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11일 주일예배 설교

 

길고 지루했던 여름날을 거두시고 선선한 바람과 함께 아름다운 결실의 계절을 펼치시는 창조주 하나님, 오늘 복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더 높아진 파란 하늘과 두둥실 떠가는 양떼구름으로 가을이 슬그머니 다가온 때에, 계절을 통해 주시는 평화를 바라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진리로 영혼을 채워 주님의 평화를 누리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요일4:3)

 

 

가장 너른 품

지난주에 이 영상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다행히 오늘 성서일과를 통한 성경말씀과 일치하는 것 같아, 영상을 나누려고 한다.

 

오늘 말씀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게 된 기쁨과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기쁨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다.

 

생명의 자연적인 본성, 본능은 이와 같은 것 아닌가? 하나님은 우리가 만나는 존재 중에서 가장 크신 분이다. 부모님의 너른 품도, 어미 오리의 날개 아래 품도, 세상에서 그 어떤 것보다 크다 말할 수 있지만, 영적으로 보자면 하나님의 품은 최고 존재의 품이며, 우리는 그 품에서 영혼이 힘을 얻고, 영기를 얻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는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말씀에 제목을 붙인다면 어느 것이 적당할까?

양을 잃은 주인’, ‘주인을 잃은 양

 

일단 우리는 이 비유의 말씀을 공감하며, 감동이 된다.

그런데 저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부분적으로는 공감을 하지만, 동의는 할 수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있다. 생각해보면 아찔한 것인데, 특히나 오늘 세상의 모습을 보면서 권력과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럴 때, 일어나는 일이 섬뜩하기까지 하다.

2. 공감은 하나 동의할 수 없는 사람들

주님께서 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발단에는, 주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이 문제가 됐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런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어 수군거렸다.

 

마태복음과 달리 누가복음은 잃었던 것을 찾은 것에 대해서 3가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마태복음에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 대한 이야기만 나온다. 그런데 누가는 잃어버린 양을 찾은 것에 대한 비유(15:4-7),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비유(8-10), 그리고 탕자의 비유로 알려져 있는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11-32)를 연속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누가는 왜 같은 주제의 내용을 세 가지나 연속적으로 들려주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별로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이유는 이렇다.

사실 예수님의 설교는 16장 13절에서 일단락이 지어진다. 예수님의 설교를 모두 들은 바리새인들은 어떤 반응을 내놓는가?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16:14)

 

비웃었다. 민중들을 개나 돼지 취급을 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비유는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같은 급’으로 대우하다니 말이다.

 

우선 ‘잃은 것을 찾은 것에 대한 이야기’ 자체는, 자기들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공감을 할 수 있는 내용이다.

첫 번째 비유에서 잃어버린 것이 없다는 이야기에 대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안도감을 갖는다. 주님은 이들이 실상으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머리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아시기에 드라크마의 비유를 또다시 말씀하신다. 여기에서도 비유 자체만으로는 안도감을 갖는다. 그런데 말씀을 들으면서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데가 있다.

세리와 죄인들은 자신들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고, 세상에서 없어져도, 사라진 대도, 예수님의 표현대로 ‘잃어버려도’, ‘재산피해’와 같은 손실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면 곧 손실이나 재산피해와 마찬가지다. 또 자기들을 ‘같은 급’으로 비유되고 있는 것도 못마땅한 부분이다.

 

주님께서, 이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모르시겠는가? 외식하는 자들의 머리에 뭐가 들었는지 다 아신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마음이 일고 있는지 아신다. 그래서 이번에는 잃어버렸다가 찾은 아들의 이야기로 곧바로 옮겨가신다.

수사학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보라. 앞의 두 이야기는 물질적 손실과 금전적 손실이 소재였다. 그런데 세 번째 비유는 인격적(인간적) 손실에 대한 이야기다. 처음 두 이야기를 통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귀가 솔깃했다. 그러나 언짢고 불편한 부분,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을 남긴 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세 번째 이야기에서 맏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 등을, 차남은 세리나 죄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비유하신다. 주님은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인식이 틀렸음을 지적하신다. 동시에 인격적인 손실을 결코 허용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인식을 바로 잡는 것은 무엇인가? 바리새인 서기관과 모든 세리와 죄인들은 ‘급’이 틀리다고 생각했는데, 세 번째 이야기에서 보자면, 첫째 아들, 둘째 아들, 그 소행이 다를 뿐 아버지 앞에서는 다 같은 아들일 뿐이다. 같은 급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

그래서일까, 자기의 계급적 우월감을 가지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을 개나 돼지 취급을 할지도 모르겠기에, 주님은 세 번째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 돼지나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며 연명한다고, 그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품꾼이라도 됐으면 하는 바람을 적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취급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아버지의 자녀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인격적 손실을 결코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은 집나간 자식을 동구 밖까지 나와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알 수 있다. 누가 뭐라고 할 수 있는가?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손실만큼은 허용할 수 없는 것이다. 양을 잃는다 해도, 금전적인 손해를 본다고 해도,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들을 잃는 것,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다른 상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다.

 

며칠 전 이재명 성남시장이 가슴팍에 세월호 사건을 기억하게 하는 노란리본을 달고 있으니까, 어떤 지나가는 아주머니가, 반말로 ‘이젠 지겨우니까, 그것 좀 떼면 안되냐’고 소리쳤다. 이재명 시장이 “우리 어머님의 자식이 죽어도 그런 말 하실 겁니까?” 묻자, ‘그거랑 내 자식 죽는 거랑 어떻게 같으냐?’ 틀린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의 생명과 운명 앞에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다. 내 생명은 귀한데, 다른 생명은 귀하지 않다? 다른 사람은 저런 재수 없는(?) 사고를 당해도 나는 아닐 것이다? 그런 장담을 할 수 있는 것인지?

 

톨스토이는 ‘아시라아의 왕 에사르하돈’의 이야기에서 포로로 잡아온 라이리에 왕을 어떻게 죽일지 침상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한 노인이 나타난다.

 

노인은 왕에게 묻는다.

“라이리에는 처형하고 싶은가? 네가 바로 라이리에다.”

에사르하돈은 “그럴 리가”라고 말하면서 “라이리에는 라이리에고 나는 나다.”라고 한다.

노인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의 착각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몇 가지 경험을 하게 한다.

에사르하돈이 저지른 일을 그 대상이 되어 똑 같이 경험하는 것이다.

 

노인은 마지막 말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들어보라.

 

“너는 네가 속한 그 하나의 생명 안에서만 네 생명을 값진 것으로도, 보잘 것 없는 것으로도 만들 수 있고, 길게도 짧게도 할 수 있다. 너는 네 생명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갈라놓는 장벽을 없애고, 다른 사람을 네 자신처럼 여기고 사랑해야 네 생명을 값지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너에게 주어진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

네가 네 생명을 유일한 생명으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희생시켜 번영을 누리고자 할 때 네 생명을 스스로 해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네 생명만 줄어들 뿐이다.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은 네 권한이 아니다.”

 

우리 존재의 가치와 생명에는 급이 다르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것이다. 예수 믿어도 성공신앙 축복신앙 번영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의 사람이 많다.

 

 

3. 잃어버린 양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잃었다가 다시 찾으심으로 말미암아 기뻐할 이는 누구인가?

7절에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 기뻐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단순히 범법자들이거나 윤리적인 죄를 짓거나 도덕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 죄인이 아니다. 그것은 누가 붙인 이름인가?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이 정죄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세 번째 비유에서 동생이 돌아와 잔치가 벌어지자, 형은 그 동생을 정죄하고 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아들이 돌아왔다고 말이다.

 

13절에는 둘째 아들이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라고 말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산을 탕진했는지는 모른다. 형의 말이 ‘맞다’면 정말 비난 받아 마땅하고 ‘정죄’받아 마땅하다. 아니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창녀들과’ 탕진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허랑방탕했다는 말에는 그와 흡사한 쾌락과 유흥으로 영혼과 정신이 타락한 측면도 있으니, 비꼬는 말이라고 해도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32절에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얻은 아들’로 대하고 있다. 정죄의 대상이 아니라 부모를 잃은 자식이었다.

 

그는 아직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지 못한 채, 자기 생각만 가지고 아버지의 울타리를 넘었다. 주님은 세상을 이리가 가득하다고 말씀하신다. 탐욕과 욕심과 시기와 질투의 이리들이 으르렁된다. 우는 사자와 같이 집어삼킬 자를 두루 찾는다. 유혹과 미혹으로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사자들 같다.

세 번째 비유의 말씀에서는 세상은 얼마나 냉혹한지, 일만 시켜놓고 돼지들이 먹는 주엄열매로라도 배를 채우려고 하지만 주는 사람도 없다.

14절을 보면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에도 괜찮았다. 이렇게 저렇게 살 방도가 있고, 그저 자유가 좋을 뿐, 상황은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크게 흉년이 들자 그가 비로소 궁핍함을 느꼈다. 그제서야 길을 잃어버렸음을 안 것이다. 마치 양이 길을 잃어버린지 모르고 풀을 뜯고 있다가 나중에야 길을 잃어버린 것을 깨닫는 격이다.

 

그런데 아버지 입장에서 둘째 아들을 생각하며, 어떤 마음이 들까? 부모를 잃은 자식이라는 마음일까,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일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세상일에 상처를 입었을 때, 찾으셨을까? 안찾으셨을까?

실패와 절망과 아픔을 겪었을 때, 찾으셨을까? 안찾으셨을까?

길을 잃었을 때, 큰 어려움을 만났을 때,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였을 때는 어땠을까?

나는 맏아들 같은 생각으로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이유를 알 수 있었을까? 아닐까? 아니 그 찾으심의 의미조차 이해했을까? 못했을까?

 

지금 예수님은 죄인들과 세리들과 식사를 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애타게 찾으셨던 이들과 식사를 하고 계시다. 마치 ㄹ자식을 잃은 부모의 아픔과 절규에 이젠 지겨우니, 그만좀 하라고 하는 냉혹하고 추악한 세상이다. 우리가 전도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맏아들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없을까?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양을 잃어버린 사람은 어디까지 찾아 나서게 될까? 사람은 자기 목숨이 닿는 데까지 갈 수 있다고 말한다고 치자. 그 이상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어디까지 찾아 나서실까? 십자가 죽음의 자리까지도 나아가셨다. 바로 우리를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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