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보입니다(요한복음9:1-12)

주님이 보입니다(요한복음9:1-12)

 

 

 

2017년 3월 26일 사순절  제 4주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며, 세상 모든 나라를 공의로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 복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따스한 햇살 가운데 불어오는 바람이 형형색색의 꽃을 피우고, 대지를 연한 초록으로 덮어가게 하는 계절에, 성령의 바람으로 치유함을 얻기를 바라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머리 숙인 저희에게 평강과 소망으로 채워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직 은밀한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2:7)

 

 

울면서라도 씨를 뿌리자.

<동영상>

옥한음 목사님이 생전에 이찬수 목사님에 대해 예언적으로 말씀하신 설교인데, 잘 들어보시고 여러분이 판단해보시길 바란다.

 

<동영상 상영 후>

오늘 한국 교회에서 이찬수 목사님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들어 쓰고 계신가? 아버지 대신에 이찬수 목사님에게 목회의 복을 주셔서 크게 들어 쓰고 계시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우리가 다 알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신다.

 

우리 역시 이 믿음을 가지고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보자. 헌신하며 울면서라도 씨를 뿌려보자.

측량할 수 없는 은혜로 하나님은 기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인도하신다.

 

 

우리의 주님

오늘 말씀은 실로암 연못가에서 눈을 뜬 맹인에 관한 말씀이다. 주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서 씻으라고 하셨다. 그랬더니 정말 눈이 밝아졌다.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능력과 은혜와 역사를 일으키시는 분이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굳세게 해주시기 위해 시험으로 단련시킬 때도 있으시지만 은혜로 응답해주신다.

 

 

본말이 전도된 세상

그런데, 여기까지는 좋은데, 이와 관련해서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까, 사람들이 살면서 얼마나 숨통이 막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고침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환희와 기쁨, 감사가 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추궁을 받고 있고, 출교의 빌미가 되고 있다.

본말을 전도시키고, 사람을 한쪽으로 몰아세우는 사회가 얼마나 갑갑하고 숨통이 막히는지 모른다. 맹인으로 난 사람이 눈을 떴다. 그러면 어떤 반응이 일어나야 하는가? 그리고 그렇게 만드신 분은 누구신가? 그런데 22절을 보면 그 부모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듯한 말을 했다가는 출교될 것이 분명한 것을 알았다. 생존권 박탈에 대한 위협과 걱정을 가벼이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34절을 보면 눈을 뜨게 된 당사자는 쫓겨났다.

 

게다가 제자들의 물음은,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입니까, 자기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2), 그것을 들으시는 주님의 마음을 어이없게 만들었다. 그런 인식을 가지고 있다니 말이다. 당시의 일반적인 인식이나 마찬가지인데, 제자들부터 이 편견과 고정관념을 버리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3) 말씀하신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에는 저주받은 인생에 대한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는 인생에 대한 염려와 걱정을 가지고 산다.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특히 좋아하는 논리나 신념이 바로 제자들의 물음과 같은 것이었다.

 

주님은 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셨다. 같은 논리대로라면 그의 죄는 어떻게 된 것인가? 사해졌다. 주님께서 병자들을 고치거나 함께 하실 때, ‘죄사함’을 항산 먼저 언급하신 이유는 복음을 위해 뿌리 깊게 자리한 바리새인의 누룩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3. 로마의 두 가지 전략으로, 전락한 팔레스타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단순히 그가 눈을 뜨고 고침 받은 기적이 나타난 것에만 국한시키면 안된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내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이해를 해야 한다.

 

당시의 시대상에 대한 이해를 먼저 짚어보자. 로마는 약 300여년에 걸친 군사정복을 통해 지중해 연안의 거의 전 지역을 지배아래 두었다. 제국을 확장하고 효율적인 지배를 위해 두 가지의 기치를 내걸었다.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 ‘다문화주의’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했다. 평화를 표방하고 다문화를 인정하고 공존한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세계인가. 그러기 위해서 모든 질서가 로마에 귀속되어야 했다. 로마인들의 세입을 안정시키고 일부는 증가됐다.

이스라엘만 보더라도 종교와 문화를 그대로 인정했다. 다만 평화유지비용만 잘 내면 된다. 마치 트럼프가 한국에 방위비용을 더 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삼중의 조공과 조세를 바쳐야 했던 팔레스타인 대다수 농민의 삶이 어땠는지를 가늠해보자. 삼중 조공과 조세란, 1) 로마에 바치는 세금, 2) 헤롯 왕에게 마치는 세금, 3) 사두개파 대제사장들로 대표되는 종교세금을 말한다.

더 싼 값의 노동력과 효율적인 생산체계로 사회시스템이 전환되었다. 전답을 잃어버리고 소작농으로 전락을 하거나 소작농은 일용직 날품팔이로 전락했다. 포도원품꾼의 비유가 이러한 장면을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다.

점점 더 가난해지고 힘이 없는 백성들은 생계위협을 느끼고 생존권이 불안해졌다. 22절에서 ‘출교를 두려워했던 까닭’은 이런 정서를 반영한다. 단순히 배척당하는 두려움이 아니라 생존권을 위협받고 생계가 막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실 때, 큰 무리들이 주께 나오는 것을 보고 ‘목자 없는 양 같아서 불쌍히 여기셨다.’는 성경말씀은 단순히 끼니때를 놓쳐서 잠깐 배고픈 사람들에 대한 울음이 아니라 기본권을 상실한 불쌍한 이들에 대한 연민이었다.

사람들 사이에 의심과 불신이 생겼고, 가난에 대해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고, 다른 사람들의 가난과 절망을 이용하여 이웃을 속이는 부자들의 행태를 모방하려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세리였다.

사람들은 정말 메시야가 와서 이 모든 고통받는 상황을 일시에 바꿔주기를 갈망했다. 그래서 때로는 항쟁이 일어나고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유산을 상속하기 위해서는 로마의 시민권이 있어야 했다. 로마는 정복지의 귀족들에게 협력의 대가로 시민권을 수여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모세의 법을 빙자해서 아전인수격으로 적용하며, 율법에 민감했던 이유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는 의도보다도 속내는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속셈이 컸다. 주님은 이것을 간파하고 계셨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안식일 법에 대해서도,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바 된 사람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여러 가지로 거짓을 드러내셨다.

 

맹인이 된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필요가 있을까? 그가 고침받고 눈을 뜨게 된 것을 함께 기뻐해줄 필요가 있을까? 뿐만 아니라 가난한자, 나그네, 설 땅을 잃어버린 사람들에 관심을 갖거나 도와줄 필요가 있을까? 자기 살기도 바쁜데 말이다. 하나님께서 죄 때문에 내리신 벌인데,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세월호가 삼년 만에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자기들 놀러가다가 죽은 건데, 저기에 1000억이 넘는 돈을 쓴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말이다. ‘저 유가족들은 보상도 엄청나게 많이 받았다더라.’ 이런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고, 또 그것을 그대로 믿고 함부로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제자들이 2절에서와 같이 물은 것을 바로 이런 것에 비유될 수 있겠다. 누군가 정죄하고 나쁘다고 생각하면 존엄하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그릇된 생각에 빠져버린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이 아니다.

 

 

4. 하나님이 하시는 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먼저 이것을 염두에 두라. 믿음의 눈이 없으면 보지 못한다. 고린도전서1:18, 25은 각각 이렇게 말씀하신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다.”

 

세상의 힘, 제국의 강대한 힘이 하나님을 능가하고 잠시는 대신하는 것 같지만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는 날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흩어지는 안개요, 풀과 같이 마르고 꽃과 같이 시든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정리하면 이렇다.

1) 저주 받은 인생은 없다. 예수 안에서 누구나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대상이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해주신다.

 

2) 제국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힘과 폭력과 지배로 열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랑과 헌신과 섬김과 나눔으로 열린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나눔의 기쁨’, ‘공동식탁에서 일어난 용서와 화해’, ‘산상수훈’, ‘가난해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공중의 새를 보며 들의 핀 백합화를 보라.’, ‘병자들이 고침을 받고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는다.’, ‘지배자와는 달리 으뜸이 되고자 섬기는 겸손’

가장 약한 자에게서 소망의 꽃이 피어나고, 그 헌신과 나눔에서 로마제국이 꺾을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가 줄기처럼 자라난다.

 

3) 바로 이러한 일들이 예수 안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는 것이다. 우리의 눈이 열리기를 바라신다. 세상에서 어려운 일을 만나고 차별을 당하고 고통에 빠진다. 길을 잃어버리고 절망하기도 한다. 악한 사람을 만나 부당한 책임을 떠안을 때도 있고, 위기를 만나기도 한다.

그때 주님은 언젠가 내 삶에 한 번 다녀가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의 삶 속에 개입하시고 함께 하시며 살아계신 분이시다. 구원과 복음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주님 안에서 소망을 두길 원하신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오도록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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