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25일
인류의 역사와 인간의 생사화복을 홀로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가 주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주홍의 단풍이 파란 잎사귀를 물들이기 시작하고, 코스모스가 피어 하늘의 아름다운 섭리를 드러내는 때에, 심령의 변화를 꿈꾸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닦여지고 부서지고 녹아져서, 주님의 형상을 닮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의 창시자시요,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요한3서4절)
- 지혜의 근본
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하는지 아는가?
잠언9:10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부르그만, 목회자이면서 유명한 구약학자이다. 그가 ‘지혜 전승 연구’라는 책에서 이런 문제제기를 한다.
잠언의 말씀들 중 몇 가지만 예로 들어보자.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잠11:25)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고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느니라(잠11:16)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은 다스리게 되어도(잠12:24)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13:24)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다(잠14:30)
신앙인들에게는 아주 당연한 말씀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착취를 당하기 쉽고,
덕이 있으면 남에게 이용당하기 쉽고,
부지런하며 사람을 피로하게 만들기 쉽다.
자식을 징계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 가정에서 불화를 일으키기 쉽고.
마음이 화평하다면 어떤가? 경쟁에 뒤지기 쉬운 것이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선하고 착하게 산다고 무조건 좋은 인생의 결과를 얻지 못한다. 그렇다고 악하고 비윤리적으로 아무렇게나 욕심부리면서 살면 좋은가? 그것도 아니다.
우리의 삶과 현실이 내 생각과 뜻대로 이루어지는가? 자녀교육이 부모 원대로 되는가? 재물을 모으고 부자가 되어 행복하게 살겠다고 하는 것이 사람의 생각처럼 되는가? 사람 각자 각자가 세운 비전과 꿈들이 계획대로 되는가? 인간관계의 문제는? 가족 내에서부터 이웃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더 근본적인 건강과 생명의 문제는 어떤가?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면 인간의 생각은 아무리 선하고 도덕적이라고 하더라도, 나의 의도와는 달리 어리석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하는 것이다.
‘맡긴다고 하면서 순종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경외와는 거리가 멀다.
바울의 증언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이것을 알기 원하신다.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의 미련함만도 못하다는 것을 말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믿지 않는 자, 인간적인 생각과 지혜로 가득한 자)에게는 미련한 것처럼 보이지만,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 자족하는 마음
오늘 성경에서 말씀은, 디모데에게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한다. 7-10을 보라. 누구든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이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그런데 이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자칫 잘못 생각하면, ‘자족하는 마음’ 때문에 게으르거나 나태하게 될 수도 있고, 방종하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다. 기회를 놓칠 수도 있고, 도전정신이 사라질 수도 있다.
특히 3절에서 5절을 보라. 믿음이 없거나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다. 교만하고 이기적이고 이해타산적인 사람, 마음이 순수하지 못하고 늘 불순하거나 응큼한 의도를 가지고 사람, 사소한 행동을 빌미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다툼이 일어나게 하는 사람. 그 앞에서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무기력해보이고 책임 회피적으로 만드는 것 아닐까?!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5절에서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실상 하나님에 대해 경외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경건을 자기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6절에서는,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득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5절은 신앙생활의 잘못된 목적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6절은 신앙생활의 좋은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자기 이득과 이익 자체를 경건의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되지만, 경건함은 정말 좋은 인생의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있는 것이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란 말과 같다. 왜 경건이 큰 이득이 된다고 말할까? 그 이유를 아시는가?
자. 우선 이것부터 생각해보자. 욕심은 어떤 인생을 불러올까? 9절을 비추어서 보면 욕심은 어리석고 해롭다. 그리고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발람은 불의한 삯(재물)을 사랑했다. 하나님께서 그 길을 여러 차례 막으시는데도, 물질에 눈이 어두워져 결국 제사장이 감당해야할 하나님의 일을 버리고 미혹의 길에 빠졌다. 아간 역시 아이성 전투를 앞두고 그랬다. 물질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명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고라의 반역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당을 지어 모세를 대적했다. 명예욕 때문이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이 욕심이라는 것 때문에 세상이 얼마나 지저분해지는지 알 수 있지 않은가? 수많은 비리와 부정이 이 욕심 때문에 발생했고, 그것 때문에 공의와 정의가 사라졌다.
결국은 탄로날텐데도 자신이 가진 권력을 가지고 덮으려고 한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손석희의 앵커브리핑에 나왔던 내용인데, “지금의 한국 공직자는 재앙이다.” 1세대 사회학자인 송복 교수의 말을 인용했다. 윤리의식이 없는 천민상층이 자신이 받고 있는 특혜를 인식하지 못하고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노학자의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모든 것이 욕심 때문이다.
10절을 보라.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다음으로 생각해볼 것은, 자족하지 못하는 마음이 가져오는 태도면이다. 불만에 가득차고 불평한다. 감사를 하지 못한다. 인간의 욕심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잘 아는 전도서의 말씀을 보자.
5장 10절에서,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재물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행복한 것이라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도 있겠지만, 결코 만족함도 없으려니와,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전도서6:2,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는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자족할 줄 모르고, 불평과 불만이 늘 가득하면, 그 인생은 언제 행복을 누리고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까?
자족하는 마음은 감사라는 행복을 선물로 준다. 만약 불평과 불만을 통해서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고 이기적인 욕심을 채울 수 있고, 그래서 행복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라. 그러나 단언하건대 결코 그럴 수 없다.
특히 여러분, 누차 말씀 드리던 것이다. 고난과 역경에 있을 때, 그 긴 터널을 지나고 있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불평, 불만에 가득한 채,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통과하는 것이 쉬운가? 기쁨과 믿음의 기도와 감사로 통과하는 것이 쉬운가?
그래서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한다. 이것이 비결이다. 어느새 기회는 찾아오고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된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요구하면서 그 연단은 어느새 소망을 이루는 것이다.
- 경건을 위한 자족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왜 큰 이득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한 것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자족하는 마음은 자만과 다르다.
자족하다고 하는 사전적인 의미는 스스로 족한 줄 아는 마음이다. 자만이라는 말도 역시 시작은 스스로의 만족에 있다. 그런데, 그 만족 때문에 우쭐대고 뽐내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족하는 마음은 ‘이만하면 됐지~!’ 하는 자만하는 마음이 아니다.
만족하거나 족한 줄 알면서, 노력하거나 도전하지 않고, 포기하거나 단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자족하는 것이 아니다.
혹은 이런 것이 자족하는 마음일까?
단순한 예로, 자녀가 시험에서 80점을 받아왔다고 하자. 70점 받지 않고 80점을 받아온 게 어디인가? 남편이 돈을 얼마 못 벌어온다, 실직하지 않은 것이 어디인가?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런 것을 자위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게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최선으로 여기고 감사하면서, 최선을 다해 애쓰고 힘씀을 통해서 후회함이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바울은 많은 은사와 능력을 받았다. 그러나 ‘가시’ 같은 것(핸디캡, 고질병)이 있었다. 이것 때문에 그는 많은 은사와 능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하게 여겨졌다. 그것을 제거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곡하게 부탁했다.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 결점 때문에 그는 어떻게 느꼈던가? 그것에 대해 ‘사탄의 사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정말 괴로웠고 어쩌면 하나님을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것이 떠나기를, 그리고 주님께서 더 많은 은혜와 능력을 부어주시기를 기도하고 간구했다. 최소한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겪는 결정적인 위기는 세 번이상을 찾아온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후서12장8절에게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주님은 이 부분에 대해서 원하는 대로, 족한 대로 해주시지 않는다.
대신에 바울에게 어떤 음성을 들려주셨는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그 음성을 그가 듣고 깨달음은 이것이었다. 그를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는 주님의 첫 번째 목적이 있었다. 나에게 모든 것이 완벽하게 내가 원하는 만큼 채워진다면, 주님을 의지하겠는가?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이루어지고, 주님을 필요없을 정도로 완벽하다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겠는가?
또한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감당하기에는 약하고 부족하지만 그 속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러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모든 것이 완벽한 사람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가?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가? 오히려 그 반대다. 여러분에게 주님께서 이미 주신 것이 충분하고, 믿음으로 감당하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능력이 되어주시는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자족하는 것은, 그 이상의 것에 대해서는 주님의 능력으로 맡기는 믿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족하는 마음을 동반한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는 것은, 왜 그런가? 나머지는 하나님의 능력에 위탁하고 맡길 수 있는 믿음과 순종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