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1일 강림절 3주

 

작은 빛으로도 어둠을 이길 수 있도록 섭리하시는 하나님, 강림절 셋째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세상에 어둠이 깊고 절망이 심할 때, 냉담함이 심하고 절벽 같이 느껴질 때, 소망을 빛이 되신 주님을 바라보며, 따뜻한 주님의 품에 거하기를 원하며 이 자리에 나왔아오니, 주님의 사랑의 온기로 차디찬 저희의 마음을 녹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 세례요한의 전갈

세례요한이 옥에 갇혔다. 그는 좋은 사람이다. 주님은 “여자가 낳은 자중에서 세례 요한 보다 더 큰 이가 난 적이 없다.”(11)고 하셨다.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다.”(9) 이것이 그를 대하신 주님의 모습이다. 참 부러워할 만한 평가다. 그는 실로 기대가 크게 되는 사람이다. 특히 어두운 시대에 말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고 그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당연한 것 같지만, 삶의 현실과 상황에 갇히다 보면 자기 생존과 살길에 매몰되기 쉽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 나라니 뭐니 하는 것은 차일로 미루게 된다.

그런데 그는 투옥됐다. 헤롯 안티파스가 위험하고 불온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잠시 뒤에 더 자세히 살펴보자.

아무튼 그는 그럼에도 절망하지 않았다. 타락한 권력은 갇힌 자의 희망과 열의까지도 가둘 수 없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 수감되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복음을 위해 기도하고 애썼다. 가둘 수 없다.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혀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은 또 다른 사람을 세워서 역사하실 것이다. 출애굽의 역사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끝까지 진행되었던 것처럼, 바벨론이 그 위세를 잃고 무너졌고, 마침내 포로되었던 백성들이 되돌아왔던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교훈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메시아를 보내실 것이다. 이것이 믿음 있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다.

이런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자기의 할 일을 흔들림 없이 감당했던 사람이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헤롯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람들이 자기를 선지자처럼 여기지만, 그 뒤에 오실 분에 비하면 그는 스스로 그 신을 붙들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사람처럼 여겨졌다. 그 때문에 더욱 힘을 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기대하라. 사실 는 아무 것도 아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 반드시 구원이 임한다. 다만 나는 무엇인가? 그 준비와 노력을 최선을 다해 하면 된다.

옥에 갇히기 전까지 그는 이런 믿음으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외쳤다. 그리고광야에서 활동하며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었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세례요한이다.

 

 

  1. 예수, 오실이 이십니까?

그는 일찌감치 예수님을 주목하고 있었다. 메시아로 오신 분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예감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예수님은 자기보다 큰 자임을 알아보았다.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시려는 모습에 주저했으나, 겸손한 예수님의 영혼을 바라보면서 그는 감동하고 말았다. 과연 세례를 받으시고 물 위로 올라오셨을 때, 하나님의 광채를 보았다.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였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확신에 찬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요한이 흔들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2-3절 읽어보자.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주님의 하시는 일과 그에 대한 소문을 듣고 왜 이런 질문을, 사람을 보내서, 했을까?

 

주님은 요한을 남달리 생각했다. 다음에서 알 수 있듯이 실제로 그는 정말 훌륭한 인물이다. 그만한 인물을 찾기 힘들다. 그런데 이야기를 진행하기 전에 이상한 점이 있다. 주님은 그를 ‘세상에서 가장 큰 자’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가 그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신다. 위대한 자, 훌륭한 자, 혹은 뭔가 있는 자, 능력 있는 자, 남다른 자. 이것과, 지극히 작은 자, 볼품없는 자,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자, 이것이, 어떻게 비교가 가능할까? 왜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7-9절에는 광야에서 활동하는 요한을 보기 위해 찾아가는 이유에 대해 주님은 세 가지를 물으신다. 앞의 두 가지 물음은 굳이 말하자면 반대의 답을 끌어내기 위한 물음이고, 뒤의 물음은 정답을 끌어내기 위한 물음이다.

먼저 9절부터 보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그는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그러면서 구약성경의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말라기3:1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주님은 그를 선지자 이상 가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신다.

 

선지자란 시대의 부정과 비리와 부패에 대해 신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들이었다. 공의와 정의와 하나님의 신뢰를 저버린 세계의 참상을 드러냈다. 종교지도자들이 아합왕과 이세벨이 연 조찬모임이나 구국기도회에 참석해서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에게 부역하고 있을 때, 선지자는 그것에 결탁하지 않고 참신앙을 지키며 그 실상을 드러내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참담한 고통을 받는 백성들의 신음을 뒤로하고, 그것을 마비시키기 위해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는 거짓말로 세상을 미화하고 있을 때, 그 가증스러운 민낯이 드러나게 했던 사람들이다. 악을 위한 카르텔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기도 했다. 왜 임금님이 벌거벗고 거리를 행차했는가? 거짓 재단사의 농간에 모두가 한통속이었기 때문이다. 한 어린이의 순박한 말 한마디에, 그 카르텔의 실체가 드러났다. ; 지금 우리 시대도 그 카르텔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세례 요한은 썩은 권력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보자. 앞에서 이유를 설명하기로 했던 것이다. 헤롯 안티파스의 동생이었던 빌립이 독살됐다. 그 아내는 안티파스와 다시 결혼을 했다. 그리고 안티파스는 유대혈통의 명분을 얻게 됐다. 그 과정 속에 수많은 의혹이 있다. 7사건의 의혹이 있는데, 정확히는 밝혀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 비밀을 간파하고 있었다. 안티파스의 권력을 위한 음모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티파스가 그를 불온하게 여기고 옥에 가두었던 것이다.

잘못된 욕망을 가진 소수의 기득권자들이 세례요한에게 나와 세례를 받으려 할 때에도, 그는 그들의 거짓을 폭로했다. 실상은 아무것도 바뀌거나 변한 것 없이 면죄부만 얻어 더 음흉한 짓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렇게 서슴없이 외쳤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높은 도덕성을 가지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8절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연상하게 만든다. 같이 읽어보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 쉽게 연상되는 인물이 있다. 헤롯 안티파스이다. 사람들은 흔히 좋은 옷을 입고, 자기 신분을 자랑스럽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을 열망한다. 뿐만 아니라 그런 대접받기를 좋아한다. 바리새인들이 대표적이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외식하는 자들, 위선자들일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도덕적인 것 같지만, 실상은 자기의 의를 드러내며 대접받기를 좋아하는 위선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마태복음이 전하고 있는 두 개의 축제가 있는데, 굉장히 대조적이다. 헤롯 안티파스의 생일날 벌어진 사치스러운 모습과 엽기적인 행각이 사람들의 도마 위에 올랐다.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의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과 대조된다. 무리들의 불쌍함을 보시고, 주린 이들의 처지를 헤아리신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다. 한쪽에서는 막대한 부를 거머쥐고 가진 자들만의 환락이 벌어지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궁핍한 처지의 사람들이 예수 안에서 참 축제를 경험하고 있다.

 

아무튼 세례요한은 이에 비하면 검소하다 못해 금욕적인 사람이었다. 약대털 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띠를 맸다(cf3:4). 철저한 구도자의 삶을 살았다. 헤롯 안티파스와 대조적이다. 그마 만큼 도덕적이고 하나님 나라를 받들기 위해 매진했던 사람이다. 이것만 보아도 주님은 그가 하나님 나라를 받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 사람이었는지 알아보셨다.

 

 

  1. 흔들리는 갈대

여기서 다시 물음을 던져보자. 왜 세례요한은 주님의 사역과 활동을 듣고 흔들렸을까? 그리고 주님은 왜 세례요한을 ‘이런 자가 없다.’고 칭찬하시면서, 그런데 왜,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보다 크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다시 주님의 세 가지 질문으로 돌아가서, 첫 번째에 주목해보자. 7절의 말씀이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광야와 흔들리는 갈대’ 이것이 연상시키는 메시지가 있다. 여기서의 갈대는 단순히 문자적인 의미의, 눈에 보이는 갈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흔들리는 갈대’는 일반 민초들을 의미한다. 확실한 믿음을 갖지 못하는 우유부단함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 대한 암시이다. 왜냐하면 삶이 위태롭고 누구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을 믿다가 늘 이용을 당했고, 배신을 당했다. 그러기에 여전히 의구심을 가지고 망설인다. 아무리 요한이 썩은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위대하고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확신을 갖지 못하고 지조 없이 흔들릴 수 있다.

반면에 달리 생각해보면,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확신’에 차있다. 신념이 가득하다. 그런데 아시는가? 사실 이것 때문에 모순에 빠질 수 있다.

 

다시 세례요한이 어떤 사람인가 생각해보자.

사람들이 모두 부유하고 화려하고 넘치도록 윤택한 삶을 살려고 할 때, 광야에서 자기 뼈를 깎는 고통의,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그래서 그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은 더욱 빛났다. 권력이나 그 가진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선지자처럼 외치는 자였다. 불의를 드러내고 정의를 실천하며 살도록 자기 몸을 불사르는 사람이었다.

 

그가 생각했던 하나님의 나라는 어쩌면 정의, 공의, 진리, 높은 도덕적 수준을 가지고 기존질서를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망설이는 사람들은 합당치 않다. 지조없이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존재들은 설 곳이 없다. 그런데 이들이 현실적으로 없을 수 있는가? 평범하게 살아가는 민초들은 어떤 것에 확고부동한 신념을 갖기 보다는, 바람에 눕고 바람에 일어나기도 하는 존재다. 그렇다고 외면하고 제외해야 하는가?

 

세례 요한은 이런 위험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거부할 위험이다. 자기 기준에 어긋나는 사람을 배척하거나 거부할 위험이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의아해 했다. 자신은 옥에 갇혔기 때문에 어떤 활동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권력자의 치명적인 부정과 그 7가지의 비밀을 을 알고 있기에, 그의 신변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를 이어서 하나님 나라의 다리를 놓을만하다고 기대한 분은 예수다. 달리말하자면 메시야에 대한 요한 방식의 기대가 있었는데, 어긋나고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자기 신념이 강하기에 예수를 거부할 수 있는 위험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6절에서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1. 작은 자라도 크다.

그렇다면 주님이 하신 일들은 어떤 것들일까? 왜 주님은 천국에서는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크다고 말씀하셨을까, 라는 물음과 함께 생각해보자.

 

4-5을 읽어보자.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렇게 까지 말할 수 있을까 싶지만,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고 이루어 가는데, 참여 대상도 아니고 주체도 될 수 없다고 여겼는지 모른다. 이렇게 작은 자들이 부조리하고 썩어빠진 세상과 대면하고 바꾸는 데 무슨 직접적인 소용이 있을까? 그렇게 생각했는 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은 달랐다. 예수님은 이런 것과는 거리가 멀게, 사람을 조직화하지도 않고, 세를 불리지도 않았고, 혁명의 기세를 높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죄인들과 세리들과도 식사를 하시고, 여자들도 아이들도 예수님 곁에서 말씀을 듣고 대화에 참여하고 주체가 되었다.

5절에 나오는 사람들은 고침받은 자들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과 함께 일어나고, 예수님과 함께 회복되고, 예수님과 함께 용기내며, 예수님과 함께 은총입은 모든 자들을 말한다. 그 치유와 회복이야 말로 하나님 나라의 동력이다.

작은 자들, 세상에서 상처를 받으면서 일어나는 사람들, 절망하면서도 용기를 내는 사람들, 갈등하면서도 결단하는 사람들, 작은 것 때문에 욕심을 부리고 다투다가도 서로의 불쌍한 처지 때문에 이해하고 양보하는 사람들, 자기의 아픔 때문에 남을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야 말로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들이다.

 

김수영 시인의 풀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풀이 눕는다 /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 풀은 눕고 / 드디어 울었다 /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

 

웃을 수 있는 사람들만 웃고, 우는 사람들만 우는 곳 천국 아니다. 함께 울고, 함께 웃을 수 없으면 천국 아니다.

강림절 3째주, 주님은 우리가 이런 세상 만들길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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