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27일 강림절 1주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독생자를 보내주신 사랑의 하나님, 강림절 첫째 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노란 은행잎이 거리를 덮으며 겨울이 왔음을 알리는 계절에, 따뜻한 주님의 품에 지친 몸과 영혼을 맡기고자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품안에서 참 평화를 누리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 대림절기
오늘부터 4주간 대림절이 시작된다. 교회력은 예수님의 탄생부터 다시 오심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1년이라는 시간에 압축해놓았다. 신앙인들은 그 교회력과 절기에 따라 1년을 살아간다. 마치 인생이 순례의 여정인 것처럼 말이다. 대림절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절기이다. 그러니까 교회력으로서는 오늘부터가 ‘시작’이 되는 것이다.
이때만 되면, 저는 이사야의 말씀을 듣는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게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40:3)
공관복음서도 일제히 이 말씀을 전하고 있다.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받고,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자.’고 선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에 앞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고, 평탄하게 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대림절 기간 동안, 우리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따뜻한 소망을 품을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평탄케 하는 일들이 여러분 삶 속에 일어나길 바란다. 그리스도를 맞을 준비가 있기를 주님이 바라신다.
- 불신의 시대
박경리의 작품 중, ‘불신 시대’가 떠올랐다.
여주인공은 진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다. 6.25동란 때, 남편을 잃었다. 9.28 서울수복 때였다. 연합군의 엄청난 폭격이 있었다. 남편이 죽기 전에 경인도로에서 본 장면을 들려줬다. 북한 소년병의 비참한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창자가 터지고 물 한 모금을 애원하다가 어머니를 그리며 죽었다. 주인공은 이 장면이 남편죽음의 예고와 같았다고 말한다. 작가는 한 시대의 비극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여주인공 진영이 어느 날 이 장면을 꿈으로 꾸었다. 다음날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놀다가 넘어져서, 다쳤다. 죽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어이 없이 죽고 말았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말이다. 돌팔이 의사들이 득실거리던 때였고, 심지어 동네 양아치 같은 사람도 차명으로 병원을 열어, 간호사 한 명 데려다가 불법영업을 하던 때였다. 병원 의사는 수술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고, 대충 수술했다. 돈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녀를 잃은 상처와 아픔을 무엇으로도 달랠 길이 없었다. 남편의 죽음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해맑은 아이의 모습을 어떻게 잊겠는가? 주인공의 고통을 잠시 생각해보라.
진영은 믿고 의지할 데를 찾는다. 갈원동 아주머니란 분이 있었는데, 천주교 신자였다. 그의 오랜 권유로, ‘천국에서 잘 있을 거라.’ 믿으며 마지못해 성당에 따라갔다. 남의 돈을 빌려 가면 잘 갚지 않았는데, 그날따라 어쩐 일인지, 일부를 찔끔 가지고 와서 갚으며, 성당으로 안내했다. 성당 입구에서 신발을 갈아 신어야 했다. 누군가 미사를 드리는 동안 멀쩡한 신발을 훔쳐가더라는 말이 생각났다. 성스러운 곳에서 이런 불경스런 생각을 했다니, 자기 아들의 일도 있고 해서, 두려운 마음으로 그 생각을 지웠다.
미사를 드리면서 답답한 마음이 올라왔다. 천국에 있더라도 거기에 엄마가 없으면 아들이 엄마 보고 싶어 하고 외로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가슴이 메여,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먼저 성당에서 빠져나왔다.
얼마 후, 시승(시주를 걷는 스님)이 집 앞에서 사람을 불렀다. 웬일일까? 시주받은 쌀을 되팔기 위해서였다. 그의 어머니가 스님과 흥정을 하며, 동시에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시승은 절이 가까이에 있으니, 와서, 아들을 위한 천도제를 드리라고 했다.
여주인공은 시주한 쌀을 따로 돈으로 바꿔, 사리사욕을 챙기는 시승의 모습이 미덥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가 ‘사람을 보고 절에 가니? 부처님 보고 절에 가는 거지.’ 차라리 성당보다 절이 익숙하니 절을 믿어보기로 하자고 해서 그러기로 했다.
아이를 위한 천도제를 드리고자 절을 찾았다. 그런데 굉장히 큰 실망을 한다. 절에서 중들이, 사람의 가진 것이나 행색을 보고 그 사람을 대하는 것이다. 진영과 어머니에 대한 태도도 건성이었다. 먼저 왔는데도, 천도제를 드려줄 생각은 않고 꺼려했다. 경찰서장의 부인 건부터 해야 한다고 미뤘다. 행세 꽤나 하는 사람에게는 지극정성으로 대하는데, 자기에게는 문전박대하듯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후딱 해치우기 식이었다. 시주금액이 적은 것을 보자 제사음식을 살짝살짝 덜어냈다. ‘이걸 스님더러 먹으라고, 어떻게 할 수 있냐?’고 투정을 했다. 아들에 대한 정성이 적은 것이라며 그럴싸한 말로 핀잔까지 주었다. 아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스님을 위한 것이라고, 노골적인 본색이 드러나자, 위패를 가지고 나와 불사른다.
동란을 거치고 폐허와 혼돈이 가득한 때에, 상처와 아픔을 가진 사회적 약자는 어디에 발 디디며 서있을 수 있을까? 누구를 믿고 신뢰하며 살 수 있는지, 불신의 시대는 아무데도 마음을 두지 못하게 하고, 현기증을 느끼게 한다. 심지어 종교까지도 빛을 잃고,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속은 차갑다. 이것이 작가가 보여주고 있는 우리나라 50-60년 대의 풍경이었다.
박경리는 이런 말로, 마무리를 지으면서 독자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려고 한다.
“내게는 다만 쓰라린 추억이 남아 있을 뿐이다. 무참히 죽어버린 추억이 남아있을 뿐이다.”
주인공이 이렇게 자신의 생을 관조하다가, 매몰스럽게도 맑은 겨울 하늘을 보다가 문득, 이런 깨달음으로 용기를 낸다.
“그렇지. 내게는 아직 생명이 남아있었지. 항거할 수 있는 생명이.”
혼돈, 불신, 거짓, 어둠에 항거할 수 있는 생명이 있는 한, 결코 이런 것들이 빛을, 진실을, 신실함을, 질서를 이길 수 없다.
교회에서 우리가 쉽게 사용하는 언어를 세상적인 언어로 번역을 하고 바꾼다면, 바로 이것 아니겠는가?
- 두 렙돈을 넣은 과부
오늘의 말씀을 보자. 오늘 말씀을 흔히 헌금생활과 관련된 교훈의 말씀을 전할 때, 듣고 했던 말씀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보셨는가? 왜 성서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과 종말에 관한 기사를 연결하고 있는지 말이다.
한 남루해 보이는 여인이 헌금함에 헌금을 넣었다. 두 렙돈이었다. 렙돈은 가장 작은 화폐단위의 동전이다. 주님은 그 모습을 보시고 감동하셨다.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넣은 것이라고 하셨다. 다른 사람들은 풍족한 중에 넣었지만, 이 여인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고 말씀하셨다.
물론 이 말씀은 헌금하는 이의 진정성과 자발성을 교훈으로 삼을 수 있는 말씀이다. 헌금하는 액수의 상대적인 가치를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헌금을 드렸다는 데 방점이 있는 듯하고, 없더라도 드리는 정성을 칭찬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저에게는 이 말씀이 달리 들어온다. ‘불신시대’라는 작품에 견주어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과부는 어떤 인생의 사연이 있었을까? 모른다. 하지만 과부라는 처지만 봐도 그에게는 온통 남모르는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동란을 배경으로 쓰여진 [불신시대] 속의 여주인공과 이 과부의 삶의 자리는 비슷할지도 모른다. 성당에 마음의 위로를 받으려고 했고, 절에 가서 시주를 드리며 천도제라도 드려야 하는 진영의 마음처럼 그에게는 어떤 한 맺힌 눈물과 소망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당시의 성전체제나 세태는 그를 어떻게 바라봤을까? 어떻게 대했을까?
남루한 과부와 혼돈과 불신의 시대. 주님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보시지 않으셨다. 그 여인의 모습에서 한 시대의 아픔을 보셨고 앞으로 더 크게 불어닥칠 환난과 고통을 보셨다. 뿐만 아니라 한 여인의 실존과 그의 아픔을 관통하고 있는 고통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고 계셨다. 그리고 성전에 대한 참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신다.
확인해보라. 곧바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난리와 소란이 일어나고, 전쟁, 지진, 기근, 전염병을 비롯한 비극적인 세상의 징조가 있을 것을 예고하신다.
어떤 사람들이 미석(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세워진 성전에 시선이 팔렸을 때, 주님은 이 과부의 모습을 바라보고 계시다. 과연 성전은 이 ‘과부’를 품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을까?
종교의 순수성과 그 참된 실천은 사라지고 타락하고 나면, 평화와 생명은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된다. 그것은 불쌍한 사람들이나 지지리 복도 없고 능력도 없는 사람에게만 닥치는 일이라 생각될지도 모른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은 화를 자초하게 되고 비극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세상이 지탱하고 있는 한은 아무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둑이 터지듯 무너지고 나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큰 비극과 불행이 닥친다. 사실 오늘 우리의 현실도 그와 같다.
고통의 실체란 무엇일까? 주님께서 아신 만큼 우리가 다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아픔과 상처가 추억과 기억으로 남아있다.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는 경험, 그리고 안심하고 믿고 의지할 데가 없다. 위로받지 못했고, 희망과 용기를 되찾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 불신과 차별과 냉대는 그 본연의 생명이 반생명에 항거하는 힘까지 가두고 있었다.
그래서 34-36절은 항상 기도하며 깨어있으라는 말씀을 주신다.
34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 성전과 교회
오늘 교회는 사람들의 설 땅이 되고 있는가? 차별이나 편견 없이 예수의 눈으로 한 영혼을 바라보고 있는가? 성도들은 돈에 대한 욕심이나 사리사욕을 버리고 신뢰를 주고 있는가?
주님은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지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새 성전을 삼 일만에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 은혜가 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세워진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기 위해 흘렸던 피맺힌 눈물들이 보석이 되어 부활하신 주님의 몸으로 세워지는 것이다. 그것이 간증이고 신앙고백이다.
상처와 아픔이 있는가? 눈물이 있는가? 인생의 괴로움이 있는가? 위기와 절망과 고통이 있는가? 두려움과 불안과 염려가 있는가? 그러나 굴복하지 않고 담대하게, 주님께서 주시는 힘과 용기를 다해 이기고 승리하며 눈물들은 보석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 주님의 품이라는 성전에서 교회가 되자.
이렇게 본다면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은 단순히 동전이었다고 생각하는가? 혹은 단순히 생활비 전부였다고 생각하는가? 자신의 절박한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기 위해 드릴 수밖에 없는 간절함은 아니었을까? 작지만 그 모든 것을 드려서라도 지키고 싶은 것이 있었던 소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람들이 차별과 냉대와 외면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뛰어넘을 수밖에 없는 절박함 말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절박함을 아신다. 고의 고난의 상처와 아픔이 무엇인지 아신다. 위로받기를 바라신다. 주님 안에서 반생명에 항거할 수 있는 생명을 받아 분연히 일어나길 바라신다. 오늘의 고난이 내일의 영광이 될 것을 믿고 주님 품에서 성전을 체험하기를 바라신다.
주님을 오늘 마음을 새롭게 하고 주님 맞을 준비를 하길 바라신다. 죽음과 고난과 혼란과 비극에 항거하지 못했던 생명이, 어둠과 사망을 이기고 승리하는 주님의 능력으로 변화되기를 바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