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2일 사순절 제 5주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는 공의의 하나님,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가 주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대지의 나무들이 꽃을 피우고, 파릇한 새싹이 자라는 때에, 우리에게 주님의 소망과 사랑이 꽃피우게 해주실 것을 바라며 이 자리에 나왔아오니,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시145:19)
- 십자가의 도
기독교는 십자가와 부활의 종교이다. 주님의 십자가 뒤에는 부활 영광이라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가 있다. 부활신앙은 죽음과 사망의 권세까지도 깨뜨리고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현재의 당하는 고난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끝까지 승리하길 바라신다.
고린도전서1:18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우리에게 고난이 찾아오고,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
신앙인들은 세상적인 방법이나 길을 택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그 길을 걷는 사람이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말씀하셨다. 자기 십자가를 외면하지 않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 공통된 고백은 무엇인가? 나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주님의 위로와 용기를 얻으며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십자가 위에 있다고 누구나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 아니다. 십자가 위에 있어도 여전히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그랬고 믿음에 관하여 파선한 자가 되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고 결단이 있기를 바란다.
- 십자가에 달린 두 행악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좌우편에는 두 행악자가 있었다. 둘의 모습은 대조적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좀 전에 이야기 했던 대로, 한 사람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것에 그쳤지만, 다른 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행악자라고 하니까, 나와는 처지나 상황이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되는가? 영적으로 우리는 죄인이니까, 행악자나 다름없다고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려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 처형은 로마에 반기를 든 사람들에 내려진 공개처형이었다. 두 행악자가 어떤 죄목으로 십자가에 달렸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강도짓이나 강간, 사기, 유괴 같은 흉악한 범죄자가 아니다.
원래 예수님의 자리는 누가 매달릴 자리였나? 잘 알다시피 바라바였다. 항간의 소문에 의하면, 바라바는 이미 로마로 전향했다는 말이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로마 당국이 바라바를 사면대상에 포함시켜, 예수를 놓아줄지 바라바를 놓아줄지 물을 수 있었겠는가, 합리적 의심을 제기한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것을 알고 석방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의치 않자, 십자가 처형대상에서는 제외됐지만, 형을 살고 있는 바라바와 비교해서, 누구를 놓아줄지 여부를 물었다. 당연히 예수를 석방하라고 할 줄 생각했지만, 예상과 달랐다. 군중들은 바라바를 택했다. 빌라도가 민심을 오판했다. 민심은 반로마투쟁의 인사로 알려져 있는 바라바를 선택할 것이 자명하다. 정치적인 계산이 빠른 사람들은 이를 알아차리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라바를 외치게 했다. 빌라도는 “예수를 어떻게 하기를 원하는가?” 물었다. 십자가처형!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 그냥 지나치는 것이지만 의미 있는 우연 같은 게 있다. 바라바와 예수가 이름이 같다. 바라바라 불리는 예수 그리고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 혼동을 피하기 위해 바라바와 예수로 명기하고 있다. ‘바라바’라는 이름의 뜻도 “압바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 “압바”(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했던 것을 생각하면, 여기에도 유의미한 섭리가 있는 것 같다. ‘사람의 아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셨다.
행악자들은 사회를 불온하게 만드는 일탈자들이 아니라, 로마라고 하는 ‘세악’(世惡)에 타협하지 않고 대항하던 사람들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인과 실존적으로 동일한 점이 있다. 기독교신앙인들은 누구인가? 세상을 본받거나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를 믿으며 일구어가는 사람이다.
때로는 협력하며 나아갈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절대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재물과 하나님의 나라를 겸하여 섬길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평화와 폭력, 생명과 반생명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 나라와 반대되는 것에 대해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할 때도 있고, 감당해야할 십자가가 놓이기도 한다.
가정에 위기가 올 때 세상은 이혼을 권한다. 고부간의 갈등을 겪을 때 세상은 부모에게 대적하라고 가르친다. 누군가의 잘못에 대해서 세상은 처벌하거나 앙갚음 하라고 가르친다.
세상은 용서하지 말라고, 원수를 갚으라고, 자기에게 유리한 것, 자기만의 행복을 택하라고 말할 때, 성도들은 주님의 뜻과 방법을 생각한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 놓이게 된다.
미당 서정주의 아우인 서정태 90세 시인이 들려주는 시 한편이 있다. 소문이라는 제목의 시다.
대숲이 사운거리고 / 나뭇잎이 살랑거리며 / 온갖 / 새들이 재잘거리네
무성한 소문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불륜, 사람에 대한 흉 같은 것들이 떠돌고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옳은 말, 당연한 말, 의협심이 넘치는 말처럼 떠들어댄다. 그리고 일을 크게 만들고 문제를 발생시킨다.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그냥 덮어둘 일이지 / 봄바람에 옷소매 스치듯 / 지난 잠시의 눈맞춤 / 그것도 허물이라고 흉을 보나
“그냥 덮어둘 일이지!” 세월의 깊이에서 우러난 진국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오늘 우리 각박해지고 거칠어진 삶의 자리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이런 포용력과 아량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될 때
행악자 중 하나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는 미련한 것이 되었지만, 다른 행악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었다. 우리가 십자가 위에 놓이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을 비방하는 행악자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어떨 때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 되지 못하고 미련한 것이 되는가?
첫째,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자기 생각에 가득 차 있을 때이다. 그는 자기가 십자가에 달린 이유를 망각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행악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기에 당연하지만 예수님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41)
자기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인간의 연약함, 불완전함, 불쌍함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임하실 공간을 마련하지 못한다.
둘째, 주님을 시험하려고만 하지, 자기를 내려놓으려 하지 않는다. 가만히 보라. 주님을 시험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따지고 보면 자기 방법과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께 맡기지 못한다. 결국 자기 뜻과 고집대로 하고, 주님께서 자기 뜻대로 해주시는 지 아닌지, 시험하려고만 든다.
그러나 주님의 방법과 생각이 나와 달라도, 훨씬 더 높고, 나중에 보면 훨씬 더 좋은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행악자는 예수님께 이렇게 비방한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올바른 믿음이 없어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것처럼 의심하고 갈등하는, 그러다가 결국에는 십자가 위에서 십자가의 도를 좇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와 방법을 택한다.
-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 될 때
그렇다면 어떨 때 하나님의 능력이 될까?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할까?
첫째,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 복음을 믿으라.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주로 비유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명백하게 그것이 어떤 세계인지 다 설명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것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 개입하시고 역사하시는 능력과 사건들을 통해서 말이다. 주님은 이미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 볼 것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 섭리하고 계신 주님을 바라보라고 하셨다.
“공중의 새를 보라.”, “들에 핀 꽃을 보라.”,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무슨 말씀인가? 이미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가 역사하고 계심을 보라는 말씀이다. 겨자씨와 같은 작은 것에서 공중의 새들이 깃들 수 있는 평화로운 보금자리요 쉼터가 열린다. 그 씨앗을 심는 이에게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결실로 열리며, 누룩이 가루 서 말을 전부 부풀게 하는 것처럼, 연약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미약함에도 전혀 차원이 다른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밀가루 반죽과 부풀어 오른 반죽은 형질은 같은 것 같지만 차원은 다른 것이다. 그처럼 천국은 우리 삶에 변화가 찾아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세상의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을 깨닫고 확신하지 못하면, 우리는 그 나라를 세상 가운데 소개할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 고통과 아픔과 상처가 우리를 영원히 괴롭히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그것을 이기고 극복한 세상이 우리에게 열리도록 허락하신다. 어쩌면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한 고통과 상처와 아픔을 하나님 나라가 꽃피어나도록 하는 재료로, 자양분으로 사용하실 지도 모른다.
둘째로 하나님은 나의 믿음을 기억하신다. 하나님이 나의 삶에 개입하시고 역사하시며 섭리하시는 분이심을 믿으라.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고난당하는 나의 처지와 형편을 주님께서 모르시겠는가? 그런데도 고통의 십자가를 제하여 주시고 편안하게 해주지 않으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히브리서2:18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어리석은 자는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께서 그 십자가를 맡겨주신 이유를 떠올린다. 감당할 수 있게 도와주시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다. 주님이 나를 기억하시고 도우시는 동안, 어느새 그 나라가 내게 임하여 있게 된다. 분명히 그 나라가 내게 임할 것을 믿으라.
주님께서 그 행악자에게 “네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셨다.
십자가의 도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있는가? 아니면 미련함에 그치고 마는가? 십자가 위에서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있는가? 미련함이 되고 있는가?
주님의 임재와 섭리를 믿으라. 내 믿음을 기억하시고 역사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사모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