말씀이 그대로 되자, 그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안타까운 것은 가룟유다이다. 무죄한 분을 팔아넘긴 것을 후회하고 되돌리려고 했을 때, 이미 때는 너무 늦었다.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신념 때문에 붉었던 얼굴은 금새 새카맣게 변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한다. 그는 사탄에게 매인바 되었다고 말이다. 이상한 점이 있다. 왜 가룟 유다에게는 베드로에게 하셨던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까? 가룟 유다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으신 것일까? 다 같은 제자인데, 누구를 위해서는 기도하시고, 누구를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으신 것일까?

 

그럴 리가 있겠는가?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요13:1)고 증거하고 있다. 베드로나 가룟유다가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할지 아시면서도 말이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기 전에,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했다. 가룟 유다만 빼고 용서해달라는 것인가? 아니다. 그러니 그를 기도에서 제외했을 리가 만무하다.

 

안타깝다고 하는 것은 이것이다. 그 역시 돌이켰다면. 베드로가 예수를 모른다고 저주하며 맹세까지 했다. 영적으로 보면 저주는 배반보다 더 큰 것 아닌가? 그러나 돌이킨 뒤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가룟 유다도 돌이킨 뒤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베드로가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 흔히 예수님께서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하셨던 말씀이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베드로의 깨달음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자신을 위해서, 날 위해서, 기도하셨던 예수님, ‘사탄이 밀까부르듯 하려고 하였으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위해서 기도하셨다.’고 하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누가복음22:44은 이렇게 증언한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니 깨어 기도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왜 흘려듣고 주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며 부인했던가!’ 그리고 강한 줄 알았지만 실은 연약한 자신을 위해 피땀 흘려 중보하셨던 예수님, 그 크신 사랑이 생각나서 더 눈물이 났다. 주님의 갈릴리에서 어부로 지내면서 지중해 태양에 검게 그을린 얼굴도, 펑펑 울고 난 얼굴은 그 눈물 덕에 빛난 모습이었다.

 

 

  1.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큰 사랑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은 그 누구라도 예외 없이 사랑하고 중보하고 계시다는 것과 그 무엇도 우리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확증적으로 보여주시는 사건이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중보자가 되신다. 그리고 우리 역시 돌이킨 뒤에 하나님의 영광을 환하게 드러내는 삶을 결단하길 원하신다.

 

바울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고 율법주의자였다. 평소 그의 의로움을 충분히 드러내며 살던 사람이다. 그러기에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하다고 여기는 것은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율법이라고 하는 틀에 갇혀, 생명이 그 보다 더 높은 가치라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로마서 7장을 보면, 예수를 만났을 때와 만나기 전의 모습이 어땠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여러분 이런 형편을 아시는가? 하나님의 법에도 불구하고 죄가 자꾸만 쌓여가는 것, 그래서 처음 형편보다 나중 형편이 더 심하거나 비참하게 되는 것 말이다.

율법이 죄를 이기게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바울은 율법을 지켜도 여전히 죄의 욕망이 여전히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 조문은 지킬지도 모르지만, 조문이 말하고 있지 않은 수많은 죄와 욕망에 사로잡혀 속절없이 끌려가는 자신 때문에 괴로웠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 신앙의 의무를 다하고 수고를 다한다. 말씀을 사모하고 주님의 방법과 뜻과 생각이 나의 것과 비교해 옳다는 것을 인정한다. 사람들이 볼 때는 괜찮은데, 자기의 속사람이 아는 자기는 그렇지 않았다. 그것을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양심은 알고 있었다. ‘외식하는 자’에 불과한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말이다. 죄의 매여 고통받고 위선과 외식하는 모습이 들추어질까 봐 염려한다. 오늘의 신앙인들이 괴로워하는 부분은 아닐까?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제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7:22-23)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이러한 탄식의 정점에서 다메섹 사건이 일어났다고 본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다메섹으로 가고자 했던 바울의 계획은 사실 바울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메섹으로 그를 불러내신 것이다.

 

물론 성경이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다.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홀연히 나타나 그를 둘러 덮은 빛에 눈이 멀어 사흘 동안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을 기억하면 이 사흘이라는 것은 보통의미가 아니다.

 

갈라디아서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물론 매일의 고백이 돼야 하겠지만, 그가 탄식의 정점에서 체험한 구원의 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도덕적이거나 율법적인 문제가 일차적인 목적이 아니다. “죄를 짓느냐 마느냐?”, “선을 행하느냐 마느냐?” 그런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믿느냐 마느냐?”, “예수 안에서 그것이 확증되었다는 것을 믿느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 자체가 일차적인 목적인 것처럼 말이다.

 

바울은 거기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 그리고 하나님의 초월적인 그 크신 사랑을 깨달았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8:1)

 

율법은 그것을 범하는 자는 하나님에게서 끊어진다고 가르치지만, 복음은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했지만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가룟 유다가 주님을 배반했지만 주님은 그 역시 돌이키길 바라셨다. 바울도 돌이켰다. 그러나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의로 감당하려고 했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율법인가? 복음인가? 자기 의인가? 주님의 사랑과 용서인가?

 

먼저 이것을 기억하라.

심지어 사탄에게 넘겨졌어도, 빼앗긴 채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그 영혼을 도로 찾으시기 위해 최선을 다하신다. 누가복음이 안식일에 병고치시는 사건을 통해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열여덟 해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그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눅13:16)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중보자가 되신다. 여러분을 진정 위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신다.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기를 바라신다.

 

 

  1. 돌이킨 후에

주님은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돌이키고 회개로 그치지 않는다. 복음은 주님이 모든 걸 용서하시니, 어떤 죄를 지어도, 또다시 회개하면 상관없다고 하는 말장난에 그치지 않는다. 돌이킨 후에 형제를 굳게 하라는 말씀을 생각하라. 형제는 우리 삶의 자리에서 믿음 없는 남편일 수도 있다. 자녀일 수도 있다. 이웃일 수도 있다.

 

이 시간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돌이켜 봐야 할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라.

나를 붙들고 있고 내가 주인 삼은 이는 누구인지 돌이켜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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