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29일 성령강림절 후 2주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사랑의 하나님, 복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섭리 속에 푸른 숲이 성장에 박차를 가하며, 농부는 희망을 가슴 가득히 채우고 바쁜 일손을 놀리는 계절에, 갈급한 심령을 적실 생명의 물을 바라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은혜로 심령이 새로워지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시64:10)

 

 

  1. 대결

오늘 말씀은 굉장히 유명하다. 엘리야와 바알선지자 450명과의 갈멜산에서의 대결.

 

극심한 이스라엘의 가뭄에, 온 시내가 마르고 집집마다 생계가 막막하자, 생을 포기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아합은 이것에 대해, 엘리야 탓만 했다. 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못했다. 하나님을 배역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이렇다. 자기를 성찰하지 못한다.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수배했던 엘리야를 보자마자, 한 말이다.

 

왜, 엘리야 때문이라고 생각했을까?

 

약 3년 전의 일이다. 엘리야가 아합을 찾아왔다. 하나님께서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찾아보기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자취를 감췄다. 아합은 저주라고 생각했다. 잠언은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이 잡히느니라.” 말씀했는데, 3년이면, 처음엔 엘리야 탓을 했더라도, 나중엔 충분히 자신을 성찰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이런 사람은 꼭 집어 말해줘야 하나보다. 그렇지 않으면 모르나보다.

엘리야가 응수했다.

 

‘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리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18)

 

사실, 굉장히 의문이고 아이러니하다. 바알이라고 하는 풍요와 번영의 신을 따르는데, 극심한 가뭄과 기근을 겪고 있다니 말이다. 그렇다면 뭔가 거짓이나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의심해야 한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가? 이유가 있다. 잠시 뒤에 그 내막을 말씀드리겠다.

 

엘리야가 이런 제안을 한다.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갈멜산으로 모이게 해서 대결해보자고 말이다. 아세라 선지자 400명은 이 대결에 나오지 않았다. 그 이유를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지만, 이미 바알선지자 450명과의 대결도 말이 안된다. 바알선지자들의 입장으로 봐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인데, 왕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었다. 아세라 선지자들은 악독한 왕비였던 이세벨의 휘하에 있으니 자존심 상하는 일을 피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룰은 이렇다. 송아지 둘로 각을 떠서 각자의 나무 위에 올려놓고, 서로 자기의 신의 이름을 부르며 간구한다. 그래서 불로 응답하는 쪽이 이기는 것이다. 이 룰은 누구에게 유리한 방식일까?

 

‘아하, 쉬운 일이다.’ 바알선지자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은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는 낯선 것이었지만 송아지로 각을 떠서 나무 위에 얹고 불태우는 것은 자기들에게 익숙하고 유리한 것이었다.

 

 

  1. 바알 선지자들의 행위

25, “너희는 많으니 먼저,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먼저 바알 선지자들이 나섰다. 합창을 하듯 기도한다.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그 모아진 소리는 웅장했다. 금방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정도였다. 그런데 잠시 뒤, 그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했다. 정적이 흘렀다.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모인 백성들은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26, 그러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본격적으로 빌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다.

3시간 정도 시간이 흘러 정오가 됐는데도 감감무소식이다.

 

엘리야가 조롱한다. “더 큰 소리로 불러보라.ㅎㅎ고 말이다.

 

27절, “그가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사람들이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는데, 엘리야가 그냥 하는 조롱이 아니다. 뼈가 있다. 바알의 선지자들은 평소 이런 이유를 들면서 사람들을 현혹시켰고 눈이 멀게 했다. 바알의 응답을 위해서는 더 많은 공로와 정성이 필요하고 잠든 바알을 깨우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그것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도둑질하고 갈취나 다를 바 없는 짓을 했다. 심지어 성창(매춘)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바알과 아세라를 자극할 수 있다고까지 가르쳤다.

 

분위기는 점점 어두워지고, 백성들이 지켜보고 있었기에, 바알선지자들은 비장해졌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아시는가? 어리석은 사람은 거짓이 드러나도 진실을 받아들이려고 하거나 눈뜨려고 하지 않는다. 그럴만한 용기가 없다. 특히나 거짓된 신앙에 매여 있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이단이나 사이비에 빠지면, 나오기 어려운 이유가 그래서다. 여러분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알고,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수법이 있다. 어떤 수작을 벌였을까?

 

28절,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 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이 대목에 대해 학자들은 바알의 동정심을 얻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저는 그것을 빙자한 바알 선지자들의 수법이라고 본다. 백성들을 묶어두고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저질스러운 행동이다. 자해를 하고 스스로를 괴롭게 하면, 마음 약한 사람들은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공포심과 두려움도 함께 들기 때문에 빠져나가지 못한다. 오히려 더 맹신적으로 바뀔 수 있다.

 

29절을 보라. 이미 정오가 지났고, 또 한참 지나서 저녁 소제 드릴 때가 됐다. 그들은 미친 듯이 한참을 떠들어 댔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응답하는 자나 돌보는 자도 없었다. 결국 그 열기는 사그라들었고, 여지가 없었다. 끝났다.

  1. 이제 엘리야 차례

이제 엘리야 차례다. 우선 백성들을 자기에게로 모이게 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다음의 세세한 행동을 통해서 가늠해 볼 수 있는데, 저는 이런 행동들이 참 좋다. 그것을 잠시 뒤로 하자.

엘리야는 제단에 도랑을 만들게 하고, 물을 네 통이나 채워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붓게 했다. 이것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또다시 그렇게 하게하고, 세 번씩이나 그렇게 했다. 물이 제단과 나무에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가득 찼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 내게 응답하소서.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백성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짤막하면서도 간결하게 기도를 올렸다. 요란을 떨었던 바알 선지자들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라. 하나님의 임재는 강렬했다. 38절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그 광경을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1. 마음에 정하라.

오늘의 말씀이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가? 21절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는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 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1) 하나님은 결단하는 신앙을 갖기를 원하신다. 신앙은 머뭇거리거나 다음으로 미뤄서는 안된다. 내가 유익으로 삼던 것, 즐거움으로 삼던 것,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던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면, 새로운 소망과 함께 분명한 약속이 있다. 복이 있다. 승리를 주신다. 야곱과 가솔들이 그랬고, 여호수아와 그 백성들도 그랬다. 심지어 좀 모습이 다르기는 하지만, 룻이 시어머니를 따르며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기로 했기에, 그 자손에서 다윗이라는 위대한 왕이 배출된 것 아닌가?

복잡한 세상에서 삼지사방으로 마음을 빼앗기며 살았던 저와 여러분에게 이러한 결단이 있기를 주님은 바라신다.

 

2) 여러분의 심령에는 불붙기를 바라는 믿음의 제단이 있는가? 그렇다면 주님은 성령충만한 은혜로 불붙기를 원하신다. 우리 스스로 불을 붙일 수 있는가? 그 마음의 불은 자신의 의지만 가지고 되지 않는다. 물질과 보상이면 될까? 천만에다. 잠시잠깐 불붙을 수는 있겠지만, 곧 꺼져버리거나 속을 시커멓게 태울 뿐이다.

그 제단에 불을 붙여주실 수 있는 분은 누구신가? 우리의 시든 가슴에 열정과 용기를 주시는 분은 누구신가? 힘과 능력을 주시는 분은 누구신가? 우리의 심령을 통치하고 역사하실 분은 누구신가? 마른 막대기와 같고 타다 남은 장작 같은 심령에 다시 불을 지펴 활활 타오르게 하실 분은 누구신가? 그래서 마음의 향기를 흠향하실 분이 누구신가?

여러분, 이 시간 확신을 가지시기 바란다. 주님은 성령으로 임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심령 가운데 뜨거운 주님의 사랑이 불타오르기를 원하신다. 시끄럽고 요란함이 아니라 단 한 마디라도 간절함과 진정한 사모함에 주님은 성령의 은혜로 기름부으신다. 힘을 내어 용기를 내게 하시고 일어나 승리하기를 바라신다.

 

3) 29절을 보라. “미친 듯이 떠들어” 이 때 사용된 동사가 ‘나바’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사울에게 악신이 들어서 그가 괴로움을 당할 때도 쓰였다. 세속적인 더러운 영이 ‘미친듯이 떠들어 대게 만든다.’ 바알의 우상이 풍요와 번영으로 대변되는 우상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생각해보자. 물질에 대한 걱정이 우리에게 욕심 사납게 속살거린다. 매사 돈돈돈 하게 만들기도 하고, 세상은 물질을 최우선 가치로 삼게 만든다. 물질주의에 영혼을 팔아버린다. 물질주의와 그 우상이 여러분 심령 속에서 여전히 시끄럽고 요란하고 정신산란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여러분 물질과 세상의 우상은 그 무엇도 여러분의 심령에 불 지필 수 없다. 또 그것을 용납하지 말라. 방해하게 만든다.

 

4) 여러분 오늘의 말씀이 이스라엘에 가뭄이 극심하던 때에,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와 대결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길 바란다. 그렇다면 대결에서 승리한 것, 그 자체로 결론이 맺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본문은 41절에서 46절까지의 말씀에 대한 중요한 설명이다.

가뭄이 그치고 비가 내렸다. 누가 하시는 일인가? 주님은 믿는 자에게 성령의 불이 지펴진 자에게 또한 이런 소망을 주신다. 여러분의 삶의 큰 복의 단비가 내릴 줄 믿고 바라보라.

 

그렇다면 우리가 복되신 하나님께 나아가기로 결단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 무엇일까? 30절을 보라.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바로 이것이다. 무너진 제단을 쌓고, 훼파된 제단을 보수하며, 회복하는 일, 말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과 열심은 어떤지 점검하라.

제단을 쌓게 한 엘리야의 세세한 행동에서 가늠해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이스라엘 지파의 수효를 따라 12돌을 취해서 제단수축의 마감재로 삼았다. 무엇을 엿볼 수 있는가? 지켜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12돌을 취하게 한 것 자체가 반향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적어도 유다지파는,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으니, 배제하거나 지워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을 밀어내고 배타하고 외면하고 제외시키고 싶은 대상들을 마음에 두려고 한다. 그런데 엘리야는 미우나 고우나, 이편저편이 아니라 모든 백성을 품고자 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받아들이고 염원하는 마음이 있다. 참 따뜻한 마음이다.

저는 이런 마음으로 우리 교회가 세워지길 바란다. 아니 주님이 바라신다. 서로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위해 독려하고, 손을 맞잡고 격려하며 이겨내자. 사랑의 마음으로 예배를 회복하고, 마음의 제단을 회복하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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