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마9:23)
1.
15년 전, 어머니는 유방암을 앓으셨다.
당시의 통계로 어머니 상태의 5년 생존율은 40%라고 했다.
주치의는 부정적이었다.
의사들이 엄연한 사실을 말해야 하기에 냉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그보다 지위가 더 위에 있는 의사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은퇴를 앞두고 있었는데,
“사람이 어찌 살고 죽는 것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맡기시고, 의사는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병원의 면담은 짧다. 게다가 무엇을 물어야 할지, 질문조차 나오지 않는다. 당황스럽기 때문이다.
환자와 가족은 의사의 능력과 자질을 의심하고,
더 좋은 병원 명성이 있는 의사를 찾기 마련이다.
누군가가 이 병을 잘 고칠 수 있다는 명성을 찾아 희망을 찾으러고 한다.
그런데 이 분의 말에 큰 위로가 됐다.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이 말 한 마디는 어떤 말보다 희망과 용기를 내게 했다.
최선을 찾을 수 없다면, 차선을 찾는 것은 아직도 뭔가 기댈 것이 있을 때이다.
절망적일 때, 사람들은 차선을 찾는 것이 아니라 최악을 피하는 방법을 생각한다. 차악을 찾는다.
‘의사가 최선을 다한다고 한 이상, 먼저 차악을 선택하지는 말자.’
다짐하며, 그리고 매일 찬송을 불러드리고 말씀으로 용기를 얻고 기도했다.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때로 건강에 대한 걱정이 있긴 하지만, 건강하시다.
2.
OOO 성도의 병실을 매일 같이 찾으면서 찬송가 382장 ‘너 근심 걱정 말아라.’를 매일 불러드렸다.
예수님은 그의 마음을 움직이고 계셨을까?
영접기도를 마칠 때, 그 입에서 ‘아멘’이라는 (어쩌면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고 했을 수도 있지만) 말을 들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 한마디는 분명 신비의 세계로 인도하리라.
3.
병실을 나오는 길에, 마침 담당의사를 만났다.
그는 목회자임을 알아보고, 데스크로 안내하더니,
보호자의 동의 아래, 병세를 소상히 이야기 해줬다.
아내 권사님은 다시 주저앉았고, 감정에 복받쳐 서럽게 우셨다.
울음을 참을래야 참을 수 없어, 같이 울었다.
신앙의 기대와 희망은 현실이라는 장벽과 절망에 부딪쳐
잠시잠깐의 위로와 평강을 깨뜨리거나 흩어놓는다.
그 때,
하나님은 ‘속 사람을 강건케 하시기 위해’ 더 큰 믿음을 시험하신다.
그리고 다시 과제 앞에 놓인다.
희망과 기대를 주어야 할까, 어떤 준비를 도와야 할까?
최선인가? 차악인가?
나는 뻔한 답 외에, 무엇을 주어야 하며, 줄 수 있는가?
오늘 예수님을 영접한 날이라는 사실을 잊은채…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