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22일 성령강림절 후 1주, 삼위일체주일 및 웨슬리회심기념주일

 

보혜사 성령을 통하여 연약한 인간을 생명과 진리로 이끄시는 사랑의 하나님, 거룩하게 구별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세상 풍조에 휩싸여 살면서, 성령의 음성에 예민하지도 못하고, 성령의 은사들도 소홀히 여겼던 죄인들이지만, 떨리는 마음으로 회개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용서의 은총을 믿고 주님 앞에 머리를 숙였사오니, 저희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너희 야곱의 족속아 어찌 이르기를 여호와의 영이 성급하시다 하겠느냐 그의 행위가 이러하시다 하겠느냐 나의 말이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유익하지 아니하냐(미가2:7)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첫 번째 주일이자, 세계교회가 정한 삼위일체주일이면서, 감리교회가 정한 웨슬리 회심기념주일이다.

사람은 변화되긴 어렵지만, 성령이 찾아오셔서 가능케 하신다. 우리의 마음을 만져주시고, 녹여주시고, 새롭게 하신다. 웨슬리의 회심사건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래서이다.

삼위일체주일은 성부, 성자, 성령의 한 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기억하는 주일이다.

이 시간 삼위일체 하나님, 한 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켜주시고 은총을 받은 자로 살아가도록 임하시기를 축원한다.

 

  1. 의로움에 대한 우월감

오늘 말씀부터 살펴보겠다. 이 말씀의 목적에 대해서 누가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비유로 하신 말씀”이라고 전하고 있다.

 

1-1.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다른 하나는 세리다.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다. 자기가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이만큼’ 의롭게 살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도 드릴 수 있다. 이런 경건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임에 틀림없다. 스스로, 참 모범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께 어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2초) 세리다.

‘세리와 같지 않음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 삶이 주어진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다.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반면에 세리는 어떤가? 그는 죄책감 때문에, 하나님께 앞에서 눈을 들지도 못한다. 이것으로 봐서 그는 적어도 양심이 살아있다. 가책을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다만’이라는 단어에 주목해보자. 그는 ‘다만’ 가슴을 치고, 스스로 죄인임을 한탄하면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했다. 그뿐이다. 감히 드릴 감사도 없었고, 공로나 자랑도 없었다.

 

1-3. 여러분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물론 개인이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는 것과 죄인으로 여기는 것을 객관적인 것이라 말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이다.

‘내가 저런 사람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이런 식으로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이 얼마나 세상의 부조리로부터 무지한 말인 줄 아는가?

로마의 식민질서 세계 속에서 경제적인 궁핍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세리는 고율의 세금을 거둬들였다. 이것을 수행하는 본인 자신도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 같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 ‘너무하다 싶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고율의 세금은 누가 정했을까? 그리고 어디로 갔겠는가? 일부는 로마로 보내졌다. 하지만, 사실은 성전세, 인두세 등 각종 명목으로 대부분 이스라엘의 국비였다.

국회의원이나 정부관료들이 국민들을 무시하면 안되는 이유는 이래서 그렇다. 말단 공무원이나 사원들, 직원들에게 함부로 해서는 안되는 이유도 예나 지금이나 같다.

따지고 보면 바리새인은 세리가 거둬들인 세금에서, 국비로 지원을 받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 더러운 일은 세리가 하지만 그 호사는 바리새인이 누리는 꼴이다.

이렇게 본다면 바리새인은 주관적으로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지 모르지만 객관적으로는, 꼭 그렇지는 않고, 세리는 죄인으로 여겼는지 모르지만, 비참한 현실을 자기 책임인양 뒤집어쓰기에는 구조적 부조리가 컸다.

 

1-4. 주님은 이 둘 중에,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씀하신다. 이유가 뭘까? 이런 부조리한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신 말씀은 아닌 것 같다. 사회구조적인 측면이라 이렇다고 하더라도 태도면에서 보자. 바리새인의 태도가 나쁜가? 물론 남을 무시하는 태도는 문제다. 그러나 주어진 삶에 대한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게, 잘 못인가? 반면 세리의 태도는 무조건 괜찮은가? 솔직히 말해 세리로 대변되는 유(類)의 사람이 되기 싫은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 아닌가? 적어도 세리의 고백이 진솔하다면, 바리새인의 감사도 진솔하다고 놓고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1. 도우시는 하나님

2-1. 질문을 바꾸어서 이렇게 생각해봤다. 누구나, 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란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시고 특별한 은혜를 더하시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주님은 누구에게 그렇게 하시는가?

 

2-2. 하나님의 도우심이란 무엇인가?

①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았다. 사마리아가 아람군대에 에워싸였을 때, 엘리사의 말대로 군대가 물러갔다. 아람군대가 엘리사를 포위했을 때, 그 사환이 겁을 먹고 두려워하자, 엘리사는 그가 눈을 열어 보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때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지키고 있음을 보았다. 히스기야와 예루살렘이 앗수르 군대에 포위당했지만, 다음날 모두 도망가고 사라졌다. 우리 인생에서 수많은 일에 휩싸이고 괴로움을 당할 때, 하나님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건져주시고 피할 길을 내시며 인도하신다.

②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한다. 다윗은 사울로부터 늘 감시를 받고, 아기스 왕과 신하들로부터 의심을 받았다. 엄청난 스트레스다. 그가 진심을 통하며 믿을 만한 사람은 드물었지만, 아비가일 같은 현명한 여인을 만났고, 목마른 다윗을 위해 적진에 몰래 들어가 물을 떠다준 세 용사들을 통해, 목숨을 함께 나눌 사람들도 있음을 발견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구름기둥, 불기둥을 허락하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허락하시고, 반석에서 물이 솟게 하셨다. 하나님을 체험한 인생들은 모두가 마찬가지다. 답답한 일을 당해도 위로와 소망을 갖게 된다.

③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 나아만이 질병 때문에 고통받을 때, 주께서 고치시고 치료하셨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갔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형통케 하셨고, 이삭이 그랄 목자들의 횡포에 당하기만 한 것 같지만 하나님은 마침내 그가 거부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뼈를 치셨으나 브니엘의 새아침을 맞았다.

④ 이처럼 하나님께서 돕는 인생은 소망이 있고, 복이 넘친다. 그래서 시편의 곳곳에서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2) 고백한다. 우리인생에서 꼭 필요한 것은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힘도 아니다. 우리의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을 사모하라.

 

2-3.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인생을 도우신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무엇인가?

 

자기가 해달라고 하는 대로 해주시는 것이 도움이 아니다. 나의 필요를 채우고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는 것이 도움이 아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이런 신앙의 모습은, 상당히 자기의 의를 드러내려고 한다. 자기도 모르는 은밀한 그 유혹에 빠진다. 그리고 그 영광을 가리는 경우가 많다.

 

오늘 말씀의 의도를 잘 알 수 있는 9절을 다시 보자.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별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어 보인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괜찮은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사람에게, 은총을 입어 변화된 행복을 삶을 살기를 바라는 사람에게, 가장 큰 걸림은 무엇인가? 이점을 분명히 마음에 새기시길 바란다. 자기 의를 드러내려는 마음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무시하고 멸시하는 태도이다. 여러분 혹시 이 때문에, 하나님의 응답과 도우심과 은총을 스스로 차단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라.

통화가 끊어지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상대가 끊거나 내가 끊으면 된다. 교만하면 하나님이 끊고, 자만하면 내가 끊는 것이다. 빈 수화기에 대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다고 하면서, 스스로 의롭게 보이려하고, 자만하고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타인을 멸시하고 함부로 대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도움이 임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예배를 하는 것도 자기 의를 드러내려 하면,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내용은 없다. 자기의 의를 드려내려 하면, 하나님에 대한 것은 사모하는 열심이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심은 찾아보기 힘들다. 하나님에 대한 것을 사모하다가 실족한다. 이 때문에 불평, 불만, 부정적인 입술의 말의 생기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에게는 실족함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나님의 뜻대로 완전할 수 없음을 깨닫고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진 것은 아닌지 염려하는 사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함 때문에 자괴감을 느끼는 사람, 이런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이 품으시는 마음이 있다. 자비와 긍휼이다.

 

3.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3-1. 여러분, 왜 주님은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갔다고 말씀하셨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단순히 죄인이고 불쌍해서, 주님은 이런 사람들의 친구이시기 때문인가?

3-2. ‘의롭게 보이려는 마음이란 게 무엇인가?’ 바로 이런 것이다. 바울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고 했다. 가말리엘의 문하생을 지내기도 했고, 누구보다 흠이 없고 완벽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남들에게 비춰진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남들이 모르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았다. 자신만 알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 말이다. 그것을 모르는 척하고 사는 사람도 있지만, 그는 외면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7:19,22-23)

 

여러분, 남에게 의롭게 보이려는 일에 너무나 집중한 나머지,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보이려는 일에는 소홀한 것은 아닌가?

 

그는 자신의 속사람 때문에 탄식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내 지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가 탄식했던 이유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 앞에 자신을 솔직히 드리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고백하는 이에게, 성령이 주시는 마음이 있다.

 

3-3. 바울은 바로 이 은혜를 깨닫는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1-2)

 

이런 은혜를 깨닫자 그에게 또한 찾아온 것은 믿음과 확신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8-39)

 

또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도록 도우시는 성령의 증거를 확신했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8:26-27)

 

3-4.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말씀은 무엇인가? 바로 이런 것 아니겠는가?

오늘 예배드리면서 예배를 드렸다는 안도감과 자만심을 가지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예수를 통해 용서하시고 사랑하신다는 확신과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 성령의 역사와 증거가 나타날 것을 믿고, 그 체험을 안고 삶의 자리에 들어갔다는 것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게 보이려는(어쩌면 가식적일지도 모르는) 마음(남들에게 보여지는 것)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 아는 솔직한 마음(그것이 부끄러운 것일지라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 할 때,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3-5. 어떻게 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갈 담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주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맞아주신다.

이 시간 성령님께서, 우리 스스로가 의롭다 여겼던 부분이 자만과 교만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해주시기를 바란다. 의롭게 여겨지려고 했던 모든 것을 주님께 내려놓고, 대신에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인한 은혜를 입고 세상에 나아가길 원한다.

또한 누구라도 멸시하지 말고, 그가 악역을 맡은 자라면, 그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라. 힘이 부족하면 기도하라.

 

오늘 제목을 우월과 포월로 잡았다. 우월은 내가 붙들고 있고 가진 것에 대한 마음이다. 포월은 나를 붙드시고 가지신 분의 마음이다. 고린도후서4:7-10은 이렇게 말씀한다.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 8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 9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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