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환우돌봄에관한기록‬ 4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4:13)

카프카의 [변신]이라는 중편소설이 있다.
암환자와 그를 돌보는 가족들은 이 글을 세심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1.
그러나 그 전에, 이야기부터 하자.

최선과 차악, 그 고민 속에서 ‘무엇을 주어야 하며, 줄 수 있는가?’

유한자의 한계와 상황 속에 찾아오시는 무한자의 현존 앞에,

이런 물음이나 생각 자체가 사실은 교만일지도 모른다.

이것을 넘어서지 못하면 끊임 없이 반복되는 최선과 차악의 메비우스 띠라는 함정에 빠지고 만다.

2.
15년 전이었다. 그 때도 나는 ‘나’로 통칭되는 것을 묻고 있었다.

큰 포부와 기대를 가지고 선교의 불모지라고 곳에 목회를 나갔다.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라.’ 찬송에 불탄 젊은 목회자의 뜨거운 가슴,

그러나 그 가슴은 얼마지나지 않아 냉가슴으로 바뀌고 있었다.

철부지 어린이 네 명을 데리고 용케도 1년을 버틴 것 같다.

삶의 성과가 없는 것을 참지 못하던 나.

결과가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서 결과치에 사로 잡혀있던 것을 그 때 깨달았다.

네명을 데리고 예배도중에, 이차저차한 일로 큰 형이 동생을 때렸고,

싸움이 일더니, 도저히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됐다.

이렇게 예배를 바치는 것을, 하나님께 큰 죄라도 되는 줄 알았다.
(지금은 다른 생각이지만)

화가 나서 예배를 얼른 마무리 짓고, 그날은 아이들과 놀아주지도,

맛있는 것을 먹지도, 어디를 놀러가지도 않고 야단을 쳐서 보내버렸다.

한 아이의 엄마가 무슨 일인가 하여, 교회를 찾아오셨다.

한참을 말씨름을 한 뒤에, 결국 손을 들었다.

사이사이의 이야기는 상상에 맡긴다.

그리고서 나의 진심을 말했다.

“제 능력이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제대로 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 어머니도 태도가 바뀌시더니

“전도사님이 왜 주는 게 없습니꺼? 사랑을 주시잖아예~”

이 말씀이 곧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하시는 위로의 말씀이었을까?

내가 손에 잡힐 만한 뭔가를 구체적으로 줄 수 없다고 생각했을때,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누군가에게는 뭔가 큰 것을 받는다고 여기는 경우도 있다.

그 때 알았다.

그것은 나도 아니고, 내가 주는 것도 아니고, 바로 하나님의 현존하심이었다는 것을.

3.
그러고 보니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또 경험한 바가 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정말 난, 이 말씀대로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첫 목회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처음에는 생존도 어려웠고(그것이 뭐든 팔 걷어 붙이게 했지만)

교회를 유지할 재정도 어려웠다.

아이들 너댓명과 내가 얼마나 헌금을 했을까?

하루는 하나님 앞에 오기를 부렸다.

“하나님 이 5천원으로 무슨 하나님의 나라와 일을 위해 하며 영광을 나타납니까?”

봄날, 블랙라벨의 오렌지는 당도가 으뜸이다.

너무나 먹고 싶어서 샀다.

그곳에 정착한지는 얼마 안됐지만, 친절하게 도와준 마을 주민들이 있었다.

고마운 사람들, 연고가 없기 때문인지 외로움에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그랬다.

늘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코스처럼 향해졌다.

한담을 나누는 일이 전부였고, 복음을 전하는 일은 용기도 나지 않았지만,

그냥 만나서 정담을 나누는 자체가 좋았다.

오늘은 뭐라도 내 놓을 손이 있어서 좋았다. 늘 빈손이어서 미안했고,

받기만 해서 고마웠는데 오늘은 작은 거라도 있으니 마음이 좋았다.

그럴려고 그런 것은 아닌데, 습관처럼 그 코스를 다 돌고나니

오렌지는 어느새 남아있지 않았다.

전도의 목적도 없었다. 의도도 없었다.

아니, 그럴 용기 자체가 없어, 늘 괴롭기도 하고 죄책감 같은 것도 있었다.

그날 하나님께서 선명하게 들려주신 말씀과 깨달음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현존하심을 나타내고 계셨다.

5천 원이면 하나님의 일을 못하며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는가?

‘나눔과 정담’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미 그것을 나누고 있지 않았는가?

꼭 마음이 열리지 않은 이에게 “예수 믿으라.”고 해야 전도인가?

‘그렇지 않으면 구원 못받는다.’ 이런 식의 태도면, 복음이 아니라 저주나 다를 바 없잖은가?

나는 믿는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에게는,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라도 그 유한자의 삶 속에 무한자의 현존을 드러내신다.

4.
이것이 관건이다.

최선과 차악 사이에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 그 감사와 은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들지 못하는 어리석은 우리가 하나님을 보고 복음을 듣게 하소서.
주님을 영접한 ***성도가 주님의 현존하심을 체험하고 알아가도록 하옵소서.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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