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4일  성령강림절 후 16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9월의 첫 번째 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역작들이 넓은 들녘에서 고개를 숙이며 황금 노을을 이루어 가는 계절에, 알곡 되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원하여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신앙의 아름다운 열매를 내어 놓을 수 있도록 변화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4:30)

 

 

1. 흔들리며 피는 꽃

인생에서 흔들림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사람에 따라서는 진동하고 요동치는 경험을 한 사람도 있다. 하나님께서 흔드셨다고 고백되는 경험도 있겠고,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악한 세상이 그렇게 한 경험도 있겠다.

그런데 믿음의 고백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셨고, 반석이 되어주셨고, 산성이 되어주셨다. 인생의 풍랑과 파도에 떠밀려 표류하는 인생 같았지만 하나님은 구조선을 보내주시고, 끝내 찾아주셨다.

‘왜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것을 겪게 하시거나 내버려 두셨을까?’ 이런 물음을 가져볼 수도 있다. 깨달아 아는 것도 있고, 도저히 그 뜻을 분별할 수 없는 것도 있다. 그러나 저는 이런 물음을 가질 때마다, 도종환의 시가 떠오르곤 한다.

 

“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흔들림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깨우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고. 믿음은 견고해진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영광이 꽃피어나길 바라신다. 이것을 믿는 것이 복음이다.

 

 

2. 흔들릴 때 붙든 복음

베드로가 공회원들 앞에서 담대히 말씀을 전한다. 스데반이 공회원들 앞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말씀을 전한다. 빌립이 에디오피아의 유력한 인사였던 관리에게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씀을 증거한다. 바울 역시 수많은 고난과 위기와 환난 가운데에서도 지치지 않고 복음을 전한다.

 

그런데 이들 모두의 근간에는 바로 이점, ‘흔들림, 그리고 그 때 붙든 복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흔히 이들의 전도가 성경에서 배워서 알고 있는 것을 전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이면을 면면히 살피다 보니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인생의 위기와 고통, 흔들림, 그 이상의 어떤 고난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나고, 인간 개인의 자아와 독선이 아닌 말씀이 흥왕하는 역사(19:20)와 은혜가 있었다. 그리고 복음을 믿음으로 붙들었던 어떤 경험들이 있다.

 

예를 들어보자. 흔히 바울에 대해서, 다메섹 도상에서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신비한 사건 때문에, 그는 변치 않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는 만성 말라리아로 추측되는 고질병으로 고통을 당했고, 평소에는 잠잠하다가, 스트레스가 극심해지는 상황에서는, 재발되어, 매우 중요한 순간 마다 일을 그르칠 뻔한 적이 많았다. 그러나 그 흔들림 속에서 ‘약할 때 강함 되시는 하나님’을 매순간 체험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사례들이 있다. 감옥에 갇혔을 때, 놓임되는 경험도 했고, 죽을 만큼 태장을 맞았을 때, 살아나는 경험도 했다.

 

다른 신앙의 인물들은 안 그랬을까?

 

증거되고 인용되고 있는 구약의 성경이야기들은 단순히 지식이 아니라 예수를 통해 체험한 간증들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내용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음으로 성도들을 복되게 하셨던 하나님의 구원을 ‘현실태’로 경험했다. 전도의 현장과 삶의 현장에서 말이다.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 주셨던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였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참자유와 생명의 기쁨을 주시려고 역사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속의 섭리였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방황하던 사건은, 예수 안에서 내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아도,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 속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에 땅으로 인도하셨듯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가져다주신 하나님이셨다.

성경을 통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은 사도들과 제자들과 성도들의 복음적인 스토리가 됐고, 복음적인 스토리는 다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으로 전해졌다.

 

이러한 증거들 이면에 흔들림 속에 믿음을 붙들고 승리한 간증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 환난 중에 소망 잃지 않고, 기도와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며 힘과 용기를 냈다. 순종하고 충성을 다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은혜가 흥왕하는 역사와 사건을 일으켜 주셨다.

 

박복동 성도의 암투병기를 짚어보자. 우리는 이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존과 만난다. 그 이야기는 성경 속에서 치유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와 맞물려 있다. 또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보시고 병자들을 고치신 예수님의 치유사역 속에 놓여있다.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전도할 때, 날 때부터 발을 쓰지 못하던 사람이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어,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선포하자, 그가 일어나 걸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걸인에게 ‘내게 은과 금은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주노니,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선포했을 때, 그가 일어나 걷는 역사가 발생했다. 이런 이야기들과 맞물려서 현대판 사도행전의 새로운 페이지가 되고 있는 것이다.

 

 

박복동 성도에게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믿음 없을 때, 확신 가지라고, 믿음 연약해질 때, 강하고 굳센 믿음을 가지라는 주님의 선물이다.

 

예수님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이면에는, 머리로 알고 믿는 논리와 지성을, 넘어 있는 것이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며, 복음에 눈 뜬 성도들의 값진 체험이 있다. 오늘날에도 이것이 없으면 전도하고 복음을 전하기 참 어렵다. 이것이 없으면 설득하려고 들 테고, 그러면 논쟁에 빠지고 무식한 변론에 그쳐 복음을 전하고 전도하는 것은 중단되게 된다. 들음만으로 믿어 전하는 것보다 체험과 경험을 통해 확신하여 전하도록, 어쩌면 고난, 질병, 가난, 실패, 괴로움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선택하여 부르시기 위한 은총의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 전도하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하도록 허락하신 선물인데, 까마득히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기에 전도하자. 사도행전의 또 다른 페이지를 우리 교회와 신앙의 역사속에 기록하자.

 

김성금 집사님이 유방암으로 고통 중에 있는 지인에게 교회에 나오라고 권했다. 성경에서 배워 아는 내용을 전한 것이 아니라, 체험하고 경험한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을 믿기에 소망을 가지도록 복음을 전한 것이다.

 

누구나 고난을 당하고 속상한 일을 만난다. 신경안정제 한 알이면 이런 것들을 한 방에 해소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하여지며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신앙체험이 있는 이들은 뭐라고 말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흔들고 깨우셨다고 여기고 믿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와 그 믿음이 사명이 되어 주님의 도를 전하는 사람이 된다. 하나님은 그 때마다 우리의 힘이 되어주시고 능력이 되어주신다.

 

 

3. 성령이 하시는 일

인생의 흔들림, 요동, 진동 속에 믿음의 꽃, 하나님의 영광의 꽃이 피어나도록 하는 영적인 원리는 무엇인가?

 

바로 성령이다. 성경은 이러한 것들이 가능하도록 역사하고 일하시는 분이 성령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기에 오늘,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성령을 받았는지 묻고 있다. 우리 역시 성령 안에서 은혜와 믿음이 충만한가?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어떤 성도들을 만났다. 성령을 받았는지 묻자, 그들은 듣지도 못했다고 말하고 있고, 요한의 회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 예수의 이름을 듣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성령이 임하셨다.

 

그런데 그 충만함은 누가 주는 것일까? 어떻게 받는 것일까? 목회자? 대형교회의 웅장한 분위기? 각 섹션의 전문성으로 갖추어진 사역?

그렇게 얻은 것, 은혜 충만하다고 돌아가는 것은 성령과 유사한 감정일 뿐이다.

 

어떻게 받는 것인가?

예수의 이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에 이르러 받는 것이다. 주님은 그 이름을 믿는 이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리라고 약하셨다. 그 분께서 우리에게 오신다.

 

성령을 통해 체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첫 번째는 예수님의 능력이다. 예수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굴복했고,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체험했다. 병마가 물러가고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났다. 오늘 말씀 뒤에 11절과 12절에서 증거하는 것을 보라.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요한복음14장 14절.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말씀하셨다.

 

예수의 이름을 굳게 믿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음으로 여러분의 삶 가운데, 예수의 능력이 나타나시기를 성령이 역사하고 증거를 나타낼 줄로 믿으라. 여러분을 사로잡고 있는 근심, 걱정, 염려와 불안이 있다면, 우리를 복음의 빛 가운데로 불러내어, 믿음의 푯대를 바라보도록 요청하고 계신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길 원하신다.

 

두 번째는 구원의 확신이다. 주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사하신다. 그리고 위로와 용기를 내기를 바라신다.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찾아오신 주님을 기억하라. 그를 책망하고 꾸짖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주님께서 심문받고 계실 때, 베드로는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다. 우리가 주님을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살아갈 때, 주님은 여전히 십자가 고통을 당하고 계시다. 그러나 닭이 세 번 울 때, 베드로가 깨우쳤던 것처럼, 성령이 근심함을 통해, 우리 역시 죄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우리를 용서와 사랑의 빛으로 걸어 나오도록 부르셔서 용서와 사랑의 복음을 전하기를 바라신다.

 

세 번째는 복음을 경험하는 간증이 되게 하신다. 고난과 어려움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꽃피게 만들 은총을 허락하신다.

 

사도행전에서 성경은 아볼로가 그 출신지의 사람답게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었다. 학식과 경험이 풍부하고, 성경에 대해서도 능통하고 남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와 능력을 갖추어야 주님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연설이고 논설일 뿐이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를 부담 없는 친교의 자리로 불러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가르쳤다고 전한다. 그의 인격과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했던 자상한 배려였다. 우리도 이런 모습을 배우자.

아볼로에게도 성령이 임하는 체험이 있었다. 은연중에 알려준 가르침과 하나님의 도는 아볼로에게 성령이 일게 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는 열정으로 사모함으로 바뀌었다. 아볼로는 마음이 뜨거워졌고 아가야 지역에 가서 더욱 헌신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에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그 지역의 제자들에게 친히 편지를 써서 그를 영접하도록 했다.

 

(민로아 선교사 영상)

 

자신의 고난과 삶을 동일한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흔드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해하고 찬송을 가르쳐주었던 복음이 여러분 삶 가운데 있기를 축원한다. 그리고 승리하는 믿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시라.

 

Leave a Comment

빠른 문의

이메일로 문의를 남겨주시면 빠른 시간 내에 연락드리겠습니다.

Not readable? Change text. captcha t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