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13일 성령강림절 후 26주
끊임없는 계절의 변화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으로 피조물을 인도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가 주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엉성해진 길 옆 가로수의 달랑거리는 잎새가 가을이 슬그머니 그 문을 닫으려함을 알려주는 때에, 주님께서 주시는 새 희망을 가슴에 품고자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어루만지심으로 새로운 용기를 얻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골1;23)
- ‘형통함’이라는 키워드
하나님께서 요셉을 형통하게 하셨는데, 이유가 뭘까? 아시는 대로, 애굽에 팔려갔다.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이었다. 거기서 요셉이 형통함을 얻는다. 요셉을 통해 하는 일이라면 모든 게 원활했다. 그것을 눈여겨 본 보디발은 가정총무로 삼는다. 교활한 보디발의 아내 때문에 감옥에 갇혔다. 그런데 거기에서도 요셉은 인정을 받고 형통했다.
이유가 뭘까? 사무엘이 사울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새의 아들 중에 한 왕을 보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가서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다. 다윗의 무엇을 보고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기억이 나는가?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심을 보았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다. 이것이 어떻게 증거 되는가? 골리앗과 맞서서 싸울 때에도 그는 담대했고, 이겼다. “너는 칼과 창으로 나오나,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노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용기 있게 달려가는 사람을 이길 수 있을까? 두려워할 것 없는 사람을 결코 이길 수 없다.
요셉이 형통함을 누린 데에는 다윗처럼 어떤 핵심적인 원리가 있는 것 아닐까? 기도를 많이 했을까? 율법을 잘 지켰을까?
운이 좋은 것과 형통함의 차이를 다시 한 번 주목해보자. 운이 좋은 것은 모든 여건이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맞춰져 있을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런데 형통함은 조건과 상황이 그렇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오히려 자기와 상황에 유리하도록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이다.
형통함이라는 키워드에 주목하는 이유가 있다. 요즘 우리 사회가 참 어렵다. 어제 광화문에서 시민들이 든 촛불이 희망의 횃불처럼 밝혀졌다고 말한다. 87년 민주화항쟁 이후 최고의 명예혁명으로 기록될 것이라는 평가들이 쏟아졌다. 그런데 저는, 찬물을 끼얹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 되는 것을 보면서- 그 불은 언제든 꺼져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죄성 때문에 말이다.
더 실질적이고 중요한 것이 있다. 여러분의 삶 속에 형통함의 촛불이 타오르길 바란다. 정말 하나님께 형통의 복을 받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어떻게 주변을 이롭게 불 밝힐 수 있겠는가? 이기적이거나 기복적이 돼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 형통하게 하시다.
자, 형통하게 하심의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을 찾아보고 연구하다가 깨달은 것이 있다. 그 이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뭔가 하면, ‘형통하게 하셨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형통하게 하신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창39:2),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을 보며,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3),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또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23)
그가 ‘요셉이어서’가 아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고 비천한 데에 처한 이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은 불쌍한 이를 돌보신다. 세상이 버리고 형제들에게까지 버림받은 이와 함께 하신다. 여러분과 함께 하심으로 형통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셨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형통했다. 그리고 그가 있는 상황 환경, 삶의 자리가 덩달아 복받았다. 여러분이 그렇게 되는 것이 곧 세상에 복음의 불을 밝히는 것이다.
그 와중에, 제게 들려온 말씀은 풀무불에 던져져도 털끝 하나 상하지 않은 다니엘의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다니엘서의 시대배경은 주전 6세기, 이스라엘의 포로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쓰인 것은 주전 2세기 중엽이다. 마치 ‘명량’이라는 영화가 임진왜란 때 일어났지만, 2014년에 만들어져서 사람들에게 새로운 감동과 메시지를 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주전 2세기 중엽, 이스라엘은 셀류쿠스 왕조의 임금 안토니우스 에피파네스 4세 치하에 있으면서 큰 시련을 당했다.
그 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자. 에피파네스 4세 이전의 왕이 필로파토르였다. 그는 토색이나 일삼았던 위인이다. 자기의 오른팔 같았던 헬리오도로스를 총리로 앉히고 전횡을 일삼게 했다. 그런데도 그 막대한 자금들이 어디로 갔는지, 부채가 심해서, 로마와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배상하기로 한 전쟁보상금을 갚지 못하고 굉장히 극심한 자금난에 빠졌다.
그런데 헬리오도로스라는 사람이 굉장히 재밌는(?) 인물이다. 혹시 비선실세는 아니었을까, 의심이 가는 인물이다. 마카비서에 기록된 내용인데, 예루살렘에서 시몬이라는 자와 대제사장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예루살렘의 시장 관리권에 대한 의견충돌 때문이었다. 시몬이 다소 출신 아폴로니우스 총독에게 찾아가서, 성전 금고에 막대한 비자금이 있는데, 세탁된 돈이니 왕이 마음대로 가질 수 있다고 정보를 주었다. 이 첩보를 먼저 전해들은 헬리오도로스는, 왕을 등에 업고 예루살렘으로 간다. 겉으로는 코엘레수리아와 페니키아의 여러 도시들을 시찰하러 가는 것처럼 꾸몄다.
여차저차 한 내용을 생략하겠다. 요지는 성전 금고를 강탈하려고 들다가, 하나님께 호되게 매를 맞고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를 호위했던 사람들이 대제사장에게 와서 그 목숨을 살려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주기를 청한다. 그래서 그가 살아났다.
나중에 헬리오도로스가 필리파토르를 암살하고 왕이 되려고 한다. 이 때 에피파네스가 처음에는 왕이 되려는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가, 형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왕이 된다.
어쩌면 복수를 위해서, 혹은 앙갚음을 위해서 왕이 되려고 하는 사람은 참 위험한지도 모르겠다. 연산군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는 역사상 가장 잔인한 폭군으로 기록된 사람이다.
헬리오도로스를 위해 기도하고 살려준 유대인들의 이야기가 그에게 들어갔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정신을 무너뜨리기 위해 강력한 종교탄압정책을 펼쳤다. 율법 두루마리를 읽거나 소지하는 것을 금했다.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게 했고, 할례도 금지시켰다. 유대인들의 정체성의 근간을 이루고 있던 것들을 다 금지한 것이다. 온갖 종류의 음란과 모독의 행위로 스스로를 더럽힐 것을 권장했다. 그리고 위반하는 이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이었다. 그는 심지어 성전의 제단 위에서 유대인들이 불결하게 여기는 돼지를 잡아 제우스신에게 바치기도 했다.
유다는 더 큰 농단을 당했고 꽉 막히고 캄캄한 시절이었다. 바로 그 무렵에 등장한 것이 다니엘서이다. 다니엘서가 배경으로 삼고 있는 시대는 바벨론과 그 뒤를 이은 메대 페르시아이지만, 다니엘서의 잠정적 독자들은 위기를 겪고 있던 주전 2세기의 사람들이다. 다니엘서의 저자는 포로로 잡혀가 제국의 관료로 살아가야 했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를 등장시켜 그들이 얼마나 굳건한 의지로 자기 신앙을 지켰는지를,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함께 하신 감동적인 이야기로 들려줌으로써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신앙을 굳건히 지키라고 독려하고 있다.
오늘 말씀은 다니엘의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세상의 권세와 우상에게 굴복하고 그 풍조를 따라야하는 처지를 반영하고 있다.
우선, 3:1-7은 느부갓네살 왕이 금 신상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권력의 절대화, 우상화다. 그것을 거역하고 절하지 않는 사람들은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고 겁박한다. 주전 2세기 중엽, 살벌하고 캄캄했던 바벨론 시대에 다니엘과 세친구들의 이야기에 비하면 자신들의 문제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다니엘의 세친구들은 고발당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그들은 왕을 높이지도 않고,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도 절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왕의 권력에 정면도전으로 여기고 느부갓네살은 격노했다. ‘체포하라.’ 명이 떨어졌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줄테니, 금 신상에 절을 하면 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맹렬히 타오르는 풀무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했다.
3장 17절 –18절을 보라.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도 능히 건지실테지만, 그렇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느부갓네살은 폭발했고, 평소보다 화력이 7배나 되는 화로에 이들을 던졌다.
우리의 염려는 무엇인가? 갈등은 무엇인가? 세상적인 권세는 당장 우리를 위협하고, 하늘을 찌를 듯 두렵고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22절을 보면, 왕의 명령을 따랐던 사람이 그 불길에 타죽었다. 그런데도 그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절대화 된 권력이 보여주는 타락한 모습이다.
느부갓네살은 신비한 장면을 목격한다. 분명 세 사람이었는데, 네 사람이 보였다. 그들은 묶이지도 않았고 불에 데지도 않았다. 깜짝 놀란 왕은 풀무불 가까이 가서 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불에서 나오라고 한다. 불은 여전히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풀무불에서 나온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보니 머리털도 그을리지 않았고 불 탄 냄새도 없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담대한 믿음이다. 3:18절의 말씀을 바꾸어 말하면 이런 고백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상 앞에 자신의 믿음과 생명을 던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의 권력과 우상이 득세한다고 하더라도, 담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고 쉽게 포기하고 나면, 세상은 느부갓네살의 우상으로 가득 채워지고, 결국 하나님은 우상을 사라지게 하실 때, 심판을 함께 당한다. 권불십년이다. 세상의 권세와 우상의 지배가 오래 갈 것 같지만, 잠시 뿐이다. 성경에서 시편2장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라.
“세상의 군왕들아,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2:4)
느부갓네살도 나중에 이와 같은 처지로 전락하고 만다.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해주면서 담대하게 충언한다.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권력의 위세가 높을 때, 들을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들려주시는가?
돈과 권력을 우상화 하고, 그거에 절하지 않으면 던져버리는 풀무불 같은 세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는가? 국정이 현대판 이세벨에게 농락을 당하고 국가가 위기에 빠진 동안, 그토록 성실히 열심히 살던 사람들의 삶은 정말 살기 어려울 정도로 피폐해졌다. 대기업의 금전보유량은 천문학적으로 늘어가면서도 분배가 되지 않아 서민들의 가계경제는 정말 어려웠는데, 그 이유가 정경유착으로 빚어진 특혜 때문이라는 진실이 드러났다. 한 사람을 위해서 수십, 수백억의 자금이 대수롭지 않게 쓰이고, ‘억울하면 돈 없는 부모를 탓하라.’는, ‘그것도 실력’이라는 말을 듣는 동안, 청년들은 시급 6천원을 받아가며, 때로는 그것도 떼이면서 학비를 벌고, 사회에 발을 내디딜 때는 학자금 대출로 인한 감당하기 어려운 빚더미를 안고 시작해야 했다. 그래서 청년들은 대한민국을 헬조선이라고 불렀다. 지옥이라는 의미다. 세월호 뿐만 아니라 메르스, 백남기 농민에 대한 국가폭력에서 드러난 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 모두가 체제 속에 내던져졌었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은 이 시간,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바라신다. 풀무불에 던져졌다고 하더라고, 그림자처럼 지키고 보고하심을 믿고 담대히 승리하길 바라신다. 그럼으로 형통하기를 바라신다. 그 은혜와 복음의 불빛이 여러분 심령을 먼저 밝히고, 세상을 또한 복되고 형통하게 만들기를 바라신다. 요셉의 형통함을 통해, 가정과 국가까지도 잘 됐던 것처럼 말이다.
세 친구들이 풀무불에서 나왔다. 깜짝 놀란 느부갓네살 왕이 황급히 그들을 불러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의 무덤에서 나사로를 불러내셨다. 그를 살리셨고, 감았던 것을 풀어 자유케 하셨다.
어제 사람들은 100만의 촛불을 보면서 새시대의 희망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복주시고 형통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새생명의 소망을 확신하길 축원한다. 오늘 그 믿음으로, 세상의 불속에 들어간다고 하더라고,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복과 은혜를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