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9일 성령강림절 후 21주

 

공중의 새를 기르시고, 물속의 고기를 먹이시고, 산 중의 짐승을 보살피시며, 들의 꽃과 풀을 돌보시는 사랑의 하나님, 오늘 복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세상살이의 고달픈 심정으로 낙심했던 우리가 청량하고 높은 하늘을 지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새힘과 용기를 얻기 위해 이 자리에 왔으니, 한량없는 주님의 사랑으로 감싸주셔서 심신의 안위를 얻게 하여 주시며,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거룩의 말씀 :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1. 행복이란?

‘추상명사’ 이것은 말은 쉽고 단순한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복잡하고 어렵다.

 

그 중에 행복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보자.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사전적인 의미는 “삶에서 기쁨과 만족감을 느껴 흐뭇하다”라는 뜻이다.

 

위키백과 사전은 이 단어를 좀 더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

“자신이 원하는 욕구와 욕망이 충족되어 만족하거나 즐거움을 느끼는 상태,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안심해 하거나 또는 희망을 그리는 상태에서의 좋은 감정으로 심리적인 상태 및 이성적 경지를 의미한다.”

 

정치, 경제, 문화, 종교 각론으로 들어가서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니까, 얼마나 어렵고 복잡한지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가? 그런데 한마디로 요약하라고 말한다면, ‘행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말할 수 있다. 여러분 인생이 참으로 행복하고 기쁨과 소망이 넘치시길 축원한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이라는 작품에서 나오는 한 대목이 생각난다. 알리사와 제롬이 서로 사랑하고 있지만 현실의 장벽 때문에, 편지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 알리사가 제롬에게 보낸 편지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 영혼과 깊은 교섭을 갖는 것일까?” 묻는다.

 

편지를 통해서도 둘의 영혼은 교섭되고 있고, 그리움은 극복되고 있다. 그리고 영혼의 교섭을 통해 행복을 찾고 느끼고 있다.

 

이렇게 보면 모든 추상명사는 영혼의 깊은 교섭을 필요로 하고, 특별히 신이라고 하는 초월적인 존재, 좀 철학적인 용어를 빌자면 ‘유한자 속에 임하는 무한자’와의 교섭 속에 그 의미와 신비가 파악되는 것 같다.

 

사랑, 마음, 행복, 감사, 복됨….

 

이런 것들은 외부에서 형성되는 것 같지만, 실은 우리 내면을 통해서 자기내부에서부터 만들어진다. 그 주소를 모르고 찾다보면 신기루가 되기도 하고 허황되기도 하고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하는 전도자의 탄식을 들어야만 하는 것 아닐까!

 

 

  1. 주님을 만난 증거

좀 설명이 장황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읽다가 생긴 의문점들 때문에 이점을 미리 생각해보았다.

 

열 명의 나병환자가,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신, 예수님을, 한 마을에서 만나, 고쳐달라는 요청을 한다. 그것이 발단이다. 11절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만난 병자들’, 이 말을 통해, 반추해볼 수 있는 점이 있다. 사람 사이의 경계선에 대해서 말이다.

분리의 장벽은 이스라엘과 가자지구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신분, 계급, 계층, 혈연, 지연 등 사람들은 분리의 장벽을 쳐놓고 서로를 대하려고 한다. 그것이 반평화적이고 반생명적인 것이라는 것은 모르고서 말이다.

그런데, 나병이라는 당시로서는 고칠 수 없는 질병은, 서로가 입었던 신분의 옷과 계급, 계층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여실히 드러내주었다. 그런데 어쩌면 어리석은 인간은 서로 공감하고 고통을 보듬지 못하고 그 속에서도 새로운 차별과 분리의 장벽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오늘의 부조리한 현실을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정도로 인간이 어리석을 수 있다.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께서 가까운 마을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처지와 형편상 가까이 가지는 못한 채, 다만 멀리 서서 소리지른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께서 목청을 높일 수밖에 없는, 소리의 절박함을 외면하시는가? 못들은 채 하시거나 다음으로 미루시는가? 주님은 대번에 문제를 알고 곧장 반응하셨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가는 도중에 과연 그들의 몸이 모두 깨끗해졌다.

 

여러분 이것을 내면에서부터 먼저 알았을까? 외부에서부터 먼저 알았을까? 14절을 보면, 이미 나은 것이 확인돼서 제사장에게 보이러 간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믿고 달려가다 보니 나은 것으로 증거하고 있다. 이미 자기 안에서부터 몸이 점점 좋아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여러분, 주님을 만난 증거는 주로 ‘내 안’에서부터 시작되고 감지된다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나에게 ‘믿음’이라는 은총을 선물로 받고, 그 포장을 푸는 순간 ‘변화’(성화)라는 진짜 선물이 나오는 것이다.

생명의 힘, 생명력도 안에서부터 벌써 희색이 돋고 심령에서부터 몸이 회복되고 건강해지는 것이다.

 

잠언18:14) 사람의 심령은 그의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

또 잠언 14:30에서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라고 했다. 이 원리를 깨닫고 여러분의 심령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심으로 늘 강건하기를 축원한다.

 

이미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제사장에게로 가는 도중에 이미 자기 안에서부터 온몸이 깨끗해지는 것은 알았다. 회복되고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여러분 이 시간 주님이 여러분 심령 가운데 있다면, 동일한 역사가 일어난다.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고 힘과 용기를 얻는다. 주님이 여러분의 심령 가운데 함께 하고 계심을 믿으라.

 

행복감이 느껴졌고, 믿기지 않는 현상 앞에, 자기 삶의 자리로 귀환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너무나도 좋았고 기뻤다.

 

그런데, 이 중에 한 사람이 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께 엎드려 감사하고 있다.

 

 

  1. 사마리아 이방인

그런데 의문점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1) 예수님께서 열 명의 문둥병자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회 몸을 보이라”(14절)고 명령했고, 아홉 명의 문둥병자는 그의 명령대로 순종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왜 그들이 비난받는 것처럼 보이고 있는가? (2) 사마리아 문둥병자는 제사장에게 가지 않고 다시금 돌아왔는가? 단순한 감사 때문이었는가? (3) 열 명의 문둥병자가 모두 병 고침을 받았는데, 왜 그중 하나에게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말했는가? (4) 예수는 이미 누가복음 9장 51절에서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을 떠났는데, 아직도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11절)에 있는가? (5) 이 본문은 단순히 문둥병자들을 고친 ‘이적 이야기’인가? 하는 것 등이다.

 

그냥 성경을 읽었을 때에는 감사하기 위해 되돌아온 사마리아 문둥병자의 모습이 ‘주님을 만난 모범’에 대한 교훈이 됐다. 당연한 감사에 대해서 말이다. 주님께서 그를 칭찬하시고, 19절에서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다.

구약에서 이에 견줄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수리아의 군사령관이었던 나아만이 문둥병치료를 위해서 엘리사를 찾아왔다.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담그라.’, 그대로 했더니 그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처럼 깨끗해졌다(열하5:14). 그리고 엘리사에게 도로 찾아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례코자 한다. 물론 엘리사가 거절하여 받지 않았지만 말이다.

누가복음 4장 27절을 보라.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느니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으로 봐서, 오늘의 본문은 이 구절과 연결돼있다. 사마리아 사람의 모습을 나아만과 견주고 있고, 고향에서 배척당하신 예수님은 엘리사에 비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물음을 가지고 성경이 들려주려는 말씀을 묵상하다보니, 일반적으로 깨닫지 못했던 한 가지 놀라운 점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애당초 예수님께서 애정어린눈빛으로 주목하고 있던 사람이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모두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리쳤을 때, 주님은 불쌍히 여겨, 모두의 간청을 들어주셨다. 그런데 그때 특별히 그를 더욱 더 주목하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물론 성경이 명시적으로 이것을 말하고 있진 않지만,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복음을 듣는 우리가 포착해야할 점이다. 그래야 주님에 대한 메시지가 바로 보인다.

 

예수님께서 아직도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지 못하시고 갈릴리와 사마리아 경계를 지나고 계시다고 했다. 그렇다면 5장 14절로 돌아가서 말씀을 보자. 예수님께서 갈릴리 한 동네에서 나병환자를 고치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 때에도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말씀을 덧붙이신다.

그런데 17장 14절에는 “제사장에게 보이라.”고만 말씀하신다. 왜일까? 앞에서는 율법의 당연한 의무를 요청하셨지만, 왜 여기에서는 그렇지 않은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사람을 중시’하고 ‘인간을 배려한’ 명령이다. 바로 사마리아 문둥병자 말이다. 왜냐하면, 다른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다르다. 기원전 129년 유대인 히르카누스에 의해서 사마리아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래서 그럴 수 없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예수님께 돌아온 것은 쉽게 이해가 된다. 만약 이때도 예수님께서 모세의 율법을 덧붙여서 말씀하셨다면, 은혜를 입고 구원을 받았어도 제도와 시스템에 의해서 소용없게 되는 것이다. 인간적인 배려심을 상실하고, 사람을 중시하지 않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이요, 공동체일 수 없다.

 

한 가지 의문이 더 남는다. 그렇다면 왜 그도 다른 이들과 같이, 그들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을까? 이것을 풀다보니까, 가슴이 아리다. 예수님은 어떠셨을까? 마음이 읽혀진다.

18절에 ‘이방인’이라는 단어를 주목하라. 사마리아 사람을 ‘이방인’이라고 부르신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다. 순수 이스라엘 계열의 사마리아인인지, 쉽게 말하면 혼혈인지 말이다.

헬라어로 ‘알로게네스’라는 말인데, 비이스라엘 계통의 사람들을 혐오하거나 폄훼하며 부르는 말이다. (일본의 와사비테러, 기차표테러 논란처럼) 신약을 통틀어 여기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다른 데서는 이방인을 말할 때, ‘에트노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단어를 그 당시 사회,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예루살렘 성전 내부 “이방인 출입금지”라는 팻말에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마치 잡상인 출입금지처럼 말이다.

 

 

  1. 참성전 예수

한편 그가 주님께로 돌아왔다는 것은 또 다른 것을 방증해준다. 예수님이야 말로 참 성전이다. 요한복음2장 19-22절을 보면 예수님은 헤롯이 지은 성전을 대신하는 분으로 말씀하고 있고, 요한복음4장21-24을 보면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교회건물이 아무리 크고 웅장하다고 모두가 성전이 아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참성전이심을 믿고 주님을 만나지 않으면 안된다.

사회에서 가장 차별받고 외면당하는 이에 대해서 주님은 누구보다 더욱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던 것처럼, 그 눈빛으로 오늘 우리와 우리의 문제를 바라보고 계시다.

값진 것으로 답례하려고 했던 나아만과 같은, 드릴 것이 없어도, 주님은 진심어린 감사와 찬송을 기뻐하신다.

 

세상에 나아가서 은혜를 간직하며 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데 그것은 당연하다. 세상이 어둡고, 죄악이 많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은혜를 채우시고 위로와 용기를 더하셔서, 그 희망의 빛을 세상에 품고 찾아들어가 쏟아놓기를 원하신다. 그럼으로 우리의 삶의 자리가 조금씩 달라지고 변화되고 구원이 임하길 바라신다.

참성전이신 예수님과 교섭하라. 속에서 솟아난 기쁨과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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