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17일 성령강림 후 9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거룩하게 구별된 주님의 날에 저희들을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불볕더위와 장대비가 범벅이 되어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계절에, 주님이 주실 안식과 평안을 사모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두려움과 불안을 몰아내고 기쁨과 소망으로 채워지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옶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3:2)

 

 

  1. 여름과일 한 광주리

 

#1. 호주에 있는 친구가 딸에게 한국 동요를 가르쳤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아빠가 매어놓은 새끼줄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어릴 때는 몰랐는데 다시 들어보니까, 참 짠한 노래다. 특히 2절에서 말이다.

 

“애들하고 재밌게 뛰어 놀다가 아빠 생각나서 꽃을 봅니다.

아빠는 꽃 보며 살자 그랬죠. 날 보고 꽃 같이 살자 그랬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을 물려주고 싶으셨던 아빠, 그 기억으로 꽃이 피어나는 세상을 만들어가며, 또다시 자녀에게 유산으로 물려줘야할 사명 같은 것이 노래로 심금을 울리게 한다.

 

그런데 한국말이 서툰 친구딸이 “새끼가 죽었어요?” 물었다. “새끼줄을 따라” 이 가사 때문이었다.

 

#2. 1절에서부터 3절까지, ‘여름과일 한 광주리’의 환상은 무엇일까?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모스에게 ‘여름 과일 한 광주리’를 보여주셨다. 여름 내내 지중해 연안의 따가운 태양아래서 익어간 당도 높은 과일이었다. 가을축제 때 가장 알천인 것을 골라 신에게 바쳤다.

그런데 아모스가 본 것은 그게 아니었다. 여름과일이라는 말이 ‘카이츠’인데 2절에 ‘이스라엘의 끝’ 거기에 나오는 ‘끝’이라는 단어의 음가가 ‘케츠’이다.

‘여름과일 한 광주리’는 축제예물이 아니라 이방의 포로가 되어 잡혀갈 이스라엘의 마지막 운명을 말해주고 있었다.

3절에 ‘궁전의 노래’라는 말이 있다. 이 ‘궁전’이라는 단어는 ‘헤칼’이라는 단어인데, 궁궐로도 번역되고 성전으로도 번역되는 단어다. ‘노래가 애곡으로 변할 것이며’ 노래라는 단어 ‘쉬로트’는 본래 ‘샤로트’(성전 가수, female singers)였을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3절의 예언은 성전이든 궁궐이든 시체가 하도 많아서 사람들은 시체를 무덤덤하게 내버릴 뿐, 여가수가 울부짖는 애곡으로 그날의 참상을 대신 말할 수 있게 된다.

 

#3. 이 예언의 말씀을 듣는 이들을 생각해 보자. 귀찮거나 거슬린다. 정말 그 위기와 어려움이 닥쳐왔을 때였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때는 사람들의 마음이 허둥지둥 대며 두려움과 불안이 찾아온다. 지금 이스라엘의 때는, 여로보암 2세 때, 한 여름 뜨거운 태양처럼 더없는 경제적인 번영과 풍요를 누리고 있을 때였다. 이 풍요와 번영에 취해서 재미만 바랄 뿐, 어느 누구도 산통을 깨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아모스2:12에는 “너희가 나실 사람으로 포도주를 마시게 하며 또 선지자에게 명령하여 예언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흥에 빠져 포도주에 취한 세상, 예언자의 말을 거부한 세상이었기에 ‘여름과일 한 광주리’가 자축의 의미로 쓰이는 것은 좋지만 ‘이스라엘의 마지막 운명’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그 말은 광인의 말과 같을 뿐이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바로 앞의 내용을 보면, 아마샤는 아모스에게 유다로 돌아가라, 거기서나 예언하라고 한다. 7장 13절에 “이는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임이니라.” 인간의 화려함은 수호할 줄 알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청종할 줄 몰랐다.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사용하셔서, 자기 영토의 일이 아니었기에 모른척 해도 그만이지만, 남유다의 사람을 북왕국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의 마음은 영토와 지역을 초월한다. 터키에서 쿠데타가 일어났고 프랑스에서는 사상 유래 없는 테러가 일어나서 많은 사상자들이 생겼다. 온 세계가 그것을 괴로워하고 안타까워한다. 점점 세상의 폭력이 악화되고 그것을 막을 길이 없어, 혼란에 처하고 있다. 그것을 염려한다. 그것을 저지른 세력이야 명분이 있고, 신의 뜻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아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는 일이다. 그렇기에 자국과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사람들의 가슴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경보음으로 울리는 것이다.

  1. 사회의 붕괴

오늘 말씀을 보면 한 사회 내에서,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에 대한 경보음을 들을 수 있다.

 

4절에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사회적인 정의와 공의가 무너지고 있는데도 그것을 방관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는 뿌리부터 썩어서 결국은 붕괴를 자초하고 만다는 것이 세계사의 경험이다. 그렇기에 많은 설명이 필요 없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성경에서 불법을 저지르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들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거나 안 믿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월삭을 지키는 이들이며, 안식일을 준수하는 사람들이다. 믿음이 신실하다고 추앙받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한다. 에바를 작게 한다는 것은 더 많은 이윤을 남기려고 욕심을 부리는 것이다. 세겔을 크게 하는 것은 같은 값에 적게 주면서도 마치 많이 주는 것처럼 눈속임 한 것을 말한다.

 

그 거룩한 날까지 욕심으로 채우고 이윤을 남기기에 여념없는 사람들, 하나님의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고 공의를 땅에 던진 것이다(암5:7).

 

그런데 도대체 이런 불의와 부패가 한 사회의 붕괴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서1:15)

 

중국의 근대문학의 효시이자 오늘날까지도 인간정신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루신의 광인일기가 생각났다. 어느 날 광인은 사람들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다. 심지어 집에서 키우는 개까지도 그렇다. 자기에 대한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다. 알아보니 자기를 잡아먹으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심지어 폐병환자가 만두를 사람피에 찍어먹으면 낫는다고 하는데, 자신을 먹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것이라 생각했다. 밤새 주도면밀하게 조사를 해보니 역사의 페이지 속에서 구불구불한 글자를 발견했는데, ‘인의도덕’이었다. 그 속에서 어렵게 찾은 암호가 있었다. ‘식인’ 온통 이 두 글자가 새겨 있었다. 사람들이 사람을 잡아먹는 방식은 교묘하다. 일단 패거리를 지어 그 시선과 눈빛으로 사람을 죽인다. 말속에는 전부가 독이 있고, 웃음 속에는 칼이 있다. 자기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이빨은 모두 희고 번쩍번쩍하는데, 그것이 사람을 먹는 연장이다. 그리고 모두가 동시에 한 사람을 가격해서, 살인함으로 누가 죽였는지 모르게 한다. 자신을 익명성 속에 던짐으로 양심과 죄책감으로부터 지켜낸다.

그 형에게 ‘형님도 식인을 일삼는 사람들과 패거리 짓지 말라’고, 자기를 잡아먹은 다음에 형님도 잡아먹을 거라고 충고한다. ‘광인의 말이다.’, ‘과대망상증에 걸린 미친놈의 말이다.’ 그런 표정을 짓는 형에게 광인은 직격탄을 날린다. “전에 소작인이 도조를 깎아 달라고 했을 때, 안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형님도 분명히 사람을 잡아먹은 것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한다.

자신은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하면서, 남에게는 먹히지 않으려하기 때문에 힐끔거리고, 4천 년이나 사람을 먹어치워 온 역사인데, 그 역사를 회개 하지 않으면, 자신도 먹히고 만다고 광인은 말한다.

 

처음에 독자들은 광인의 말을 미친놈의 말로 듣고 있다가, 나중에는 정말 미친 것은 누구일까, 역전되게 된다. 어느 누구도 나는 사람을 먹지 않았다고, 그래 본적이 없다고 말하지 못한다. 심지어 형님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불쌍한 소작인의 도조를 깎아주지 않은 명백한 증거가 있고, 그 때 그 소작인을 희고 번쩍이는 욕심의 이빨로 먹은 것이다.

 

  1. 하나님 나라를 가꾸어 가자.

이렇게 본다면, 오늘 말씀을 대하면서 ‘5절의 말씀처럼, 6절의 말씀처럼 나는 하지 않았고, 그렇게 할 처지와 형편이 되지도 않는다.’고 혐의를 부인할 수 있을까? 나는 손해만 본 피해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와 상관없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보편적인 정의와 공의를 어긴 사람들과 동일시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리고 면죄부를 주거나 변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마 만큼 우리가 예수를 더 철저히 믿고, 참제자가 되어 따라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7)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

“너희가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면 세리와 다를 바가 무엇이며,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이방인과 다를 바가 무엇이냐?”(마5:46,4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예수님께서 온 몸으로 부르신 노래들은,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노래였다.

루신은 4천년 중국의 역사, 혹은 세계의 역사는 식인의 역사였고, 아직도 식인이라는 두 글자가 세상 속에 숨어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보고 있다. 성서는 어떻게 말하는가? 역사와 세계 속에 라멕의 노래가 불리워지고 있다.

 

에녹의 고손이었던 라멕은 아다와 씰라 두 아내를 맞이하고, 이런 노래를 자랑스럽게 부른다.

“아다와 씰라는 내 말을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은, 내가 말할 때에 귀를 기울여라.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면, 라멕을 해치는 벌은 일흔일곱 갑절이다.”(창4:23-24)

 

자신을 얕잡아 보지 말라고 자기에게 조금만 피해나 손해를 입혀도 일흔일곱 갑절로 앙갚음 해주겠다고 말한다. 세상에서 라멕의 노래를 부르지 않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밖에 지나가는 사람의 표정들에서 라멕의 자화상이 아닌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 여러분은 어떤가?

 

다시 말씀으로 돌아와 보자. 10절에, “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게 하며 모든 사람에게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게 하며 모든 머리를 대머리가 되게 하며 독자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애통하듯 하게 하며 결국은 곤고한 날과 같게 하리라.”

결국 인간의 욕심과 욕망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정의와 공의를 쓴 쑥으로 바꾸고 던져버리게 한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먹고 먹히는 식인의 세상은 그 자체로 파국을 맞게 될 것이다.

 

디모데전서6장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탄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돈 자체가 일만 악의 뿌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버리고 돈을 사랑함이 그렇다는 말이다.

 

세계 도처에서 비극이 일어나고 우리나라에서도 그 전조현상이 깜빡이며, 라멕의 노래가 방방곡곡 울려퍼지는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자녀를 잃고 애곡하는 라헬의 애곡도 울려나고 있다. 그 속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는 무엇일까?

 

우리는 라멕의 노래가 아니라 예수님의 노래를 부르며 부지런히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확장되기를 원하신다.

 

나 하나 바뀐다고, 주님을 잘 믿는다고 세상이 바뀌며, 파국을 면할 수 있을까? 이런 회의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저는 아모스를 하나님의 울림통으로 사용하셨던 점에 주목해본다. 드고아의 목자였던 그가 오지랖이 넓어서, 북왕국까지 올라가 쓸 데 없는 참견을 한 사람인가? 하나님께서,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분별된 마음을 주셨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내가 당하는 일이 아니기에 상관없다고 하는 마음이 아니라,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을 슬퍼하고 터키에서 일어난 일을 가슴아파하며 이 한반도에서 일어날 일들을 염려하고 있다면 그 역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이다. 우리 이웃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되며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어,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며 산다면, 예수님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그 분별된 마음을 가지고 라멕의 노래가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의 노래를 온몸으로 부르며 살기를 바라신다.

 

노자는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 아무것도 없음 때문에 그릇의 쓸모가 생겨난다.

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식이위기. 당기무, 유기지용.

 

그러므로 있음은 이로움을 위한 것이지만 없음은 쓸모가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고유지이위이. 무지이위용.”

 

우리가 없음 때문에 하나님의 쓸모가 생겨나고 능력이 채워진다.

 

아모스의 결문이자 결론과도 같은 말씀을 보면(8:15)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 심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다시는 뽑히지 않기를 바라시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며 성령의 역사와 능력을 따라 살기 위해 매사 노력하는 사람이다.

 

동요처럼 채송화, 봉숭아, 나팔꽃 어울리게 핀 꽃밭에서 꽃을 보며 꽃처럼 살자는 노력과 다짐이 오늘 이시간 우리 심령 속에 가득 일어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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