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6일, 성령강림절 후 25주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11월의 첫 번째 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촛불을 들어가며 더 좋은 세상을 갈급해하는 사람들이 광장을 메운 때에,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소망을 얻고 힘과 용기를 얻에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지치고 상한 심령을 어루만져 치유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소망이 넘치게 하옵소서. 또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아직 하나, 그것은 작다
- 시류
오늘 우리의 세상이 시끄럽다. 이 혼란스럽다. 세상은 비정해졌고, 척박해 진지 오래다. 대한민국이 현대판 이세벨에게 부역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는 생각에 시민들은 분노했다. 중고등학생들까지 거리로 나오게 했다. 어쩌면 공의와 정의를 버리고 바알에게 굴복한, 자업자득이다. 허물어지고 볼품없게 된 우리의 자화상, 삶의 자리.
그러나 우리는 또다시 공의롭고 정의로우며 평화로운 세상을 꿈꿔야 한다. 청명하고 행복한 세상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폐허의 자리에, 다른 꽃들이 피어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민들레가 피어난다. 민들레 홀씨는 사방에 퍼져 꽃을 피워내고 폐허를 회복시킨다.
오늘의 말씀은 성전까지 무너지고 폐허가 된 초라하고 볼품없는 자리에, 이전보다 더 영광스러운 성전이 세워진 과정에 대한 말씀이다. 이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소망으로 넘치기를 바란다.
- 꿈 같이 찾아온 기회
오늘의 성경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당시 상황 이야기를 전개해보자. 몇 차례 들려드린 이야기이기도 하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던 포로들이 돌아왔다. 그 때의 환희를 시편은,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웃음이 가득하고 찬양이 찼었도다.”(시126:1-2) 노래한다.
자, 이제 무엇부터 해야할까?
악몽 같았던 시간, 그 시간을 버티게 해주었던 것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하나님은 이방 땅에서 포로가 된 이들과 함께 해주셨다.
모두가 이런 마음이었다.
“이제, 우리가 풀려났다고, 자유의 신분이 되었다고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모두가 공감했다.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는 이런 제안을 한다. “우리가 무너진 성전을 다시 지읍시다. 이왕이면 옛 성전의 터를 찾아 거기에 짓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이 됩시다.”
백성들은 당연하게 여겼고 환호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옛 다윗 왕과 솔로몬 왕 때의 전성기를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 하나님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일으킬 실 것이라는 기대와 확신에 찬 일이었다. 두 번째는 제가 면밀히 분석을 해본 결과이다.
사울 왕이 등극한 이래 이스라엘은 ‘신정사회에서 왕정사회로’의 사회의 패러다임과 체제가 전환되었다. 역사가 다시 신정사회로 회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런데 이런 인식변화가 있다.
포로기 이전에는 ‘정치중심의 왕정’이었다. 그런데 포로기 이후에 새로 지향하는 것이 생겼다. ‘제사중심의 왕정!’ 정치중심의 왕정은 율법으로 기강이 세워진다. 그런데 제사중심의 왕정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으로 기강이 세워진다. 역사를 다시 고찰해봤더니, 하나님을 예배하는 왕정은 그만한 복을 누렸다.
참고적으로 그렇게 해서 쓰인 책이 역대기이다. 어떻게 다윗과 솔로몬 때의 명성을 회복하는가? 역대기사가의 관점으로 보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는 왕일 때, 나라가 부강해지더라는 것이다. 정치적 수단으로 종교를 이용할 때는 우상이 곳곳에서 들끓었다. 그런데 우상을 철폐하고 하나님을 잘 섬길 때, 다소 왕이 부족하고 실책을 범하더라고 나라가 잘됐다는 것이다.
성전 건축 현장으로 돌아와 보자. 나이 많은 노인과 원로들은 성전의 기초가 놓일 때, 그것을 바라본 감회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대성통곡을 한다. 바벨론의 침공으로 성전이 불타고 무너졌을 때, 그 상실감은 너무나 컸다.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세월이 지나 가슴 깊이 묻어두었다. 성전의 기초가 놓이는 것을 보자니, 마치 수십 년간 잃었던 혈육을 만났을 때의 감정처럼 서러웠던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 계획과 비전을 가로 막는 문제
냉정한 이야기를 해보자. 매우 현실적인 문제이다. 성전을 짓겠다는 것은 좋은데, 재원마련을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건축비, 공사비가 필요하다. 나라가 부강할 때야, 별 것 아닐지도 모르지만 서로서로의 형편이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기둥하나를 세우려고 해도,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실어 와야 했다. 그 운반비는 어찌하는가? 단순한 건축이나 공사가 아니었다.
우리 인생의 어려운 문제들 중 하나는 마음먹은 대로 쉽게 되지 않는다.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장애물과 어려움을 만난다.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비용이야 천천히 마련하면 된다고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사마리아인의 방해였다. 이들은 페르시아 공관에 거짓보고를 한다. 성전을 지으려는 것이 명백한데, 성벽을 지어서 나중에는 대국에 반기를 들것이라고 했다. 이런 혐의 때문에 페르시아 공관은 공사를 멈추게 했다.
의기투합은 했는데, 뜻대로 안된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고 보니까 당장 생계의 문제도 만만치 않다. 백성들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고, 동력은 상실됐다.
그러고 나니까, 이런 일이 생겼다. 찬물을 끼얹는 경우 말이다. 마음에 뭔가 다시 우주의 기운(?)을 모아서 해보려고 하는데, 찬물을 끼얹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3절을 보면 1장 14절의 마음과는 전혀 상반된 분위기를 볼 수 있다. ‘남은 모든 백성’(1:14)은 포로기까지 거쳐 오면서 생존하고 있는 모든 유다 백성을 말한다. 그 백성의 마음은 감동이 됐었고 성전 건축을 시작했다. 옛 성전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감회가 새로워 감격과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2장 3절의 분위기는 어떤가? 이 말을 풀면 이런 것이다. 원로들이 하는 말이다. ‘옛날 솔로몬의 성전에 비하면 너무나 볼품없다. 그 때 그 성전을 너희들이 봤어야 하는데….’, ‘건축자제는 듬성듬성 널려있고, 지금 이루어지는 공사는 날림공사처럼 보일 뿐이다.’, ‘차라리 관두는 게 낫지 아니한가?!’ 이런 말들은 계획과 비전에 대해 찬물을 끼얹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 부정적인 생각과 말로 찬물을 끼얹는 사람이 꼭 있다. 자기 내면에서 스스로 이런 목소리를 듣기도 하고, 남이 하는 말을 듣다보니, 마음이 상하기도 한다.
- 신앙적인 극복
4절을 읽어보자.
하나님은 마음을 굳세게 하고 믿음과 용기를 내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이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런데 ‘허황된 것은 아닐까?’,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고 믿다가 실망감이 더하는 것은 아닐까?’ 염려한다.
5절에 보면 좀 익숙치 않은 표현이 나온다. ‘너희와 언약한 말’ 보통은 ‘너희와 맺은 언약’이라고 한다. 미묘한 차이를 구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너희와 맺은 언약’은 하나님의 약속을 뒤돌아보면서 성취되었거나 경험을 하고 체험을 했을 때, 그것을 확증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표현이다.
‘너희와 언약한 말’은 이렇다. 때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믿음과 증거가 확실 할 때가 있다. 믿음은 있는데, 증거가 없을 때가 있다. 그런가하면 증거는 있는데 믿음이 없을 때도 있다. 물론 믿음도 증거도 없을 때가 있다. ‘너희와 언약한 말’은 증거도 믿음도 없는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히브리서 4장 2절을 상기하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기 아니함이라.”
또 히브리서 11장 1절,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은 뭐라고 하는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복음을 자기에게 믿음으로 결부시킬 수 있는가? 믿음도 없고 증거도 없을 때, 바라는 것, 보이지 않는 증거들을 믿음으로 ‘결부’지으려는 노력이나 의지가 중요하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성경은 ‘굳세게 할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가나안에 입성하는 여호수아에게도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것이 될까?’, ‘소망대로 될까?’, But 믿음을 가지라. 된다.
5절은 출애굽의 역사를 믿음으로 결부 짓고 있다.
특별히 홍해 앞에서 앞으로는 홍해가 가로 막고, 뒤로는 애굽의 군대가 추격해올 때, 모세를 통한 믿음은 이것이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믿음도 식었고, 눈에 보이는 증거도 없다. 건축비용의 문제가 하루아침에 해결될 것 같지도 않고, 페르시아 공관의 입장은 변함이 없다. 공사를 재개할 수 없다. 별 수가 없다.
그러나 담대함으로 붙들어야 할 믿음은 바로 이것이었다.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4)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5)
주님은 믿음을 가지고 노력하길 바라신다. 그런 의지를 갖기를 요청하신다.
- 하나님의 섭리
쉽게 번역하기 어려운 표현이 있다.
6절, ‘조금 있으면’(오드 아하트 메아트 히) 이것은 직독을 하자면 이런 말이다. ‘아직 하나, 그것은 작다.’ 발드윈은 ‘기다려라. 잠시만’으로 번역을 했고, 존슨은 ‘다시 한 번, 그리고 곧’이라고 번역했다. 새번역 성경은 ‘머지않아서’라고 번역했다. 무슨 뜻일까?
저는 직독해서 이해하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을 한다.
여러 차례 말씀드린 대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이 첩보는 은밀히 페르시아 본토에 보고 됐다. 그리고 조사하다가 어느 전각에서 미결상태로 남아있던 문서를 하나 발견한다.
고레스의 칙령! 고레스는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페르시아 제국을 이룩한 대왕이다. 고레스가 이 지역을 통치 영역에 넣었던 해에 칙령을 내렸다. 유다인들 중에서 본국으로 돌아갈 사람들은 원하는 대로 해도 좋다는 허가장이었다. 그리고 본국에 가면 성전을 짓고 하나님을 섬기라고 했다.
결국 전각에서 발견된 칙령대로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주변에서 올라오는 조세를 굳이 페르시아까지 전달할 필요 없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는 비용으로 사용하라고 한다. 그것도 조금 쓰는 것이 아니라 넉넉하게 충분히 쓰도록 지원하라고 했다.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뜻은 단순히 시간의 지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성실히 일하고 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전제로 하고 있는 말씀이다. 다만 우리 역시 그것을 믿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어려움이 없었다면, 이런 일이 있었을까? 인간의 눈에 안되는 일처럼 보이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믿음이 없으면 알기나 하는 것일까?
문제에는 고비가 있다. 그것만 넘으면 순탄한 경험을 한다. 넘고 보면 못넘을 큰 산 아니다. 바로 이런 것, ‘아직 하나, 그것은 작다.’ 주님은 한 길이 막혔을 때, 아홉 길을 열고 계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믿기를 바라신다.
8절 말씀은 낙심한 이들에게 이렇게 격려한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뿐만 아니라 솔로몬의 성전에 비하면 볼품없을 것으로 내다보며 찬물을 끼얹는 사람에게도 이런 말씀을 전한다.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9)
앞으로 지어질 성전이 솔로몬의 성전보다 더 좋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실제로 그랬다.
믿음이 없다면 얼마나 허무맹랑한 말씀일까? 그러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연결지으면 보이지 않아도, 믿어서 보이는 역사가 일어난다.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것 같아, 혹은 더딘 것 같아 낙심하지 말라.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고, 혹은 보잘 것 없을지라도 주님은 믿음으로 소망을 갖길 원하신다. 인간에게는 크나, 하나님께는 작은 것 하나가 해결되고 나면 하나님의 약속이 불시에 성취되고 이루어질 것도 믿으라. 그리고 견디고 승리하라.
예수님은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삼 일만에 다시 일으키시겠다고 하셨다. 성전체제 속에서 온갖 특혜와 혜택을 누리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불의를 일삼았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척박한 세계 속에 우리가 주의 성전이 되는 것이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거느날.”(엡2:22)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1:23)
세상에 나아가서 척박함을 주님의 충만함으로 채우시는 여러분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