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15일 성령강림절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계셔서, 저희를 거듭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완전하게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성령 강림절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다소곳이 고개를 든 더운 공기가 온 대지를 휘감는 계절에, 연약한 가슴에 뜨거운 풀무질을 해 주실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불의와 죄악은 불살라지고 성령으로 달구어진 사랑의 마음만 남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2,4)
- 목수의 아들 예수
#1 목수가 만든 의자
몇몇 사진을 보자. 저는 이 사진을 보면서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이 참 반갑게 여겨졌다.
(사진 )
https://www.facebook.com/ahn.junho.16/media_set?set=a.1718714708371157.1073741852.100006979334337&type=3
선배목사가 특별한 목회를 한다. 커피와 목공. 처음에 인테리어 견적이 많이 들어서 직접 하다 보니, 아예 목수가 됐다. 처음에 의자를 만들어 본 게 계기가 됐다. 그래서 의자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다.
여러분은 이 중에서 어떤 의자가 탐나시는가?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가 만들고 싶은 의자를 만들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타인에게도 좋은 의자를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 말이다.
그동안 목수는 그저 천편일률적으로 나무로 된 의자, 책상, 옷장 등을 만드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것을 생산해내는 것은 기계공장, 생산라인이다. 그런데 목수는 그렇지 않다. 사용자의 형편에 따라, 정작 당사자도 생각하지 못한 것까지 고려하여, 그에 걸맞는 제품을 만들어 준다.
#2 둘러봄의 방향감각
저는 종종 어떤 모습의 목회를 할까, 생각하곤 한다. 아직 소신과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다. 길을 잃지 않고 방향을 잃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도 둘러봄이 필요하다. 이 둘러봄을 통한 방향감각을 상실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특별히 맡겨주신 사명과 소명이 무엇인지 잃어버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삯꾼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잠언27:23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게 마음을 두라.”
#3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이었다는 것이 반가운 이유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이었다는 것이 반가운 이유는 이래서이다. 어떤 사용자의 형편을 고려해서 최고의 걸작품을 만들어 내는 목수의 자질을 어려서부터 보고 배웠을 것이 분명해보여서 말이다. 예수님은 그런 마음으로 사람들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셨다. 병자들, 연약한 이들, 죄인들, 어려운 문제를 만난 이들, 괴로움의 고통과 슬픔에 빠진 이들에게 마음을 두셨다. 그리고 목수처럼 각자에게 걸맞는 은혜와 평안을 선물해주셨다.
제가 동일하게 목회할 수 있도록 여러분도 도와주시기 바란다. 어떤 분들은 남의 문제들만 들고 오는 분들도 있다. 그것도 필요하지만 바로 자신의 문제로 기도를 요청하고 심방을 청해야 하지 않겠는가?
제가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허황된 생각 때문이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 다만 부활하신 주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이다. 주님은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그분에게는 능력이 있음을 믿는다.
#4 예수의 이름을 선포하는 목회
저의 목회 방향은 바로 이런 예수님을 닮고 따라가는 것이다. 우리 주님을 만나도록, 역사가 일어나도록 기도하고, 위임하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있던 앉은뱅이에게, ‘내게 은과 금은 없으나 내게 있는 이것을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선포했던 것처럼, 여러분을 도울 힘과 능력은 없으나 예수님의 이름과 복음을 전할 수 있다.
그러기에 여러분 이것을 믿으며 확신을 가지시기 바란다. 부활하신 주님은 여전히 저와 여러분에게 찾아오셔서, 우리의 형편을 살피시며, 영혼이 잘됨과 같이 범사가 잘되기를 바라신다. 도움이 되시고 힘과 능력이 되어주신다.
- 성령을 주시리라
#1 성령을 통해 주시는 힘과 능력
오늘은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절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이르셨다.
‘내 증인이 되리라.’는 것은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드러내라는 이야기겠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이라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 어디도 예외가 없다는 말씀일 것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이라는 것은 주님에 대한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만일’이라는 가정이나 조건이 아니다. 주님의 약속이다. 그러니까,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어떤 형편에서건 주님의 현존을 드러내시며 힘과 능력이 되어주시며 승리하길 바라신다.
#2 스룹바벨이 처한 상황
누구나 때로는 어려움을 당한다. 건강상의 문제든, 경제적인 문제든, 관계의 문제들, 안 좋은 일을 당한다. 그때 ‘내가 이 일을 어떻게 감당하나?!’, ‘이 사람들을 내가 어찌 감당하나나?!’ 큰 파도와 폭풍으로 에워싸인 나를 발견한다. 처음에는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시작했지만 낙심이 찾아오고, 의욕적으로 나섰던 일이 도리어 피하고 싶은 일, 후회가 돼서 쫓길 때도 있다. 처음에는 쉽게 생각하고 시작했던 일이, 막상 대하고 보니까,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넘어지기도 한다.
스룹바벨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어려움이 찾아왔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바벨론의 포로에서 생환했다. 예루살렘은 황폐했고 옛 시온성의 명성은 온데간데없었다.
‘다시 이곳에 성전을 세우고 하나님을 예배하자.’
그의 마음에 이런 소망이 뜨겁게 불타올랐다. 옛 성전의 도면을 복원하고, 재정을 충당할 방안을 세우고, 돌아온 사람들이 힘을 합치면, 시간이 얼마가 들더라도 끝내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 내다봤다. / 그 재건을 위해 첫 삽을 뜨고, 기초가 놓였을 때, 그 기쁨과 환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중에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제일 컸다. 옛날에 성전이 있던 자리에, 그 모습! 그것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보니, 감격에 겨워 대성통곡하고 말았다.
그런데 잘 알다시피, 그 꿈은 곧 좌초되고 말았다. 시기질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훼방꾼들이 돼서 바벨론 공관에 거짓보고(성전 짓는 일을 성벽을 짓는다고)를 하고, 뇌물을 써서 공사 중단을 위한 로비를 했다. 유언비어와 악성루머를 퍼뜨려 흔들어 놓았다. ; 여담이지만, 교회가 세워지고 부흥할 때에는 어떤 영적인 방해들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히 물리치고 이기고 승리해야 한다. 예수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굴복한다.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진다.
순수한 믿음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악독하기로 소문난 정치꾼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 파렴치한 말과 기름보다 미끄러운 혀놀림으로 스룹바벨과 그와 함께 뜻을 모았던 사람들을 괴롭혔다.
세상은 작은 말이라도 그 신의와 그것을 지키려는 말의 성실성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이익관계와 욕심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그렇다. 진실성을 몰라서가 아니라 욕심 때문에 눈감아 버린다.
공사는 중단됐다. 시간이 점점 길어지자, 사람들은 지쳐갔고, 첫 삽을 뜰 때의 열의와 의욕은 점차 식어갔다. 나중에는 혼자서 감당해야할 일이 되고 말았다.
우리도 이런 일을 당할 때가 있지 않은가? 그때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신앙을 버리는가? 실족하는가? 결국에는 자기 살길을 찾아 인간적인 방법을 택하는가? 기도하지 않고 포기하는가?
#3 힘과 영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스룹바벨에게 스가랴라는 주의 종이 곁에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가?!
오늘 말씀 전에, 스가랴 3장은 스룹바벨과 함께 활동하던 제사장 여호수아에 대해, 불신앙적이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가득 찬 사람들의 시시비비에 대해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내용이다. 그리고 스가랴 4장은 스룹바벨의 비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형편을 살피시고 스가랴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
여러분, 세상일에 힘이 부치고 능력이 되지 않아, 살 맛 나지 않고 소망까지 잃은 이들이 있다면, 오늘 주님은 이 말씀을 듣기를 원하신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여러분, 몇 차례 자세히 소개한 바가 있어, 내용을 건너뛰고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스룹바벨은 중단했던 공사를 재개하고 결국 성전을 완공했다. 공교롭게도 이 일이 페르시아에 알려졌고(이 과정을 보면 인간의 지혜가 얼마나 어리석은 지를 알 수 있다.), 왕명으로, 어느 누구도 성전건축을 방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왕은 넉넉한 재정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성전을 재건하도록 했다.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하나님께서 훼방꾼들의 궤휼 가운데 개입하시고 역사하신다. 사람을 통해서 예비하고 준비하신 섭리를 무엇으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어려움 가운데 사분오열로 나눠질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한 마음 한 뜻과 용기를 가지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라 설명할 수 있을까?
#4 전도서의 지혜
전도서의 이런 말씀이 떠올랐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전9:11)
‘힘이 있으면 정말 다 되는 것일까? 능력이 있으면 정말 문제가 잘 풀리는 것일까?’ 전도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런 예화를 들려준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5:10)
그러면서
“재산이 많아지면 먹는 자들도 많아지나니 그 소유주들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 (전5:11-12)
힘으로 모든 것이 다 되는가? 능력만 있으면 다인가? 반대로 없으면 안되는가? 여러분이 깨닫고 판단하라.
#5 7번째 눈
7-9절을 보면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가 주의 종 스가랴를 통해서 선포되고 있다. 그는 주의 종을 통한 축복의 말씀을 믿고 힘과 용기를 냈다. 여러분도 동일하게 힘과 용기를 내라.
성경은 스가랴가 일곱 등잔에 대한 환상을 동시에 전하고 있다. 환상으로 본 일곱 등잔의 의미를 물으니, 10절에서,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말씀하셨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오감을 가졌고 6감을 가진 사람을 통찰력이 뛰어나고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7번째 눈이 있으시다. 하나님께서 그 눈으로 우리의 형편과 처지와 상황을 다 아시지 않겠는가? 여러분의 인생을 모르시는가? 여러분의 약함을 모르시는가? 여러분의 상처를 모르시는가? 무엇이 있어야 할지, 혹은 없어야 할지 모르시는가?
#6 성령의 역사란
여러분, 특별히 오늘 성령강림절을 맞아, 그 역사란 무엇인가? 절대 주의하라. 어떤 점쟁이나 무당과 같은 신기(神氣) 들린 능력이 아니다.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1) 가장 중요한 역사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깨닫게 하는 역사라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다(고전12:3).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죄와 사망과 죽음과 저주에서 건져주시는 구주, 바로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는 것이다. 2) 또한 로마서8장 16절을 보면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한다. 여러분 이 두 가지 골격이 빠진 것은 성령의 역사인지 의심해봐야 한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다.(딤후1:7)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더하고, 복 받는 하나님의 자녀임이 내 안에서 확신과 증거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여러분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우리 각자의 처지와 형편에 따라 그에 걸맞는 은혜와 힘과 능력을 공급해주시지 않겠는가? 그 믿음과 확신을 품으시길 주님이 바라신다.
성령의 역사 때문에 마른 뼈들이 되살아났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을 때, 흩어졌던 뼈들이 이 뼈 저 뼈 맞기 시작하더니 힘줄이 생기고 살가죽이 덮였다. 여기까지는 사람의 힘으로도 할 수 있다. 퍼즐을 맞추듯, 인간의 과학과 기술로도 살을 입힐 수 있다. 그런데, 생기는 없었다. 그러나 예언자가 또 다시 대언하여, ‘생기야 사방에서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그 때,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역사가 나타났다. 할렐루야! //
사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없으면 흩어지는 안개요, 들풀처럼 말라버릴 풀이요, 오늘 피었다가 내일 시드는 꽃이요, 한 마디로 마른 뼈와 같은 존재들이다. 그러기에 이 시간 선포한다. 성령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확신과 여러분의 심령 가운데 넘치길 축원한다. 그 힘과 용기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길 주님이 바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