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확신의 반석(출애굽기17:1-7)

기억과 확신의 반석(출애굽기17:1-7)

 

2017년 3월 19일 사순절 제 3주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사랑의 하나님, 사순절 셋째 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봄이 성큼 다가와 산수유는 꽃을 틔우고 반갑게 인사하는 때에, 주님 안에서 소망의 꽃을 틔우고 세상에 복음을 전하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따뜻한 품으로 우리를 감싸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거룩의 말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디도서2:11-12)

 

 

  • 영적위기를 맞은 고린도 교회

윗마을 목사님이 아랫마을 목사님한테 말을 빌리러 왔다. 아랫마을 목사님은 말을 빌려주면서 이 말은 “할렐루야” 하면 신바람 나게 달리고 “아멘” 하면 무조건 선다는 것이었다. 윗마을 목사님은 잘 알겠다고 인사하고 말에 올라 “할렐루야” 하니 정말로 말이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달리다보니, 앞에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그런데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을 멈추게 하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이제 꼼짝없이 죽었구나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기도를 마치고 “아멘” 하니 말이 낭떠러지 바로 앞에서 딱 멈춰 섰다. ‘다행이다.’ 목사님은 너무 기쁜 나머지 “할렐루야!” 하고 크게 외쳤다.

 

우스갯소리이지만, 신앙은 방심할 수 없다. “선줄로 생각하거든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는 말씀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왜 고린도교회는 분쟁의 고통과 그로 인한 상처로 신앙의 위기를 겪었을까? 고린도교회는 그리스도의 무수히 많은 증거가 나타나고, 부족함 없는 은사들을 체험했다. 좋은 교회를 다니는 것도 복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증거였고 은혜였다(고전1:5-7). 그런데 시기와 분쟁이 있다는 말(3:3)이 바울의 귀에 들려왔고, 세상법정 다툼으로까지 이어지면서, 은혜와 믿음이 사라졌다. 대신에 그 곳에 자기 자랑과 의를 드러내려 함과 우상숭배가 자리했다.

 

이유는 ‘선줄’은 알았지만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연약하고 불완전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다. 그런데 그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이것을 망각하면 이런 마음이 찾아온다. ‘이만하면 됐지.’, ‘또다시 내게 어려움이 찾아오겠어?’, ‘이제 나만의 행복을 즐기자.’ 이런 자만 말이다. 자만심은 또 다른 망각을 가져온다. 하나님의 베풀어주신 은혜, 감사, 기쁨.

다시 위기가 닥치고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자기 힘과 능력으로 해결해보려고 하는 인간적인 마음, 세상적인 마음이 가득 그를 지배했다. 그러면 의심, 불신, 원망 같은 것이 찾아온다.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는 어떤 사람인가? 길이 막히고, 앞이 캄캄할 때,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과 면목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이다.

 

바울은 고린도에 보내는 편지에서 “원망하다가 멸망당한 자가 있으니 원망하지 말라.” 한다. 얼마나 심각한 영적 위기에 빠져있는 지를 보면서, 중요한 두 가지의 해법을 내놓는다. ‘기억할 것’과 ‘확신할 것’ 이 시간 이 두 가지를 여러분의 마음판에 새기라. 이 비결은 한 마디로 요약된다.

 

 

  1. 르비딤 광야, 물을 찾을 수 없다.

오늘의 말씀은 민수기에도 증거하고 있는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르비딤 광야에 도착했다. 여러 번 절박한 어려움이 있었는데, 이전과는 차원이 전혀 다르다. 마실 물이 없다. 성경을 살펴보자.

출애굽기 14-15장은 출애굽해서 홍해를 무사히 건넌 내용,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이한 능력을 전하고 있다. 출애굽기 16-17장은 광야에서 공급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고 있다.

홍해를 건넌 사건을, 모세의 누이였던 미리암은, 노래를 통해 환희와 영광으로 드러낸다. 한 마리도 요약하는 구절이 있다. 15:19절.

 

“바로의 말과 병거와 마병이 함께 바다에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바닷물을 그들 위에 되돌려 흐르게 하셨으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지나간지라.”

 

바로의 군대에 대한 부분은 차치하고서, 이스라엘에 관한 부분만 주목해보자.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지나간지라.” 수영을 못하는 사람도, 노약자도, 어린이도 누구나 다 건널 수 있었다. 하나님의 품 아래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고백이다. 지나보면 불가능할 것 같았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고난도 고난인 줄 몰랐고, 힘든 것도 몰랐다. 정말 마른 땅 같이 지난 세월들이 있다.

 

그리고 이어서 광야에서 다섯 가지의 은혜를 공급받았다. ① 마라의 쓴 물이 단물로 바뀌었다(15:22-27). ② 만나로 먹이신 체험(16장) ③ 메추라기로 먹이신 체험(16장) ④ 반석에서 물이 나온 체험(17:1-7) ⑤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가 산 위에서 손을 들면 이기고, 내리면 패하는 체험을 했다. 아론과 훌이 그 손이 내려오지 않도록 도왔다(17:8-16).

 

르비딤광야에서 마주한, 차원이 전혀 다르다고 한 어려움은 무엇인가?

수르광야에서는 그림의 떡과 같지만 물이라도 보인다. 그런데 르비딤에서는 그렇지 않다. 수르에는 나무들도 보였다. 어딘가에 다른 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르비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물을 발견할 가능성이 몇 %나 기대할 수 있었을까? 거의 제로(zero)에 가까웠다. 보이는 게 없었으니 말이다. 눈으로 확인 된 것은 가능성 0%, 하나님도 하실 수 없는 일뿐이었다.

 

백성들이 모세에게, 물을 내놓으라고 원망한다. 그런다고 모세가 내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닐진대, 모세와 다툰다. 가족과 함께 다 죽게 된 사람의 절박한 심정을 함부로 단죄할 수 없다. 돌이라도 던져서 모세에게 화를 풀어내고 싶은 심정이다.

모세라고 왜 답답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마음을 알기에, 백성들이 돌을 던지면, 던지는 대로 맞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모세의 마음에는 피멍이 들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다(4).

 

기도는 어떤 능력이 나타나는가? 적어도 오늘 성경 말씀에서 나타나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① 보지 못하던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린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시야가 얼마나 좁은지 모른다. ②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지혜가 생긴다. ③ 문제가 해결되는 역사가 일어난다.

그가 잠시 잊었던 것은 무엇인가? 그 손에 들린 지팡이였다.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5) 이것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지금 내가 붙들고 있는 것, 혹은 붙들린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현상에 대한 내 방법을 붙들고 있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붙들어야 한다. 그 망막한 현실에 사로잡혀서 붙들리기를 원하는가? 하나님께서 붙드시길 바라는가? 기억하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붙잡고 계시다.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6)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방법이 떠올랐다. 호렙산, 그곳은 그가 40년간 도피생활을 하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던 곳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강하게 경험했던 곳이기도 한다. 하나님은 그 모세의 경험을 통해 지혜를 주셨다.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정말 그렇게 했더니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왔다.

 

 

  1. 기억하라, 믿으라.

민수기에서 전하는 말씀은,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음’, 그리고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다툼’

이밖에도 다른 불평과 원망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다. 그런데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한 이야기들이 한 데 모여 있다.

출애굽기에서는 무엇을 전하고 싶은 것일까? 독자들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연속적으로 체험하고서도 또다시 믿음 없이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반복적으로 원망하고 불평하는 백성들을 돌보신다. 그러면서 이런 의문을 갖는다. 왜 종전에 행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는가? 믿지 못하는가? 하나님께서 여전히 앞의 일을 하실 것이다. 왜?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은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실 때, 제자들이 떡을 가지고 오지 않아 걱정했다. 주님은 “왜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신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물 위를 걷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점점 물속에 빠져갔다. 그때, 주님은 소리질러 구해달라는 베드로의 손을 잡으시며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 하셨다.

우리 역시 동일하지는 않은가?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살아계셔서 역사하심을 믿지 못하면서, 홀로 괴로운 아리랑을 부르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것을 보면, 우리의 믿음이 넘어질 때는 ‘기억하지 못하고’, ‘확신하지 못할 때’이다. 이 시간 마음 가운데 괴로움으로 의심이 일고 있고, 믿음 없어 염려 근심을 가지고 있는 분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간에 자신에게 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라. 적어도 “이것은 정말 하나님이 하신 일이야!” 고백했던 것들은 기억을 하라. 그리고 그 능력을 믿으라.

 

반석에서 물이 쏟아질지 어떻게 알았겠는가? 반석 아래 지하수가 흐를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기에, 아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졌다.

 

 

  1. 반석이신 그리스도

고린도전서10장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르비딤 광야에서 일어난 사건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11),

교회 내에 분쟁이 일어나고, 교회의 지도자가 권면하고 당부하는 것들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지도자와도 갈등이 일어나는 상황은, 동일한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갈등은 신앙의 무지한 변론들이 발생함으로 일어난다.

그런데 바울은 개인이든 공동체든, 겪고 있는 문제들이 시시비비나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봤다. 예컨대 좋은 의도로 들어주고 기도해주려고 했는데, 훈수 두고 가르치려다보니까, 이견이 생길 수도 있고, 그 과정에서 자존심이 상하거나 공감되지 않는 말 때문에 오히려 더 벽이 생기기도 하는 법이다. 올바른 믿음과 신앙의 터전 위에 서지 못해서 생기는 결과다.

 

바울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르비딤 광야의 사건을 빗대면서 하는 말이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가 ‘기억할 것’과 ‘확신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있는가? 그리고 확신하고 있는가?

앞에서 ‘기억할 것’과 ‘확신할 것’에 대한 비결을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고 했다. 주님은 오늘 바로 이 고백 위에 서길 원하신다. 이스라엘은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 그 반석은 무엇인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한다. 저의 인위적인 해석이 아니다. 고린도전서10:3을 보면, 바울은 르비딤 광야에서의 일을 바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주님은 요한복음4;14에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어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모세가 기도하며 반석을 쳤던 것처럼,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예수 안에서 기도로 그리스도의 반석을 두드리며 치기를 원하신다.

 

 

밸런싱 아티스트라는 직업을 아는가? 다음의 그림들이 가능할까? (그림)

사물의 중심을 잡아 저런 작품이 가능하도록 하는 사람이 밸런싱 아티스트이다. 변남석 씨.

 

그가 돌들이나 사물을 잡고 특유의 부드러운 감각으로 중심을 맞추면 이런 작품들이 만들어진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길에 맡겨질 때, 우리 스스로는 설 수 없을 것 같아도, 주님은 우리 각자 각자를 붙드시고, 물 위라도 걸을 수 있는 중심을 잡아주신다.

 

해결가능성 0%, 르비딤의 고난이 종전에 다른 어려움들과 차원이 전혀 다른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그렇다. 창조주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해결가능성 100%다.

 

승리하는 한주 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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