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4일 강림절 2주

 

말씀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 강림절 둘째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삼라만상이 겨울 추위로 오그라드는 때에, 따뜻한 주님의 품에 안기고 싶어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사랑의 온기로 차디찬 저희의 마음을 녹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레는 마음에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2:29)

 

1.

2차 세계대전 때, 1945년 4월 중순의 어느 날이었다. 러시아군이 독일 베를린 코앞까지 밀어닥쳤다. 히틀러의 참모들은 베를린을 떠날 것을 권했다. 항복을 주장하는 측근들은 모두 제거된 상태였다. 베를린을 포기하자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작전상 후퇴가 아니었다. 그래서 전열을 정비해서 반전을 노리자는 것이 아니었다. 참모들 중에 패전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치 수뇌부가 베를린에 남아 있으면 러시아군의 집중포화를 면할 수 없을테고, 그렇게 되면 국민들이 위험에 처하게 될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희생만이라도 최소화해야 한다. 그것이 참모들의 얘기였다.

 

하지만 끝까지 독선에 찬 히틀러는 제안을 단칼에 잘라 버렸다. 대신 베를린 사수를 명했다. “지금 항복하면 게르만족은 절멸되고 만다.” 이것이 히틀러의 궤변이었다.

자조 섞인 목소리가 쏟아졌다. 방어선이 뚫리는 데 1시간 밖에 안 걸릴 것이 뻔했다. 예상대로 러시아군의 강력한 포격이 시작됐다. 며칠 동안 퍼부은 폭탄이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내내 연합군이 베를린에 투하한 폭탄보다 많았다. 이 포격으로 2만2000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결국 항복했다.

 

JTBC를 통해 보도된 독일의 한 장면에 가슴이 뭉클했다. 메르켈 총리의 난민정책에 대해 반감을 품은 기민당원이, 그 정책은 국가적인 큰 손실을 초래했다며, 하야를 요구했다. 난민의 처지야 딱하지만, ‘왜 우리가 짊어져야 하는가?’, 자국의 이익이 우선이기 때문에 난민들을 버려야 한다고 했다. 인도주의와 자국이익, 이 딜레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영상을 보자. (영상)

 

경제적인 이해득실로만 따질 수 없는, 그것을 뛰어넘어 지켜야할 인도주의와 평화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아름다운 기대에 눈을 뜰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어느 것을 기뻐하실까? 우리의 하나님은, 한 영혼과 생명을 천하 보다, 귀하게 여기신다. 그 믿음이 있기에,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서있다. 하나님은 생명과 안전이 위협받는 백성, 고통과 상처로 신음하는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기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빛을 발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애굽이 자국의 이익을 내세워 히브리인들을 노예로 부리고 학대하며 함부로 할 때, 그들과 함께 하셨다. 그리고 그 신음과 고통에 귀 기울이셨다.

 

히틀러의 참모들은 그래도 극미하나마 마지막 양심이랄까, 마지막까지 넘지 말아야할 선은 무엇인지 알았던 것 같다. 우월한 민족주의를 앞세워 가스실에서 유태인 600만 명을 학살했다. 세계전쟁의 비극을 불러일으켰고 악행을 자행했다. 그러나 광기를 가진 한 지도자의 그릇된 욕망에 부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국민의 생명과 안전은 지켜져야 한다는 극소한의 의식은 있었던 것 아닌가?

 

중앙일보의 이훈범 논설위원의 말이다. “게르만족은 그때 항복했기에 존재할 수 있었다. 그들은 무기 대신 평화를 들고 새로운 전성시대를 맞아 유럽사회를 평화적으로 이끌고 있다고 했다. 사라진 건 히틀러의 이름뿐이다.”

좀 더 부연설명을 하자면, 독일은 나치주의의 역사를 청산했다. 진보와 보수 정당이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큼은 합의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자신들의 죄악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역사의 교훈으로 삼았다. 감추거나 은폐하거나 왜곡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일본과 다르다. 여전히 일본은 역사를 왜곡한다. 기독교 국가답게 역사적인 과오를 반성하고 하나님 편에 서는 길을 모색했다.

 

 

16절의 말씀을 보면, 헤롯은 베들레헴과 그 근방에 있는 사내아이를 다 죽이라고 명령한다. 동방박사들이 별의 징조를 보고, 예루살렘에 왔다. 메시야로 태어난 분(아기 예수였다), 그분께 경배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손에는 왕에 대한 의전에 합당한 보물들이 들려 있었다. 황금, 유향, 몰약! 헤롯왕가와 그에 결탁하고 모든 독점적인 사회적 지위와 권리를 누리고 있던 이들은 크게 요동했다.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2:3) 헤롯왕과 대제사장으로 대표되는 종교지도자, 그리고 서기관들을 비롯한 당국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공동정범이나 마찬가지였다.

헤롯은 자기도 경배하겠다고, 찾게 되거든 알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인간적인 술수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능가하지 못한다. 꿈에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듣고 다른 길로 돌아갔다.

이에 속은 줄 알게 된 헤롯은 유아살해를 명령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서 생각할 게 있다. 자칫하면 아기 예수의 탄생이 비극의 발단인 것처럼 인식될 수 있다. 두 살도 되지 않은 무고한 유아들이 살해됐다. 아기 예수만 애굽으로 피신함으로 살아남았다. 다른 어미들은 자식이 살육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17-18절은 그 슬픔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라헬의 애곡 소리가 들려오고, 어느 것으로도 위로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왜 이 땅 가운데 메시야를 보내시는가?

 

‘유아살해’는 국민을 대하는 지배자의 총체적인 의식을 드러내준다. 거기에는 자비란 조금도 없다. 생명에 대해 무감각하고 인식수준이 낮은 지도자가 얼마나 위험하고 사람들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는지 아는가? 히틀러를 보라. 뿐만 아니라 세상을 불행하게 만들뿐더러 얼어붙게 만들고 황무하게 만든다.

 

라헬의 애곡소리가 두렵지 않게 느껴지는 지도자는, 자신의 이미지나 홍보를 위해 가식적으로 눈물을 흘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할 수 없다.

다니엘서는 이러한 세계상에 대해서 짐승이 다스리는 것과 매한가지라고 전해주고 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짐승이 다스리는 끔찍한 세계상을 예고하고 있다. 견디기 힘들만큼 고통스럽고 잔인한 세계가 벌어지고 있을 때, 요한은 일곱인으로 봉인된 두루마리를 본다. 아무도 그 봉인을 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울고 있을 때, 어린양 되신 주님이 그 일곱인을 떼시며 보여주셨다. 봉인이 하나씩 열릴 때마다 짐승이 다스리는 세계에 일어날 재앙들이 담겨 있다. 전쟁, 확전, 식량배급, 반복되는 흉년, 전염병…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들이 짐승의 통치하에서 벌어진다.

그렇기에 다니엘서의 장차 다가올 미래에 대한 경고는 이런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공의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일을 믿음으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지켜내지 못한다면, 오히려 용납하고 무력하게 타협하며 동화되고 나면, 넷째 짐승의 출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이에 내가 넷째 짐승에 관하여 확실히 알고자 하였으니, 곧 그것은 모든 짐승과 달라서 심히 무섭더라. 그 이는 쇠요, 그 발톱은 놋이니 먹고 부서뜨리고 나머지는 발로 밟았으며…” 무쇠와 같은 이빨로 물어뜯기고, 놋과 같은 발톱으로 할큄을 당하고 억눌릴 것이다.

 

애굽의 바로왕이 이스라엘을 괴롭히더니 노골적으로 학대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유아살해를 명령했다. 그런데 여기서 모세가 살아남는다. 그가 특별히 예정된 운명을 타고 태어나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감춰두신 것이다. 모세 역시 나일강가에 던져져야 하는 운명이었지만, 하나님은 애굽의 공주를 통해서 그를 건져내어 왕궁에서 키우게 하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이 땅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을 뿐만 아니라 사악한 통치자의 광포한 손아귀에서, 감추시고 보호하시고 건져주신다. 예수님 때문에 천국의 비밀을 알게 되고, 생명과 평화의 씨앗을 심게 되고 희망의 빛을 간직하며, 의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계획과 섭리에 우리가 눈뜨기를 바라신다. 이런 그리스도 예수의 오심을 소망하며 기다리기를 원하신다.

 

요한이 본 미래의 소식은 무엇이었던가? “이에 한 힘 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이르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바벨론은 던져져 비참하게 될 것이다. 악은 망한다. 무너진다.

 

4

3.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헤롯 왕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몇몇에 집중해보자. 2:4에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었다. 그들은 어떤 역할을 한 사람인가? 단정적을 말할 수는 없지만, 당시 역사적인 배경이 말해주고 있는 상황속에서 해석을 해보면, 부역자나 다름없다.

헤롯은 지배욕이 강한 인물이었다. 하스몬왕가의 정적을 제거하고 왕이 됐다. 어떤 면에서 갈릴리는 그의 정치적 고향이라고 볼 수 있다. 갈릴리로부터 폭력투쟁을 일으켜 결국 예루살렘으로 입성했다. 왕권을 차지했따. 물론 정치적 야욕이 있던 사람이 그를 도와준 백성들에게 보답할리 만무하다. 단순히 이용대상에 불과했다. 대신에 그 통치기반을 공고히 해갔다.

그는 ‘신의 한 수’라고 불릴 만큼 정치적 술수가 뛰어날지는 모르지만, 사실은 백성, 국민들에게 엄청난 고통과 상처를 안겨주는 인물이었다. 로마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로마황제의 이름을 딴 ‘가이사랴’는 신도시를 막대한 군사용도의 부지와 함께 제공했다. 이곳은 로마의 중요한 안보전략 요충지였다. 그에 필요한 막대한 재정과 노동력은, 물론 가여운 백성들, 힘없고 불쌍한 백성들의 몫이었다.

거기에 부역했던 사람들이 누구일까? 오늘 말씀에서 헤롯이 자문하기 위해 부른 인물들이다.

 

헤롯왕이 어떤 인물인지 몰라서, 유대 베들레헴에 대한 언급을 했을까? 이후에 그곳에 어떤 일들이 불어닥칠지 몰라서 그랬을까? 물론 헤롯왕의 유아살해 지시 명령에 얼마나 관여했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그런데 그들은 메시야의 탄생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기다리고 준비해야 하는 사람들 아니었던가? 물론 메시야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다고 해도 말이다. 오해라는 것은 사망권세, 죄와 어둠에서 건져주실 메시야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래 뜻과 다르게 다윗왕조의 명성을 되찾게 만들 정치적 메시야로 이해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랬다고 하더라도 메시야의 나심에 관심을 갖고 기민한 반응을 해야하는 이들이 오히려 헤롯왕의 편에 서있다는 점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게다가 끔찍한 일의 방조자로 서 있었다.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강림절 두 번째 주를 맞이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준비의 시간을 가져야 할까? 죄악된 역사의 방조자? 우리도 모르게 하나님의 뜻과 불의를 구분하지 못하고 세상편에서 부역하고 있는 공모자?

자, 우리는 오늘 어느 편에 설 것인가, 다시 한 번 돌아볼 수 있기를 빈다. 하나님 편에 설 건가? 사람의 위협과 그 힘 앞에 설 것인가?

이런 것들을 돌아보며, 참 그리스도의 소망을 품고 희망의 빛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게 되길 축원한다.

 

비슷한 상황에서 다르게 행동한 사람들이 있다. 히브리의 산파들이다. 애굽 왕이 부아와 십브라에게 아기들을 받을 때, 남자 아이는 죽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왕의 명령을 어겼을 때, 목에 칼이 들어올 수도 있었다. 하나님이 두려웠다. 또 그들의 양심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갓태어난 생명을 통해 하나님을 보았다.

하나님은 담대한 믿음의 행동과 용기에, 가만히 있지 않으시는 분이다. 출애굽기1장21을 보면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여러분이 바로 그 주님의 최후승리와 영광의 은총을 누리는 복된 사람들이다.

 

애굽의 아홉 번째 재앙은 흑암이었다. 촛불집회의 퍼포먼스를 보면서,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이 시대에도 엄중하게 경고하시는 것만 같다. 그러나 복음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소망의 빛이 믿는 이들의 가슴가슴 마다 밝혀지며, 세상을 온전히 불 밝히기를 바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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