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5일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사랑의 하나님, 거룩하게 구별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눈석임 물소리에 봄을 소망하는 즐거움이 성큼 다가온 때에, 은혜의 단비를 사모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사모하는 영혼에 주어지는 놀라우신 은혜가 충만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이 시간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빈다.
여러분, 어지러운 세상 중에 크게 동요하지 않고 복되기를 바란다. 세상과 상관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주님이 주시는 소망을 품고 힘과 용기를 내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주님은 우리가 소망의 기쁨을 잃지 말고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길 바라신다.
이런 점에서라도, 오늘의 말씀은 참 특별하다. 이런 마음을 두고 떠오른 말씀이 시편112:7의 말씀이었다. 우리 교우들을 위해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뢰하고 마음을 굳세게 하기”를 중보기도 했는데, 신기하게도 성서일과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오늘의 말씀이다.
시편 112편은 밋밋한 편이다. 공감을 일으킬 만한 고통 중 탄식이나 사모하고 흠모할 만한 감사나 찬양의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 특별한 교훈이나 지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굉장히 일반적이고 당연한 것들이다. 그러나 이 시편은 히브리어의 알파벳 순서에 따라 노래 부르기 쉽게 지어진 시이다. 혹하게 만드는 것이나 돌풍을 일으키는 것이 답이 아니라 아주 기본적인 것이 사실 아주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상기하라.
수많은 시험과 시련 속에서도 인생이 잘되고 복 받는 비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것”이다(1). 달리 말하면 그는 하나님께 기억되는 사람이다.
하나씩, 말씀을 살펴보자.
2.
2절,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운이 좋은 인생이나 특별한 인생이어서가 아니다. 삶의 기반이 미약하고 위태로울 때의 다윗을 아시는가? 다윗이 사울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당했다. 단순히 사울의 시기와 질투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와중에 생명의 위협과, 아무리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고 결백을 보이려 해도, 주변에서 사울과 다윗 사이를 이간하는 원수나 간신배들 때문에, 억울했고 어지러웠다.
이런 하소연을 한 적이 있다. “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잇감”(시63:10)이 되었다고 말이다. (원수들의)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그의 마음은 전쟁이요, 그의 말은 기름보다 유하나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시55:21) 거짓을 입에 문 원수들의 말은 어쩌지 못하는 정신적인 고통이었다.
사울과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렇다고 다윗이 바로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이 아니다.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은 흔히 사울이 죽자 바로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위를 물려받았다고 생각한다. 이스보셋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다윗은 헤브론에 있었다.
사울과 다윗의 가문사이의 비교는 어떤가? 성경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사무엘하3:1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외형적인 조건만 비교해보자면 사울의 가문이 더 우세할 것 같다. 비교우위를 점하고 있다. 그는 경쟁에서 계속 위축되어 한 번도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원수들은 강하나 점점 쇠퇴했고, 하나님은 다윗을 약하나 점점 강성해지게 하셨다.
우리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의지한들, 눈에 보이는, 어떤 사람의 형편과 처지가 훨씬 우세해서 경쟁이 안 될 것 같다. 그러나 결론적인 것을 살펴보면 하나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나중에는 승리한다. 그것을 믿는 사람은 사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의뢰하고 신뢰해야 한다. 보여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에 보이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신하라.
제가 우리 교우들에게 감사히 여기는 것은, 신앙은 안 되는 것 같아 보이고 안 되는 것 같아보여도, 나중에는 잘되고, 하나님은 외길이 막혔을 때, 아홉 길을 내시는 분이라고 누차 강조하는 것을 믿고, 참고 견디며 승리를 체험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서이다.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되는 대목이 있다. 믿음의 반석 위에 선 사람은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으며, 그렇지 않은 사람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다.
3절,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
저는 이 대목이 참 눈여겨보게 된다.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부자가 되도록 하신다는 말씀일까? 일반적으로 사람은 ‘내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것을 우선순위로 삼는다. 그러나 다윗의 모습을 눈여겨보라.
사무엘7:2에 다윗은 성전을 짓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나단에게 말한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이 때, 번듯한 왕궁이 있을 때였는가? 아니다. 그 왕궁은 솔로몬 때나 가서 지어졌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는 너무나 좋은 곳에 평안히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현존하심을 상징하는 궤가 휘장 가운데 볼품없이 방치돼있다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그래서 성전을 짓겠다고 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어떻게 여기는지 생각해보라.
내 것, 내 만족, 내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만족, 하나님의 기쁨을 먼저 생각했다. 나라를 세워가려면 수많은 통치비용을 필요로 하다. 개인의 부와 재물을 채우고 사리사욕을 챙기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개인의 영도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경제와 물질이 뒷받침이 되지 못하면, 결국 그 통치기반이 연약해질 수도 있다.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한다면 그는 정말 못된 통치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이 뜻을 펼쳐가는데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도록 필요한 것을 채우시고 허락하셨다. 뭇나라들에서 조공이 들어오고, 전쟁에서 승리를 거둬 전리품을 취했다.
그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다. 하나님은 그가 재물이나 영광이나 장수함을 구하지 않고 지혜를 구했다는 것으로 기뻐하시면서 “지혜와 지식을 주실 뿐만 아니라 부와 재물과 영광도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하셨다.
우리가 신앙 속에 체험하는 신비는 계산기를 두드리면 답이 안 나오는데, 신기하게도 주님 안에서 못할 일이 없었다. 주님의 말씀대로다.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쌓아두기만 하는 사람은 진짜 부자 아니다. 하나님의 뜻과 의를 세워갈 수 있는 사람이 참부자다. 주님은 “공중의 새를 보라. 들에 핀 꽃을 보라.” 우리에게 중요한 섭리를 가르쳐주셨다. 하나님의 뜻에 합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든든한 물질의 후원자가 되어주신다.
4.
4절,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는 체험”이란 무엇일까?
이 말뜻은 분명히, 절망 중 희망이 일어나는 체험을 말하는 것이다. 위기 속에 기회가 찾아온다. 그런데, 여러분 이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고, 중요한 첩보를 접하고 두 번씩이나 군사를 일으켰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태산 같은 시련과 위기가 닥쳐오고 있었다. 그 군대와 맞선다는 것만으로도 심장은 조여옴을 느꼈다. 피하고 도망을 간다고 해도 사방에 어떤 첩자들이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사방으로 둘러싸이고 욱여쌈을 당했다. 괴로웠다.
그런데 두 번씩이나 사울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다윗의 사람들, 용사들이 말한다. “오늘 하나님께서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달리 말하면 이제 흑암의 고통을 끝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다윗은 두 번 모두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고 그 뜻에 따르지 않았다.
첫 번째 기회에서는 사울의 옷자락만 칼로 베어 왔고, 두 번째 기회에서는 사울의 창과 물병만 가지고 왔다.
기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랐던 것이다. 다윗의 용사들에게는 원수의 목숨을 빼앗고 보복할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자신의 결백을 입증할 수 있고, 화해를 청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는 체험”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단순한 희망사건이 아니라, 개인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이 일어나는 체험으로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한다.
주님은 원수를 원수로 갚지 말라고 하셨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셨다. 너무 순진한 생각은 아닐까?
‘정직한 자들’은 거짓이 없는 자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더 정확한 신앙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하나님 뜻에 바른 자들을 의미한다. 사울왕을 해하는 것과 정직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적인 시각에서 보면 말이다. 그러나 사울 왕을 해하는 것은 하나님 뜻에 어긋난다고 하는 신앙적인 눈으로 보면 그것이 곧 정직이다.
왜 그를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자라고 하는 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정직한 마음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더 큰 것이 보였다.
주님은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는 것이 순진해 보여도, 그리고 손해가 되는 것 같아 보여도, 인생의 결국을 보자면,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사람이, 결국은 잘 되게 된다. 당장은 승리하는 것 같지만 안 되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당장은 손해를 보고 안 되는 것 같지만, 잘되는 인생이다. 마치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해져 갔지만 다윗의 집은 강성해져 갔던 것처럼 말이다.
5.
5절과 9절 말씀을 보자.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로다.”
베푼 만큼 나중에 돌아오는 원리를 아는가? 지금 당장은 내게 유익이 없어보일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의 삶이 자기의 유익 때문에 사는 것은 아니다. 베풀고 나누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보람과 기쁨과 의미라는 선물을 되돌려 받는다. 그런데, 정작 내가 어려움에 처하고 궁핍해졌을 때, 여러 모로 도움이 되는 것은 세상의 이치이다.
그에게는 뼈아픈 경험이 있다. 들에서 도피생활을 할 때였다. 나발이 자신을 푸대접한 경험을 통해서,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받지 못하는 처지와 형편이 얼마나 서러운 것인지, 알았다. 나발이 나중에 다윗이 왕이 될 줄 알았다면 그렇게 했을까?
이런 경험 때문에, 누군가를 도울 수 있을 때, 베풀 수 있을 때, 나눠줄 수 있을 때, 외면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다윗이 두로 왕 히람에게 선대하였더니, 사후에 솔로몬에게 행하는 모습을 보라. 히람이 평생 다윗을 사랑하였고, 솔로몬이 성전을 지으려고 할 때, 그것을 기뻐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과 벌목할 일꾼들을 보내어 도왔다.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이었던 므비보셋의 빈궁한 형편을 외면하지 않았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결과는 어떻게 돌아왔는가? 이스라엘의 나머지 10지파, 사울 가문을 지지하는 이들의 마음을 얻었다. 이보다 더 큰 수확이 어디있겠는가?
이 모든 것의 원인은 무엇일까?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무엘이 사울 왕 때문에 낙심하고 있을 때, 그를 꾸짖으셨다. 왜 인물이 없다고 낙심하고 있고, 대체할만한 사람이 없다고 낙심하고 있는지 말이다. 이새의 가문에서 한 왕을 보았다고 말씀하시면서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다. 외모나 겉으로 드러난 능력 때문인가? 아니다. 그 중심에 하나님이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말을 바꾸면,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계명을 즐거워하는 자에게는, 결국 나중에 잘되는 역사와 일이 있음을 믿으라. 그 때문에 그는 수많은 풍파와 원수들의 위협에도 견딜 수 있었다. 6절에서 고백하고 있는 바,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억되는 사람이었다. 특별히 신천임원들에게! 그는 흉한 소문을 듣고 두려움에 빠질 만도 하지만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그의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의 대적들이 받는 보응을 마침내 보리로다.” 고백한다.
말씀을 매듭지으려고 한다. 이성복이라는 시인의 시구가 생각났다. 시대의 정신적 위기를 노래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서시의 한 대목이다.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간이식당, 늦고 헐한 저녁, 미끄러운 거리.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 인생이 이와 같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함으로 주님께 기억되는 사람들이 되는 복이 넘치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