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2일 성령강림절 후 20주, 세계성찬주일
오늘 세계가 지키는 성찬주일에 주님 앞에 나아온 여러분 모두를 환영하고 축복한다.
주님은 성찬식을 제정하시고 기념하여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교회사는 성찬식을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왔다. 성찬식을 행하고 참여함으로 성사체험을 했고(거룩해지는 시간이었다는 말이다), 믿는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분으로 인한 힘과 용기를 공급받기도 했다. 또 고난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빛을 발견하고 소망을 갖게 했다.
잠시 뒤에 있을 성찬식을 통해서 여러분 모두에게도 동일한 은총이 함께 하시길 빈다.
여러분, 과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일까?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드러내시는가?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라는 작품을 보면, 마르틴이라는 사람은 구두수선공이었다. 창가로 보이는 사람들의 신발만 봐도 그의 신분과 성격을 알아맞출 수 있는 달인이었다. 그런데 그의 인생은 괴로웠다. 젊은 날, 아내는 세 살배기 아이를 남겨놓고 죽었고, 아이가 어느 정도 컸을 무렵 병사로 죽었다. 그도 따라죽고 싶었다. 어느새 인생은 노년에 접어들었고 하루라도 빨리 죽었으면 했다. 그런 그에게 한 친구가 성경을 읽으라고 권한다. 젊은 날과는 달리 성경 말씀은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다.
어느 날 주님께서, 성경을 읽다가 깜빡 잠이 든 틈에, 내일 마틴을 만나러 오시겠다는 음성을 들려주셨다. 그러면서 거리를 잘 보라고 했다.
다음날 마르틴을 거리를 계속 살폈다. 오시겠다던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어떤 늙은 청소부가 보였다. 마르틴은 추위에 고생하는 그를 불러 따뜻한 차를 대접했다. 또다시 거리를 보니, 허름한 옷을 입고 있고, 우는 아기를 달래는 여인을 보게 되었다. 그는 그를 불러 따뜻한 난로에 몸을 녹이게 하면서 빵과 스프를 대접했다. 그리고 아기를 감싸라며 자기 외투를 주었다. 그 여인은 너무 고마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조금 뒤에 사과를 팔고 있는 노파를 보았는데, 어떤 소년 하나가 사과를 훔치다 붙잡혔다. 노파가 경찰에 넘기려고 할 때, 마르틴이 말리면서 돈을 대신 지불할테니, 소년을 용서해달라고 한다. 노파는 자신의 손주들 생각이 나서 용서하기로 한다.
주님은 오늘 찾아오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끝내 찾아오시질 않아서 아쉬운 마음으로 다시 복음서를 읽기 위해 성경을 펼쳤다.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나를 모르느냐?”
“누구십니까?”
잠시 뒤에 청소노동자였던 스테파니치가 보였다가 사라졌다.
“나였느니라.”
또다시 아기를 업고 있던 여인이 나왔다가 사라졌다.
“나였느니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과를 파는 노파와 소년이 나타나더니 사라졌다. 이번에도 역시,
“나였느니라.”라는 음성을 듣는다.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마틴은 이들을 통해서 누구를 보았는가?
외경인 토비트서는 이런 내용이다.
인척관계에 있는 두 유태인 집안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이라크와 이란 지방에 포로로 잡혀갔고, 거기서 생활하게 된다. 두 집안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면서 허물없이 살아왔다. 그런데도 크나큰 불행을 겪는다. 동족의 시체를 몰래 매장해주었다는 이유 때문이다. 토비트는 모든 재산을 몰수당했다. 설상가상으로 장님이 된다. 다른 집안에는 외동딸이 있었는데, 이름이 사라다. 그는 악령에 사로잡혀 결혼을 하기도 전에 일곱 번씩이나 파혼당한다.
하나님은 토비트와 사라 이 두 사람의 기도를 들으신다. 그리고 대천사 라파엘[‘하느님께서 낫게 하신다’]을 보내셔서 그들을 치유하기로 작정하신다.
하느님의 이러한 계획을 알 리 없는 토비트는 아들 토비아의 장래를 보장해 주기 위하여, 전에 메대지방에 맡겨 두었던 돈을 찾으러 떠나보낸다. 토비아가 여행하는 길에 길동무 하나를 만난다. 그가 바로 인간의 모습을 취하여 나타난 라파엘이다. 여행에는 계속 역경이 찾아온다. 그런데 라파엘이 그 여행을 계속 안내하며, 끝내 친척인 사라와 결혼케 함으로써 사라를 구해 낸다. 돌아오는 길에 토비아는 라파엘의 지시를 따라 그대로 행함으로써 연로한 아버지의 눈까지 뜨게 한다. 이렇게 해서 두 집안은 모두 행복을 되찾게 된다. 그리고 라파엘은 자신의 정체를 밝힌 뒤 사라진다. 그리고서 감사의 기도와 다가올 구원에 대한 기다림 속에 이 토비트서는 그 끝을 맺는다.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view.asp?ctxtIdNum=3712&keyword=&gubun=01)
히브리서 13:2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하나님은 혼자 단독적으로 역사하시는가? 물론 온 우주만물이 운행하고 질서와 조화가 이루어지는 데에는 인간의 영역을 넘으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그런데 적어도 인생사에서 만큼은 양 갈래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통해서 나타나시고 나를 도우신다. 예비하시고 섭리하신다. 또한 나를 통해서 누군가에게 나타내시고 도우신다. 하나님은 ‘사람 없이’ 하지 않으신다. 함께 동반 하신다.
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믿는가?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고자 하심을 믿는가? 목회자를 통해서 주님은 나타나시고, 역으로 여러분을 통해서 주님은 역사하시고 현존함을 드러내신다.
개인의 변화와 믿음의 성숙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이기에, 우리의 믿음과 인격과 성품을 어떤 하나에 강제적으로 고정시키신 것이 아니다. 우리와 더불어 만들어 가신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다. 빛으로 나타나신 주님을 보았고, 그의 눈은 어두워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함께 가는 일행이었던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다.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앞에서의 맥락대로 이해하자면, 바울에게는 그의 속사람으로 임하신 주님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개인의 심령 속에 찾아가셔서 우리의 속사람이 변하게 하시고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신다. 지혜와 믿음의 빛을 비춰주셔서 하나님이라는 지고하신 분의 존재를 깨닫고 믿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사람들이다.
자기의 영광과 능력과 공로와 인간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사람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사람이다. 나를 통해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섭리와 역사와 능력이 누군가에게 자기도 모르게 복음으로 나타난다면, 바로 그가 그리스도인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
바울의 유명한 고백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신다.
코이노니아(친교)는 믿음생활의 기초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단순한 친교가 아니다. 친목회와 같은 인간적인 교제가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사귐이다.
세상적인 친교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 우리 각자에게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서로 봉사하고 섬기고 돌보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를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각 지체들이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 안에서, 명령을 따라 서로 섬기고 섬김을 받으면서 한 몸 이룬다. 이런 신비에 눈을 뜨시길 축원한다.
오늘 말씀은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우리가 성찬식을 행하는 본질적인 목적과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해주고 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하심에 눈 뜨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참빛이 꽃피어났음을 믿고, 그 부활하신 주님의 살아계심에 눈뜨도록 초대된 시간이 바로 성찬이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은 한 사람을 만났는데, 부활하신 주님이셨다. 그러나 알아보지 못했다. 그런데 함께 식사하실 때, 주님께서 떡을 가지시고 축사하셨다. 그 때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인 줄 알아보았다.
성경은 떡을 떼는 자리마다, 예수성찬의 모습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담고 있다. 따지고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 죄인들과 세리들과도 식사하실 때, ‘떡을 가지시고 축사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다. 초대 교회에서, 사도행전2:46을 보면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라고 증거한다. 우리 일상의 소소한 것들에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아름다운 모습과 만나고, 단순한 만남만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살아 역사하심 또한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엠마오의 제자들 이야기를 보라. 식탁의 자리와 나눔의 자리에서, 성찬이 이루어졌고, 눈이 밝아져, 그리스도인 줄 알아보았다. 그리고 엠마오의 두 제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32절에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억하며 참여하는 성찬식에서, 떡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먹음으로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타나내는 몸이 되며, 잔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마심으로 새언약을 세우시는 복음ㄹ적인 삶이 되기를, 주님께서 바라신다.
한마디로 예수를 닮고, 예수의 모습과 현존하심이 나타나고, 예수의 빛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기를 간구하며, 그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다.
요한복음1장9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참 빛이신 예수님께서 각 사람에 빛을 비추어, 그 허락된 빛을 감당하게 하신다.
주님의 빛이 우리 각 사람에 주신 사명과 역할과 모습대로 나타나기를 축원한다.
성찬을 이와 같은 믿음과 소망으로 받으라.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을 믿고 깨달으라. 세상에 주님의 영광과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성찬식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빛으로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은총을 제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