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일꾼이 된 사람(누가복음10:21-24)

주님의 일꾼이 된 사람(누가복음10:21-24)

 

 

2017년 1월 22일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사랑의 하나님,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가 주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흰 눈이 내린 세상에 아름다운 정겨운 풍경이 가득한 때에, 우리를 흰 눈보다 더 흰 주님의 사랑으로 덮어주시기를 바라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은혜가 힘과 능력이 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이사야1:18)

 

 

  • 표적을 보고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

누가복음10:1-20. 예수님께서 70인의 제자들이 동네와 마을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는 내용이다. 사역과 관련된 주요 행동요령이 있다.

① 평안을 빌 것. 그 평안이 그곳에 합당하면 거기에 임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도로 자신에게 돌아온다.

② 병자들을 고칠 것. 귀신을 쫓는 일도 포함된다. 예수의 이름으로.

③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전할 것. 무슨 뜻일까? 임박했다는 시간적인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더 정확히는 인접성을 말하는 것이다.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매우 가까이 있다. 이따가 살펴보자.

 

70인이 돌아와,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기뻐했고, 사명을 감당하면서 감동받았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돌보고 계셨다.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주님의 이름에는 이와 같은 권세와 능력이 있다.

 

그러면서 더 중요한 것을 당부하신다. 20절.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 무슨 의미일까? 이것도 이따가 살펴보자.

 

 

  • 주님께서 보낸 사람들은?

먼저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달리 물으면 주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보내셨는가?

 

1) 하나님은 모세를 바로왕에게 보냈다. 왕궁에서 40년간 엘리트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한 순간, 광야로 도피하는 신세가 됐다. 그 지낸 시간도 40년이었다. 옛 명성은 유명무실해졌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자면, 그 시간은 구원의 역사를 위해 준비된 시간이었다. 이스라엘사람들이 광야를 지나가게 될 때, 광야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필요했다. 하나님은 모세를 준비시키셨다. 광야라는 화로 속에 담금질을 하시며 두드리셨다. 그리고 주님은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셨다. 준비, 훈련, 연단 이런 과정은 필수적인 것이다.

 

2) 그런가하면, 하나님은 ‘누구를 보낼꼬?’ 보낼 만한 사람을 찾으실 때도 있었다. 누가복음10:2의 말씀에서도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보내주소서.” 청하라고 말씀하신다.

 

이에 응답한 사람은 이사야였다. “주님, 제가 여기에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그는 주의 보좌를 사모하는 열정이 살아있던 사람이다. 제사상, 선지자들까지도 타락하고, 그 속에 거짓이 넘쳐났을 때, 그 순수한 신앙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주의 보좌를 사모하는 열정을 통해 가능했다.

주님은 바로 그 열정을 가진 이들을 찾으신다. 주님을 존귀히 여기고(주님은 주님을 존귀히 여기는 자를 존귀하게 여기시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보좌를 사모하는 자에게 감당할 능력과 사명을 맡기시고 그를 보내신다.

 

3) 또 주의 손에 붙들림도 중요하다. 수많은 선지자들을 비롯한 엘리야가 그랬다. 그는 심지어 로뎀나무 아래에 탈진해 있을 때, 주님은 그를 붙들어 세워주셨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주께서 붙들어 세워주시기를 간구하라.

모두가 바알에게 절할지라도 아직 바알에게 입맞추거나 오염되지도 않고 굴복하지도 않은 7천 용사를 예비해놓으셨다고 말씀하신다. 엘리야는 나만 ‘열심’이 ‘특심’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처럼 주님께서 붙들고 계시는 이들이 많았다. 달리 말하면 주님의 붙드심은 소수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누구나 바알에게 입맞추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도록 붙드신다.

입 맞추었다는 표현은 무슨 뜻인가? 결국 돈, 권력, 명예라고 하는 그 우상의 달콤한 맛을 알고 나면 그 종노릇을 하게 된다. 그러나 주님은 주님의 손에 붙들리기를 바라신다.

 

4) 가만히 정리해보면, 사람도 누군가를 보낼 때, 적어도 이런 정도는 고려하지 않는가?

① 감당한 능력, 잘 해낼 능력이 있는 사람인가? ② 믿을만한가? ③ 어려움을 극복해본 사람인가? ④ 적극적이고 자신감이 넘쳐야 좋다. ⑤ 자타가 공인하는 검증된 사람이어야 한다. 준비되고 예비 된 사람을 찾는다. 게다가 ⑤ 겸손한 사람을 사람들은 높이 평가한다.

 

주님은 어떠실까?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보내심을 발견하게 된다.

 

 

  • 우리에게

자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당연하다고 기대했던 사람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라는 표현에는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경험한 사람들의 기쁨과 감탄이 녹아 있다.

시험에 100점을 기대하지도 못했던 사람이 100점을 맞았다고 가정하자. 그는 “내가 100점을 맞다니!” 이렇게 자기가 성취한 것에 대해 놀라워하며 뿌듯해 한다. “내가?!” 라고 말이다.

 

어쩌면 그들은 사회적 신분이 적어도 중간 이하도 못되고 오히려 바닥인데다가, 교양 없고 비정상적인 취급을 당하는 계층이었을지도 모른다. 죄인취급을 받고, 냉대를 당하고, 별 기대감이나 존재감이 없는 사람들 말이다. 자존감이 낮다. 늘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고만 살면서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적도 없다. 도와주지 않을 때는 속으로 불평을 늘어놓고 그야말로 이기적이다. 열패감에 싸여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누구를 도왔다고 하는 보람과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성경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21절을 보라.

 

“그 때에” 즉 앞의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성령의 역사와 활동은 먼저 사람을 변화시킨다. 전혀 변화의 가능성이 없다고 단정 지을 수밖에 없는 사람까지도 말이다. 이 대목에 주목하라.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여기서 어린아이들은 어떤 의미인가? 문자적인 의미의 진짜 어린 아이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는가? 아니다. 그것은 문맥을 살피지 못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여담. 어느 잘 아는 목사님이 문맥적인 의미는 살피지 않고 문자적인 이해만 하려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역설했다. “성경엔 드래곤도 나오는데, 드래곤의 실존 안믿는 사람들 너무 믿음 없는거 아닌가?” 그러니까, 다른 선배 목사님이 한국인들이 다 죽였다고 주장했다. 왜? “용…용… 죽겠지?!” 그래서였다.

 

여기서 ‘어린아이들’이라는 의미는, 파송되었던 70인의 정체성을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헬라어로는 네피오스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페티이다. ‘어리석은 자’, ‘조롱하는 자’를 의미한다. 미가나 나훔서에서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자들이나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고 도움을 받거나 깨우침을 바라는 자들을 가리킨다. 앞에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와는 대조적인 존재이다.

 

우리는 이것으로서 어떤 것들을 알 수 있는가?

 

고린도전서2:27-29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심이라.”

 

우리가 잘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부르심이란 무엇인가?

세상 건축자가 버린 돌을 하나님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세상적인 기대와는 전혀 다른 의외의 존재가 오히려 복음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받든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다. 주님은 자신의 못난 행동을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고, 그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를 안고 살아가면서 스스로 좌절했던 사람들을 복음 가운데로 먼저 부르셨다. 식사도 함께 하시면서 죄를 사하여 주셨다.

 

복음 가운데로 부르셨다는 것은 무엇일까? 베드로전서2:9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에 들게 하신 주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권세까지 있으신 분이다. 우리가 아직도 죄인일 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몸을 내주시면서 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신 주님. 의인이어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아직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은 바로 우리에게 이런 소망을 두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롭게 거듭난 존재로 복되게 살기를 바라신다. 거듭난 존재로 어떤 삶과 사명을 감당하길 원하실까?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소유된 백성이니,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는 말씀이 단순히 명부에 기록되는 영예를 말하는 것인가? 아닐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참 하나님의 사람으로 기억하시고 기대하신다는 뜻으로 봐야 한다.

에베소서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이것들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① 이들은 주님의 용서를 경험하고 구원을 확신한 사람이었다. 이때 따라오는 것이 평안이다. 5절 말씀을 보면,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평안을 빌라고 하신다. 죄에 사로잡혀 있는 곳에 평안이 있을 수 없다. 오히려 불안이 있다. 가인은 마음에 죄가 가득했다. 분냄과 성냄과 시기와 질투 같은 것들이 가득하여 마음은 폭풍 같았다. 하나님 앞에서는 불안했다.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용서를 경험하는 데서부터 시작됐다. 죄의 문제와 그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함을 경험했다.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구원에 대한 체험이 이렇다는 것이다.

 

그러자 열리는 것이 있었다. 사람은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한다. 그런데 구원을 경험하고 믿게 되면, 보이는 것이 달라지고 들리는 것이 달라진다. 23절에서도 그렇게 말씀하고 계시다.

 

② 주님은 복음을 확신하며 끈질기게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길 바라신다. 하나님 나라를 깨닫고 바라보는 눈이 생기기 때문이다. 9절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라.” 앞에서 하나님 나라의 인접성이라고 말씀드렸다. 하나님 나라라는 말뜻도, ‘헤 바실래이아 투 데우’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곳이다.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동떨어져 있지 않다. 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가깝게 인접해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통치하는 곳이 하나님 나라다.

 

보는 것을 보는 눈이 복되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똑 같은 상황도 어떤 사람에게는 절망이 되고 지옥이 될 수도 있지만, 어떤 이에게는 소망이 되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임재의 상황이 되기도 한다. 어떤 이에게는 불평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믿음으로 감사가 된다. 어떤 이에게는 위기가 되지만 어떤 이에게는 기회가 된다.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보고 들음에 참눈이 생기면 이런 것들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섬김을 받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데서 이루어진다. 이기적인 욕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눔과 헌신 속에 있다. 누군가를 배척하고 미워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소자를 영접하는데 있다. 현재 고난이 따르며 쉽게 가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중의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음을 알고 참고 인내하며 견뎌내는데 있다. 로마서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룸 알기 때문이다.

내 내 생각, 내 방법, 습관, 의지, 뜻이 있지만 하나님의 생각과 방법과 뜻을 받드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다. 그렇지 못한 곳은 내 나라이지, 하나님의 나라 아니다.

 

자 그 통치는 어떻게 가능하게 될까?

 

③ 결론적으로 예수님을 영접함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들은 바로 주님을 영접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히브리서4: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들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결부 지으면서 확신하는 사람에게, 그와 인접한 하나님의 나라는 열리게 된다.

 

물론 믿음은 사람의 의나 공로가 아니다. 베드로가 그 믿음을 장담했을 때, 주님은 이런 말씀을 들려주셨다.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를 청구하였으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라.”(눅22;31-32) 믿음은 때로는 베드로처럼 약해지고 무너질 수 있다. 선줄로 생각할 때 말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간구하신다. 그 믿음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함으로, 늘 그렇게 해야만 발생할 수 있는 믿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러기에 오늘 우리가 다시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안에 설 수 있다.

 

이 시간 결단하자. 우리가 완전하고 의로워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연약하고 부족하고 죄인이지만 주님의 제자로 부르셔서 평안의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신다. 그 예수님을 다시 내 속에, 가정에, 삶 속에 영접하기로 결단하라.

‘예수님의 이름이면 귀신도 굴복하더이다.’ 여러분의 삶 속에 마귀가 하는 일들이 사라지고 회복이 일어나며 하나님의 나라가 그 속에서 열리기를 축원한다. 그래서 불화했던 자리가 평화로 바뀌고, 불행했던 자리가 행복으로 바뀌기를 바란다.

여러분의 삶 속에 예수님의 이름을 담대히 믿고 이와 같은 역사와 능력이 일어남을 믿으라. 등경을 말 아래 두지 않고 높은 데 두어야 빛이 드러나는 것처럼, 복음을 감추고서는 주님의 능력이 드러나지 않는다. 주님의 능력은 전도하면서, 복음을 전하면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이다. 이것이 드러나는 비결이다.

주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셨던 것처럼, 이와 같은 역사가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 일어나기를 기쁨으로 바라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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