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8일 강림절 4주

 

선한 목자이신 사랑의 하나님, 강림절 넷째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시내 곳곳에 설치된 성탄목과 거리마다 울려퍼지는 캐롤이 성탄절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때에,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기 위해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품 안에서 심신의 안위를 얻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1:37)

 

 

  1. 요셉의 연결고리

 

세상에는 자기의 고통과 신음을 삼키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풀리지 않은 비밀을 덮어두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때로는 그에 대한 의심이 갑자기 솟아올라 미치게 만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호흡을 가다듬으며 자기보다 남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이번 청문회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명백하게 밝혀야할 진실을 외면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며 비밀을 숨기는 것과는 다르다. 이들은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면 밝혀야 하는 것인데, 남보다 자기를 생각하기 때문에 밝히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치명타가 될까봐, 그를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속으로 삼키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수고와 헌신뿐인 경우가 많다.

 

오늘은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한다. 그럼으로 강림절 넷째주를 맞이하는 우리의 소명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바로 요셉이다.

 

요셉이라는 이름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다. 마리아와 정혼을 했고 남편이었다. 그가 하는 일은 목수였다. 그런데 이 이름이 갖는 의미가 무엇일까?

구약에서도 요셉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애굽으로 팔려갔다가 거기서 총리대신이 됐다. 하나님은 그를 형통하게 하셨다. 야곱의 일가(一家)가 애굽에 내려와 살게 된 계기는 요셉 때문이다. 그런데 출애굽기를 보면 이스라엘의 고통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렸다. 이스라엘의 수가 점점 많아지는 것을 염려한 나머지, 마치 난민제한 정책과 같이, 애굽에서 히브리인들 이스라엘 사람들이 많아지자, 배타적인 정책을 세운다. 아니 비참한 대책이다.

유아들을 학살했고 강물에 던지게 했다. 그리고 히브리인들에 대해 학대가 시작됐다.

 

요셉은 옛 세계와 새로운 세계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새로운 세계는 고통과 학대와 박해가 있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감동적인 ‘구속의 역사’이다.

 

그런데 신약성경인 오늘의 말씀에서, 요셉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어떻게 요셉의 족보 속에 속했는지를 성경이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요셉은 예수님 오시기 전과 후를 이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까지 하나님의 역사 속의 개입과 섭리를 ‘구속의 역사’라는 말로 인식했다. 그런데 그 보다도 더 강렬한 인식이 이것이다. ‘성육신 사건’이라는 말. 하나님이 직접적이고, 그 무엇으로 끊을 수 없는 완전한 사랑을 깨닫는 인식과 믿음을 갖게 됐다. 그 믿음은 강력한 것이다.

 

 

  1. 임마누엘의 하나님

 

하나님이 잉태됐다는 사건은, 종전에 고백하던 구속신앙과 어떻게 다른가?

간단히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구속의 역사라는 믿음은 인생을 겪고 살아보니까, 그 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회고해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신 섭리와 뜻을 깨닫고 그것이 사랑이며 구원임을 고백하는 신앙이다.

그런데 ‘성육신 사건’에 대한 믿음은 무엇인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인생 속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다. 오늘 예수가 태어남으로 열리게 되는 임마누엘의 하나님, 그 하나님이 세계 속에 들어오셨다. 얼마나 강력한 믿음인가? 온 우주의 기운을 모으면 일어나는 능력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것이다. 차원이 다른 것이다. 잠시 뒤에 말씀드리겠지만,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세상의 가장 강력한 권세와 능력까지도 이길 힘과 능력이 있다는 믿음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여담.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다시 읽고 있다. 거기서 아이히만도 신을 믿는데, 나치가 만들어낸 ‘사이비 신관’이다. 거기에도 ‘온 우주의 기운을 깨닫고 명령을 전달하는 자’이라는 기독교를 빙자한 신관이 나온다. 얼마든지 인간은 거짓 종교관 때문에, 그로 인한 세계관 때문에 죄의식이 사라지고 악마가 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여러분 성육신 사건을 통해,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개입하시고 역사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믿고, 굳센 용기를 가지시기 바란다.

  1. 두려워하는 요셉

마리아와 정혼을 한 요셉에 대해서, 성경의 소개는 짧다. 역사 속에서도 마리아에 대한 이해와 역할은 주목을 받았지만, 요셉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다. 오늘날 아버지들이 가정에서 그림자신세라고들 하는데, 그 처지와도 닮은 것은 아닐까? 아버지의 헌신과 수고는 잊고 살림과 양육의 그늘에 가려서 등한시되고 있지는 않은가?

 

요셉은 마리아와 정혼을 하고 정해진 기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리아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다. 정혼자였던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해서 이것이 어찌 된 일인지 알기에 편하게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요셉이 받았을 상처와 충격은 어땠을까? 배신감이 들지 않았을까? 모멸감은 어땠을까? 간음한 죄를 엄히 다스렸던 당시 상황에 비춰보면, 이것은 분명 심각한 것이다. 이 여인과 앞으로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19절을 보면 성경은 요셉이 이 사실을 알고 ‘가만히 끊고자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담담한 모습이다. 그래서 우리는 요셉의 고통을 쉽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20절에 보면 천사가 꿈에 나타나 요셉에게 하는 말이 있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무서워하다”(포베오)라는 말은 단순히 겁쟁이거나 용기가 없어서 드는 마음이 아니다. 자기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의,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고통을 이렇게 말해주고 있다.

우리가 살다보면, 왜 이 일이 내게 일어나는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을 직면할 때가 있다. 한 번도 예상 못한 일이었기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두렵고, 그 자체만으로도 고통스럽다. 이런 인생의 쓰라림을 겪고 있었다. 요컨대 ‘무서워하지 말아라.’ 이 말은 요셉의 고통과 괴로움을 가늠할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20절 앞부분을 보라.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이 표현 역시도 고통의 경험이다. 단순히 심사숙고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고 이해하는 고통과 맞닿아 있다. 잊으려고 해도 잊어지지 않고 계속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라 격정에 빠지지는 순간이 없는가? 사람이 그렇다. 충격적인 일,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은 괴로움을 더할 뿐이라 빨리 잊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잊으려고 해도, 지우려고 해도, 자꾸만 떠올라 괴롭힌다.

그러니까 ‘생각할 때’라는 말도, 요셉이 얼마나 어지러웠을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 의로운 사람, 요셉

 

그는 어떻게 행동하고자 했는가?

요셉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라.’,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의롭다. 가만히. 무엇을 두고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이 사실이 알려지면, 마리아가 굉장히 큰 부끄러움을 당하고 신상에 커다란 문제가 발생할 것이 자명하다. 그렇기에, 가만히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극도의 절제심(節制心)을 가진 배려였다. 성서가 그를 의롭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율법을 잘 지키고 모범적인 사람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영혼과 인생을 염려하고 걱정한 나머지 조심할 수밖에 없는 성품 말이다. 그 태도가 바로 ‘가만히’라는 말에 드러나 있다.

우리는 흔히 어려움을 만났을 때, 그 원인이 상대방 때문이라면, 나만 힘들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처벌을 받거나 당연히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돼야 마음이 편해지곤 한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자기가 깊이 상처 받은 것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비록 나에게 타격을 입혔더라도 타인의 행동을 이해하고 안타까워할 줄 안다. 적어도 요셉은 상대방의 처지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 사실이 폭로됨으로 마리아가 어떻게 될 줄 알았다. 이런 점에서도 성서는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를 엿볼 수 있다.

 

이것을 뭐라고 명명할 수 있을까? ‘율법적 의로움’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 인간적인 깊은 이해와 배려의 마음을 가진 ‘자비로운 의로움’을 지닌 사람이라면 표현이 적절할까? 그런데 아시는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는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이라는 것을 말이다. 율법적인 의로움이 아니라 자비로운 의로움, 이 지점에서 신비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하나님의 복음적인 메시지를 들을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나타났다.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믿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누가복음에서는 마리아에 대한 심경을 자세히 묘사해준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가 성령으로 잉태된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세상은 자기를 뭐라고 할 것인가? 마리아 역시 두려움에 가득 차 있다.

이런 점에서 요셉만 두렵고 힘들고 어려웠던 것이 아니다. 마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요셉에게 어떻게 설명하며 이해시킬 것인가? 어떤 말을 해도 믿을 수 없을 텐데. 난감했다.

그러니 참고 견디기를 잘했다.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1. 임마누엘이 미칠 파장

 

주의 사자는 계속해서 요셉에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 모든 일은 선지자를 통해서 예고 됐던 하나님의 말씀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사실 이 메시지 자체와 그 고백의 파장은 막강하다. 왜 그럴까?

세계의 여러 건국 신화는 나라의 시조나 영웅들이 거품이나 알에서 태어났다고 말한다. 로마를 세운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늑대젖을 먹고 자랐다고 한다. 대개 새로운 역사를 열어가는 이들은 자기 스스로 시조이기에 아버지가 없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로마제국이 통치의 편이를 위해 황제들을 신화화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옥타비아누스가 분열되었던 로마를 통일하고 명실상부한 지중해 세계의 지배자가 되자, 로마의 사제 계급들은 옥타비아누스가 어머니 아티아와 아폴론 신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다. 황제는 그로써 신의 아들이라는 호칭을 얻게 된 것이다.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 2016년 12월 11일 설교 중)

 

신화화한 권좌는 늘 횡포를 부리고 강압적이고 폭압적인 통치를 이어간다.

 

아이히만이 상부의 명령이 부당한 것과 상관없이 신의 말씀처럼 떠받들고, 유태인들을 학살했다. 기독교인들은 사이비 신관에 전도되어 히틀러에게 부역했다. 올바른 신관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우쳐주는 대목이다.

황제를 우상화하고 신격화함으로써, 폭압적인 지배와 통치를 정당화하던 세계에서, 피눈물을 흘려야 했던 사람들의 절규와 탄식이 있다.

 

그런데 임마누엘의 고백은 그 허구를 드러냈다. 황제의 신 혹은 신의 아들 황제가 아니라, 참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두려워하는 자와, 시련을 당하는 자와, 세상에서 연약한 자와 함께 하신다. 이 믿음으로 초대교인들은 박해를 이겨냈고, 시련을 극복했다.

세상 권세자가 두려운 것이 아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하신다. 세상정사의 영역에서 살아야 할 우리에게,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믿음과 임마누엘이라는 고백이 갖는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수아라는 이름의 축약형이다. 여호수아는 “여호와는 구원하심”이라는 뜻이다. 구약에서 약속의 땅이 여호수아를 통해서 성취된다. 그런데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으라는 천사의 고지 역시 중대한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렇다면 이 임마누엘의 경험은 누구의 것인가? 다른 사람의 경험들 이전에, 요셉이 먼저 한 경험이다. 하나님께서 두려워하고 있는 그와 함께 하시는 경험을 했다. 마리아와 함께 하시는 경험이기도 하다. 그 가정과 함께 하시는 경험고백이다.

오늘 이 땅에서 상처와 괴로움과 쓰라림을 경험하고 있는 이들과 함께하시는 경험이다. 죄에 억눌린 이들의 두려움 가운데 함께 하시는 경험이다. 사망의 두려움에 사로잡힌 자들과 주님이 함께 하신다. 세월호 유가족의 절규 가운데 함께 하신다. 빛을 들고 어둠을 밝히려는 이들 가운데 함께 하신다. 위협과 협박에도 용기를 내어 진실을 말하려는 자와 함께 하신다.

 

오늘 말씀을 통해, 받아들이기 두려운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을 이해하려 들고, 힘과 용기를 내려는 자에게 임마누엘이 돼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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