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29일
복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 복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명절을 맞이하면서 사람들이 고향을 찾고 힘을 얻습니다. 우리의 본향을 찾아 주님께로부터 참 쉼과 힘과 능력을 얻고자 이 자리에 나왔사오니, 위로부터 내리시는 평강이 저희 모두에게 충만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골1:13-14)
제목 : 베들레헴 교회여 작지 않다.
본문 : 미가:1-8
- 베들레헴에 대한….
설 명절, 고향길 찾는 이들의 발걸음을 보았다. 어려울 때이지만 그래도 고향길을 찾는 이들의 표정은 밝다고 리포터가 말했다. 어려울 때, 힘은 무엇인가? 돈, 명예, 업적 이런 것들이 아니다. 사랑의 뿌리가 있는 곳,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는 존재가 있는 곳, 그곳에서 힘을 얻는다. 오늘 주님께 나아온 여러분 모두에게 참 본향의 은총이 넘치기를 축원한다.
베들레헴에 대해서 미가서와 마태복음의 인식차이가 있다. 평소에 이 의미가 뭘까, 오가면서 생각하던 차에, 오늘 말씀이 성서일과를 통해 주어졌다.
미가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마태2: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미가서에서 베들레헴은 유다 족속 중에 작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작지 아니하다고 말하고 있다. 게다가 다스리는 자가 나올 것이라는 데 그치지 않고 목자가 되리라고 하고 있다. 물론 의미야 같겠지만 의도가 있다. 이 의미가 무엇일까?
- 모레셋 사람 미가
미가가 누구였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아버지가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봐서, 모레셋의 비천한 농부출신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고(필립 킹), 공의와 정의를 강조하면서 사회정의를 수호해야할 책임이 있는 모레셋 도성의 장로 중 한 사람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다른 예언서들과 같은 방식의 소명설화가 없다는 점으로 봐서도 미가는 선지자라기보다는 의식있는 장로일 것이라는 주장을 더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추론은 전적으로 편견이다. 상위계층의 배우고 지식 있는 사람이 공의와 정의, 그리고 진리를 더 잘 알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엘리트주의이다.
이미 1장 1절과 3장 8절을 보면, 다른 예언서들과 유사한 소명기사(하나님이 그를 예언자로 부르신 직접적인 사건과 내용)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말씀하셨다고 증거된다.
1:1,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3:8, “오직 나는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해져서”
그는 아모스와 같이 시골사람으로서 당대에 일어난, 땅을 빼앗긴 소작농들의 고뇌와 설 땅을 잃고 가난해진 사람들에 대해 정부관리들의 행태를 직접 체험하고 목격한 선지자라고 볼 수 있다.
사회상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자.
1) 안보
모레셋은 블레셋에 대항하기 위한 전방초소가 있던 곳이다(지리학자 아하로니). 잦은 약탈과 수탈을 경험한 곳이라 이 지역 사람들은 철저한 안보에 민감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연평도 주민이나 휴전선 부근 주민들이 가질 수 있는 생각처럼 말이다.
미가도 마찬가지다. 3:12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
그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안보에 대해 불순하게 여길 수 없다. 1장 10절-15절에 언급된 지명들이 있는데, 모레셋 근처에 있는 도시들이다. 앗수르의 산헤립이 침공하여, 큰 피해를 본 지역들이다. 미가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하나님께로 돌아서지 않으면 안보와 관련된 국가의 장례는 이보다 더 큰 재앙과 환난을 면키 어렵다고 선포했다. 마치 안보를 빌미로 싸드가 도입될 예정인데, 더 큰 위협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2) 주택과 토지정의
안보의 문제를 이슈화 하려는 사람들의 의도를 조심하라. 이것을 구실로 더 중요한 사회적인 모순이나 해결해야 할 고난의 문제들을 삼켜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모스는 정의와 공의가 사라지고 재판을 굽게 하며, 힘없고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는 세상에 대해서, 사자후를 토했다.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6:7),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6:24) 외쳤다.
그런데 미가는 ‘안보’라는 프레임으로 블랙홀이 된 비참한 현실에 주목했다. 2:2절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
안보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부동산투기꾼들이 득세하면서, 마치 위기 속에 극성스러운 사람들이 사재기를 하듯이, 땅에 대한 이기적인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법과 질서를 어지럽히면서까지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뇌물과 권력오남용으로 정의와 공의를 왜곡시켰다.
신명기19:14에는, “네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지니라.”
신명기27:17에는,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레위기25:23에서는 토지를 영구히 팔지 못하며, 희년이 되면 다시 되돌려줘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이었다.
개발과 투기로 많은 돈을 번 사람들은 미가2:9에 이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했다고 말씀하고 있다.
“내 백성의 부녀들을 그들의 즐거운 집에서 쫓아내고 그들의 어린 자녀에게서 나의 영광을 영원히 빼앗는도다.”
경기가 나쁜데 전월세는 오르고, 장사는 안 되는데 임대료는 턱없이 높아서 폐업해야만 하거나 강제 퇴거를 당하는 사람들의 설움과 시름이, 당시에도 이어졌다.
3) 불신과 냉정의 시대
이 시대의 자화상은 어떨까? 이렇게 까지 추락한다. 7장 5-6절을 보면, 아무도 믿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사람이로구나.”
이런 시대에 희망을 바라보고 회복을 기대할 수 있을까?
- 절망할 때, 가장 작은 것에서부터
이때, 미가는 베들레헴을 주목했다.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올 것이다.”(5:2)
저는 이것을 ‘사과희망론’이라고 부르고 싶다. 사과 속의 씨앗은 셀 수 있지만, 씨앗 속의 사과는 셀 수 없다.
오늘 말씀에서 1-3절은 하나님께서 변론을 벌이자고 말씀하신다. 4절은 구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바른 믿음과 신앙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러나 5절은 그 하나님을 배반하고 모압왕 발락의 꾀를 발람이 좇아감으로 불의한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일갈하고 있다. 6-7절은 거대한 예배상을 보여준다. 7절에 천천의 숫양,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 그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결코 하나님께 크게 인정받을 수 없다.
8절에, 여호와께서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말씀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할 수 있다. 당면한 문제해결을 위해 “율법을 준수하라. 그 길만이 살 길이다.”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 율법준수의 핵심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살펴보자.
3가지 Key Point가 있다.
1) 하나님은 출애굽의 사건을 통해서 나타난 구원의 능력을 보여주셨다. 2)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 주님이 사용하시는 일꾼을 예비하시고 보내셨다. 3) 사람은 찾지 못하고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알고 계시다.
베들레헴은 다윗왕이 나왔던 곳이다. 왕정시대가 된 이래에 다윗과 같은 왕은 전무후무하다. 사울이 왕권을 강화하고 직권을 남용하고, 인간의 어리석은 지혜로 한 사회와 국가를 어려움에 빠뜨리고 있는지도 모르게 빠뜨리고 있을 때, 사무엘은 돌이킬 수 없어 절망하고 슬퍼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까지 그러고 있겠느냐며, 이새의 아들중 하나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다. ‘내가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나님은 절망 속에 길과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베들레헴 이새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다고 하셨다. 다윗은 입신양명을 위해 때를 기다리는 형제들과는 달리 들에서 양을 지키는 일을 하고 있었고, 가장 막내였다.
베들레헴 씨앗 속에 이스라엘을 어떻게 셀 수 있는가? 사람은 한길만을 보고 있을 때, 하나님은 아홉 길을 내고 계신 분이다. 작은 것을 들어 크게 사용하시고 미련한자를 들어 지혜로운 자들보다 더 지혜롭게 하시며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보다 더 강하게 사용하신다.
이렇게 보자면 베들레헴은 문자적으로 지명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의미적으로 보자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게 하시며 소망을 갖도록 하는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미가로 하여금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시고, 참된 것을 보게 하셨다.
4:3-4절 “①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②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① 미가는 안보의 위협 속에 참된 평화를 바라보았다. 하나님께서 못하시겠는가? 여기에 안보의 문제에 대한 신앙적인 믿음이 있다.
② 선량한 사람들이 빼앗기고 주권을 상실하는 실상 속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바라보았다. 토지와 가옥을 빼앗기거나 전당잡히고 쫓겨난 자들에 대한 삶의 회복이 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는 말속에 그 믿음이 있다.
- 보여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다.
“보여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다.”
예수님이야 말로 사과희망론의 적격이신 분이요, 완성자이시다.
마태는 베들레헴이 작지 않다고 재해석해서 인용했다. 왜냐하면 전설처럼 전해오던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존귀한 평화의 왕이요, 우리를 구원하실 주께서 나신 곳이다.
미가는 율법을 준수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다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줄로 알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과연 사랑의 완성을 우리에게 모범으로 보여주셨다. 예수의 빛이 세상을 이기고 바꾸며 구원한다는 온전한 믿음을 갖기를 주님은 바라신다.
미가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며 다시는 전쟁 연습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예수님은 칼로 선자는 칼로 망한다고 했다. 용서와 사랑이야 말고 그 칼과 창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쟁기를 만드는 길임을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셨다.
부동산 투기꾼들이 공의와 정의를 왜곡하면서까지 사람들의 생활터전을 무너뜨리고 황폐하게 만들지만 주님이 보여주신 능력은 무엇인가? 오병이어의 기적, 나눔과 섬김은 그것을 이기게 한다. 내일 일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걱정하면서 사재기 하는 이방사람들처럼 욕심을 부리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을 주신다고 하는 믿음 가운데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다. 미움과 증오를 심어주어 편을 가르게 하고 집단이기심을 자극하며 혁명과 투쟁의 방식이 아니었다. 겨자씨가 자라, 자장 작은 것이로되 공중의 새가 그 나무에 깃들임과 같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짐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잃지 않고 일하라고 주님은 우리를 불러주셨다. ‘목자가 되리라.’ 이루 말할 수 없이 예수님은 좋은 분, 우리의 구주시다.
오늘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적용해본다. 세상이 혼란스럽고, 어지럽다. 도처에서 절망과 탄식 소리가 들려온다. 이 세상을 누가 구원하며 복음의 빛, 소망의 빛을 비추어줄 수 있을까?
교회가 크다고 중요한 것은 아니다. 건물의 크기와 성도의 수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가늠하는 척도일 수 없다. 예수가 있는가, 없는가?
비록 우리교회는 아직 미자립교회이다. 베들레헴처럼 작다. 그러나 우리 안에 보배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며, 그 능력과 권세를 의지하며 산다면, 작지만 결코 작지 않다. 우리 각자 각자가 그리스도의 평화를 마음에 담고 복음을 전하며, 설 땅을 잃어버린 이들의 버팀목이 되어주기를 소망한다면, 예수 없는 큰 교회 보다 더 크다.
예수에 대한 온전한 믿음으로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 나아가 예수의 이름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주님이 바라신다. 불화했던 가정에 주님의 참된 평화가, 욕심의 창을 겨누었던 일상에 베풀고 나누는 섬김이, 예수의 이웃이 되어 참 이웃이 되어주고자 하는 헌신이 불신의 사회를 바꾸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