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20일, 추수감사주일, 왕국절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오곡이 자라게 하시고, 따뜻한 햇볕과 은은한 바람으로 백과를 무르익게 하신 사랑의 하나님, 뜻 깊은 추수감사절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내리시는 이슬과 비, 그리고 햇빛을 먹으면서 자란 열매들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감사의 절기에, 한 해 동안 지켜 주신 주님의 사랑을 감사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저희들이 드리는 감사의 찬송과 예물을 기쁘게 받아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역대하7:14)

 

 

  1. 영원에 멈춰서다

추수감사절, 하나님 앞에 나온 여러분 모두를 환영하고 축복한다. 시국이 여전히 혼란스럽다. 얼마나 힘드신가?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 눈이 어지럽기까지 하다. 이 와중에 추수감사의 목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나왔다.

 

제가 느끼기에, 지난 한 주간 가을의 정취는 정말 극치였던 것 같다. 이 동네와 주변에서 말이다. 풍경은 형형색색 아름다웠고, 길가에 떨어진 낙엽 하나하나, 그 어느 것도 아름답지 않은 게 없었다. 공원을 운동 삼아 빠르게 걷는 아주머니들의 발걸음을 보면서, 저는 ‘시간’을 보았다.

 

카라조바의 그림이 떠오른다. 자, 이 그림이다. 잠시 감상하라. 이 그림의 주제는 ‘영원’이다.

 

바구니 안에는 과일과 채소가 있다. 장식용 나뭇가지나 잎과 함께 시들어 있다. 보통 아주 싱싱한 것을 대상으로 그릴 법한데, 여기에서는 말라비틀어진 모습도 보이고, 사과에는 썩은 부분도 있다. 무엇이 느껴지는가?

점차 시들어가고 말라가는 어느 한 순간을, 카라조바는 포착하고 있다.

왜 주제가 영원일까? 보통 영원은 성화를 통해서 표현해왔는데, 이 그림은 정물화를 통해서 담아냈다. 아마도 성화를 벗어나서 영원을 주제로 담고 있는 그림은 이것이 최초일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시들어 있는 정물일까? 젊은, 푸르름, 싱싱함. 그것을 영원으로 담아내면 좋을 것 같은데 말이다.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세월, 그 어느 한 순간을 포착해서 던지는 카라조바의 메시지를 이런 것 같다. 우리 일상 속에 나타난 평범한 것들의 순간을 바라보라고 말이다. 싱싱할 때는 모르는데, 시들고 나서야, ‘어떤 순간들’에 대한 소중함이 생각나고 아쉬움 속에 영원함에 대한 바람이 생겨난다. 시간이 더 흐르고 늦기 전에 ‘순간’을 소중함으로 간직하라는 미학적 메시지는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세상이 아무리 혼란스럽고 시끄러워도,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평범한 일상들을 사랑함으로써, 영원에 잇대어, 중심을 바로잡을 수 있기를, 주님께서 바라신다.

 

지난주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급성뇌출혈이 발생한 버스운전기사가 차를 안전하게 갓길에 세우고 쓰러졌다. 승객들은 운전기사에게 고마워했다. 그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가 빨리 자신의 상태를 자각했기에망정이지, 조금만 더 운전했더라면 자칫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세상을 운행하고 지배하는 이는 사람인 것 같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아무리 천하를 호령하는 권세일지라도 성경은 뭐라고 단언하는가? 이사야 40장을 보면,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고 전한다. 야고보서는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흩어지는 안개”(약4:14)라고 선언한다.

이사야에게 이 진실로 위로를 삼으라고 말씀한다. 왜인가?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말씀하셨다.

같은 맥락에서 성경은 “너희는 신이 아닌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담대하라고 부탁하신다. 주님은 “너희는 참새보다 귀하다.”고 하셨다. 바꿔 말하면 아무리 세상의 권력자가 횡포를 부리고 개나 돼지 취급을 한다고 하더라도, “너희는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이, 주님의 말씀이자 개인이 새겨야할 명언이다. 그러므로 힘과 용기를 내라.

 

 

  1. 감사로 초대된 고난받는 사람들.

저는 오늘 만큼은 편파적인 말씀을 전하려고 한다. 좌우의 이념이나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말씀이 아니라 일부를 위한 말씀이라는 측면에서 편파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음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와는 상관없는 말씀이라고 여겨도 좋다. 내가 들어야 할 말씀이 아니라 저사람이 들어야 할 말씀이라고 여겨도 좋다.

그렇다면 오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청자들은 누구인가?

 

인생이 광야와 같다고 여기는 사람은 들으라. 그 길 위에서 탈진하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은 들으라. 안정된 삶이 없는 사람도 들으라. 고난과 어려운 삶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좋다. 강자에게 횡포를 당하거나 서러움을 당한 사람, 그래서 창피함과 굴욕감을 느꼈던 사람도 빠지지 않는다. 미래에 대한 소망이나 희망을 찾기 어려운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함이 마땅하지만, 그런데 오늘의 말씀은 ‘감사로 초대된 고난받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가가양가’의 성적으로, 반에서 꼴지를 했는데도 명문대에 장학금을 받고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드리는 감사와 상관있는 말씀이 아니다. 돈을 가진 부모를 만난 것도 실력이고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기의 처지를 감가하게 여기는 사람과 상관있는 말씀도 아니다.

열심히 하고 싶은데도 여건이 안 되고, 여건이 된다고 하더라도 등록금 마련이 어려워, 알바를 하면서 고된 꿈을 키우는 이에게 해당하는 말씀이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올라갔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처지와 형편이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도덕적이고 보란듯 살게 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했다. 그러나 세리는 그렇지 못했다.

사회적으로, 세상적으로 성공을 하거나 좋은 처지와 형편에 있어 누리는 것이 많음으로 감사하다고 말할지는 모르지만, 오늘 말씀에서 감사와 기쁨을 누릴 대상은 그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렇지 못해서, 감사할 조건을 찾기 어렵고 힘겹게 살아온 사람들이다.

 

5절을 보면, 조상은 ‘방랑’했던 하류층 사람이다. 6절을 보면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는 학대를 당하고 중노동을 해야 했다. 7절을 보면, 당사자들은 어떤가? 고통과 신음과 압제를 당했다.

 

이들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감사의 제목은 무엇인가? 들어보자.

 

 

  1. 약속에 감사하라.

첫째, 하나님은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실 땅’을 약속하셨다. 삶의 기반이 될 터전이 주어진다는 약속이다. 믿음으로 보자면 감사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약속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체험을 전제로 하고 있다. 겪어보고 돌아보니 깨달은 것이다.

 

신명기1:31)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신명기8: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출애굽의 하나님, 광야를 인도하신 하나님! 인간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고, 길이 없어보였지만, 오늘까지 인도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그리고 현존하고 계신 하나님께서 약속도 이루어주실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라. 8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여러분의 삶을 인도하고 계시지 않았는가?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동일하시다.

 

제가 좋아하는, 정약용 선생님의 편지가 있다. 조카였던 윤종심에게 보내는 편지다.

 

정월 초하룻날 가나한 선비가 앉아서 일 년 먹을 양식을 따져보면 진실로 아마득하다. 생각으로는 하루도 못 가 굶주림을 면치 못할 것만 같다. 하지만 섣달 그믐날이 되어도 여전히 여덟 식구가 모두 살아남아 한 사람도 축나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되짚어 봐도 어찌된 셈인지 알 수가 없다. 너는 이 이치를 능히 알겠느냐? 누에가 껍질을 까고 나오면 뽕잎이 움터 나온다. 갓난아이가 어머니 태에서 나와 한번 울음소리를 내면 어미의 젖이 벌써 주르륵 흘러내린다. 양식을 또 어찌 근심하겠느냐? 네가 비록 가난해도 근심하지 마라.”

 

작년에 여름 수련회로 흥월교회를 찾았다. 앞마당에서 본 것이 있다. 거기에 깔린 보도블럭. 그거에는 라브리스의 순례자의 길이라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림)

 

어찌 사나, 염려, 근심, 걱정하며 살지만 사실 뒤돌아보면 다 살아왔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이 누구신가?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은 약속을 주신다. 여러분 그것까지 믿고 감사하라.

 

 

  1. 우리의 소산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두 번째는, 소산물을 거두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2). 이것 자체가 감사의 제목이기도 하다. 10절을 보라.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우리가 그 마음으로 제단을 장식했다.

 

추수하는 내용의 질이나 양에 대한 문제 때문이 아니다. 신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이 극한 어려움을 견뎌내고 이듬해 추수한 소산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고백이었다.

자기의 수고와 고된 노동의 대가를 통치자나 지배자에게 모두 바쳐야 했던 과거와 비교해보면, 자기의 것을 하나님께 가져와 드릴 수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가?

지금 우리의 삶을 숙고해보면,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이 감사의 대상이다. 우리가 사는 집, 비록 허름해도. 우리가 입는 의복, 비록 화려하지 못해도. 가족, 비록 단촐하다고 하더라도.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소중하고 고마운 것이다.

 

오늘 대한민국의 사태는 모든 것을 되돌아보게 만드는데, 그 중에서 정유라에게 쓴 대자보가 기억난다.

 

‘어디에선가 말을 타고 있을 너(정유라)에게’, 그가 부모 잘 만나서 그런 거라고 말할는지는 모르지만, 대자보를 쓴 학생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정당한 노력을 비웃는 편법과 그에 익숙해짐에 따라 자연스레 얻어진 무능, 그게 어떻게 좋고 부러운 건지 모르겠다.” 오히려 그에게 고맙다고 역설적으로 말한다.

 

네 덕분에 그 동안의 내 노력들이 얼마나 빛나는 것인지, 그 노력이 모이고 쌓인 지금의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실감이 나. 비록 학점이 너보다 낮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너보다 훨씬 당당해. , 그리고 이런 상황을 만든 부당한 사람들에게 그저 굴복하는 게 아니라, 내 벗들과 함께 맞설 수 있어서 더더욱 기쁘고 자랑스러워. 아마 너는 앞으로도 이런 경험은 할 수 없을거라니. 안타깝다.”

 

소산물을 거두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에는 바로 이런 점을 깨닫게 하는 것 아닌가?

‘우리의 성실과 노력의 정당한 결실에 대한 것 자체가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것인지’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하나님 앞에 소산의 첫 열매를 가져오라는 말씀이 명령이자 의무인 것 같지만,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보호날개 아래 살게 하심에 대한 감사이다.

 

  1. 감사를 통한 아름다운 영혼.

11절 말씀을 떠 올리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다. 인간이 얼마든지 물질과 권력의 하수인이 되고 괴물로 변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

 

100만이 모였다고 하는 집회에서 촛불 든 시민이 걷는 모습은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6:24)_그림) 마치 아모스를 통해서 선포된 말씀이 울리는 듯 했다. 사자와 어린양이 뛰노는 세상을 꿈꿨던 이사야의 비전도 그려진다.

그런데 그 와중에 수능이 있었는데, 개그맨 김대범 씨가 올린 글 보셨는가?

한 수험생이 시험도중에 자신이 가져온 도시락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그리고 규정대로 퇴실조치 됐다. 재수생이었는데, 엄마가 깜박하고 도시락에 핸드폰을 넣은 거다. 그 재수생의 마음씨도 참 예뻤다. 자신 때문에 시험에 방해가 된 다른 수험생들에게 죄송하다는 사과글을 올렸다. 김대범 씨가 이 소식을 듣고 장학금이라도 전달하고자, 그 학생을 찾는다는 것이었다.

사람은 얼마든지 악마가 될 수도 있지만, 천사도 될 수 있다. 그 영혼이 추해질 수도 있지만, 아름답게도 될 수 있다.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영혼이 아름답게 될 때는 언제인가? 하나님 앞에 보이는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나누고 베풀고 섬길 때 아닐까?

오늘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 말씀에서 감사를 깨닫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이 바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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