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8일 부활절 7주, 승천주일, 어버이주일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하나 되어 가정을 이루도록 하신 하나님, 오늘 뜻깊은 어버이 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따뜻한 햇살 너머로 노란 송홧가루가 대지 위에 짙게 내려앉는 계절에, 그간의 불효에서 벗어나 효도하는 자녀가 되기를 바라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머리 숙인 저희에게 부모님에 대한 사랑이 다시 들끓어 오르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

 

  1. 모범적인 효성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이스라엘로 왔다. 남편도 없이 시어머니만 따라, 낯선 땅에 와서, 시모를 섬긴다는 것은 보통이 아니다. 그런데 복을 받는다. 복을 받는 사람들을 보면 당장의 이익보다는 어려움과 손해가 따르더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뜻에 순종한다.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이다. 아버지와 번번이 뜻이 달라 부딪쳤다. 아버지의 모습이 실망스러웠다. 자주 공의에서 벗어나고 위엄있는 왕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졸장부처럼 보였다. 그래도 이들의 최후를 보면 대단하다. 길보아 전장에서 최후를 같이 한다. 아무리 못난 아버지라도, 갈등이 있었다고 해도, 아버지를 홀로 전장에 보낼 수 없어, 동생들과 함께 참전한다. 그리고 장렬히 전사했다. 정말, 이스라엘에서 다시없을, 드문 용사였다. 다윗은 이 두 부자의 용사에게 이런 조가를 지어 바쳤다.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독수리 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삼하2:23)

 

이 이야기들은 부모에 대한 자녀의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런 명료한 모범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말처럼 쉽지 않은, 어떤 상황과 이유가 있다.

 

 

  1. 빗나간 모정

에서의 가계도를 상기해보자.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그와 결혼한 리브가. 그 사이에 에서와 야곱 쌍둥이 형제가 있었다. 에서를 중심으로 보자면, 아버지 이삭, 어머니 리브가, 쌍둥이 동생 야곱. 에서는 이미 기혼이고 야곱은 미혼이다.

그런데 에서에게 어머니는 참 ‘이해할 수 없는 분’이다. 객관적으로 봐도 리브가는 정상적이지 않아 보인다. 아들을 편애했다. 야곱은 위하고 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야곱은 뭘 해도 괜찮지만 에서는 뭘 해도 안됐다. 특히 당시 풍속과 관행을 역행하면서까지 무리수를 뒀다.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이 돌아가도록 나서서 거짓된 행동을 꾸몄다. 아무리 모정 때문이라지만 이 정도면 ‘빗나간 모정’이다.

 

 

  1. 이해할 수 없는 어머니, 이해하는 남편

그런데 여러분, 아들과 남편의 차이가 뭔 줄 아는가?

 

# 우스개 이야기 1) 밤늦게 남편이 돌아와 밥 차려 달라고 하면 ‘아직까지 안 먹고 뭐했냐?’고 잔소리 한다. 그런데 아들이 차려달라고 하면 그 밤에도 잔치상이라도 차려줄 수 있다고 한다. 남편이 꼭 필요한 데 쓰라고 카드를 주면 마음껏 긁고 다닌다. 그런데 아들이 마음껏 쓰라고 줘도 아들이 준 카드는 쓰지 않는다.

 

# 우스개 이야기 2) 시어머니들의 이중 잣대이야기가 또 있다. 아들이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나가면 하늘같은 남편에게 그렇게 한다고 시어머니들이 싫어한다. 그런데 사위가 그렇게 하면 자상하고 착하다고 칭찬한다고 한다.

 

크리스천의 생활방식 만큼은 반대로 살 수는 없을까? 이것도 십자가의 삶이요, 섬김의 삶이요, 예수의 삶일 텐데, 그러면 행복이 따라올 텐데,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

 

# 우스개 이야기 3) 어느 분이 인터넷 게시판에 쓴 글이다. 내용을 간추리면, 저녁준비를 하다가 손을 베었다. 식사를 마치고 난 뒤에 아들에게 설거지를 부탁하니까, 싫다고 내뺐다. 남편이 들어왔는데, 손을 베었다고 하니까, 그러면 음식을 시켜먹기라도 하지, 그랬냐며 핀잔을 줬다. 그러더니 설거지를 싹 해놓고, 행주까지 깨끗이 삶아 빨아서 널어줬단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아들 키워봐야 소용없다는 말이 생각나네요. 이담에 자기 처에게는 하잔 대로 하면서 나에게는 그렇지 않을 게 뻔합니다. 우리 남편도 그랬으니까요.”

 

아들과 남편의 차이는 뭔가? 결정적인 게 있다. 아들이, 자녀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그 속사정을 남편은 이해한다.

 

오늘 말씀을 보자.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맥락 : 이 대목은 야곱에게 아버지를 속이도록 해서 장자의 축복을 받은 뒤의 내용이다. 그 사실을 이삭도 알았고 에서도 알게 됐다. 27장 33절을 보면 이삭은 “심히 크게 떨며” 놀랬다. 41절을 보면 “내가 야곱을 죽이리라.” 격분했다. 급하게 리브가는 “형이 너를 죽여 한을 풀려 하니 삼촌 라반에게로 가라.”며 야곱을 피신시킨다.

그리고 그 뒤에 46절을 덧붙여 놨다.

 

내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싫어졌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에서의 아내들, 그의 며느리들 때문에 사는 게 싫다고 말을 하고, 야곱까지 그렇게 된다면 인생이 재미없을 거라고 말한다. 마치 사건을 무마하고 책임의 화살을 돌리기 위해 이삭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이런 일을 벌이는 리브가가 이해되질 않는다. 그의 편애와 거짓된 일을 꾸미게 하는 행동은 쉽게 납득할 수 없다. 이 말을 엿듣는 며느리들 입장은 뭐가 될까?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으로 들사람이었고, 야곱은 장막에서만 거주하는 조용한 사람이었다고 성경이 그 캐릭터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그렇다? 설명이 부족하다. 개연성은 있을지 모르지만 사리에 맞지 않다. 자식이라는 존재가 이래서 좋고 저래서 싫고 할 수 있는 존재인가? 그렇지 않다. 이렇게 본다면 비인격적인 성경해석이다. 아무튼 에서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리브가가 이해가 될까?

 

그런데 성경을 보면, 아들이나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남편인 이삭은 다르다는 것이다. 리브가의 말과 그 심정을 이해하고 있다. 28장 1절을 보면 아내 리브가의 속살거림에 결국 그대로 조종되는 모습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한 이불을 덮고 자는 부부간의 교분과 대화를 어찌 남들이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삭은 아내 리브가와 공유하고 있는 것이 있다..

 

창26:34-35 에서가 헷 족속의 여자와 결혼을 했는데, 그것 때문에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

 

그러고 보니까, 성경에서 리브가의 편애하는 모습이 나타난 시점도 바로 그 이후다. 이 지역에 살면서 헷사람들에게 당한 상처를 생각하면 왜 안 그렇겠는가? 그랄 목자들에게 번번이 자기들이 발견해서 파놓은 우물을 억울하게 억지로 빼앗겼고, 약자의 설움이라고 대항하지도 못했다. 텃세와 괄시와 냉대를 당한 세월을 생각하면 리브가의 이런 상처와 아픔의 감정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깊은 내면을 공감하고 있는 사람은, 옳고 그름을 가리고 시시비비만 따지고 있을 수 없다. 그걸 몰라서가 아니라 그의 아픔과 상처를 알기 때문에 말이다. 이것이 아들과 남편의 차이다.

 

그렇더라도 이런 상황을 만났을 때, 주님의 뜻은 무엇일까? ‘주관적인 틀과 감정’에만 갇혀있을 수 없다. 해결의 돌파구는 객관화와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을 만났을 때, 주님의 뜻은 무엇일까? 어머니든 자녀든, 믿음 있는 자의 행동은 무엇인가?

 

아무리 헷족속의 며느리들이라고 해서 편견과 자기 상처를 투사해서 동일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경상도든, 전라도든, 충청도든, 강원도든 어떤 지역 사람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그 지역 사람을 무조건 나쁘게 본다면, 그야말로 편견이고 선입견이다. 저 아이의 부모가 밉다고 해서, 그 아이들까지 미워한다면, 그 아이들은 무슨 잘못이나 죄가 있는가?

 

자기감정 때문에 며느리들을 미워하는 리브가를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다. 입장을 바꿔서 에서의 아내들이 리브가로부터 이유 없이 받는 상처와 그의 편견과 감정 때문에 겪는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음 세대에 일으킬 반감은 어떡하는가? 그 속에 점점 골이 깊어지고 뿌리 깊게 박히게 될 혈연감정과 지역감정을 대물림 되면서 악순환의 구조를 반복할 것인가?

 

주님은 폭력과 죄의 악순환을 끊기를 바라신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게 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 주님은 십자가를 감당하셨고 원수를 원수로 갚지 말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결혼의 문제만이 아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부모와 자녀 세대 간의 차이와 갈등을 경험한다. 물론 가급적이면 부모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고, 그 살아온 삶의 경험과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 그런데 그럴 수 없는 현실이란 게 있다.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1.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아, 특별히 주목해보고자 하는 말씀이 있다. 28장 8-9이다.

 

“에서가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지라.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

 

이 말씀 때문에, 부모 뜻대로 본처들을 버리고 새장가 들었다고, 그것이 효도며, 결국에는 부모 뜻대로 해야 한다고 바로 대입해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그런데 이 말씀에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에서의 태도 때문이다.

에서가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지라.’

 

에서가 부모의 감정을 헤아린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다.

 

가만히 생각해보자. 리브가가 에서에게 시집오기 전에는, 어머니 고향인 밧단아람지역에서 생기 넘치고 활발한 여성이었다. 매력이 넘치고 아름답고 사람들의 인정과 대접과 찬사를 받았던 사람이다. 어느 누구도 함부로 대해도 좋은 사람은 없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타락한 정신이다. 좋은 환경만 만났다면 남부러울 것 없이 고귀한 사람으로 꽃피어났을 것이다. 누구라고 안 그렇겠는가? 타향, 낯선 곳에서 그의 젊은 날을 보냈다. 돌밭 같이 척박하게 여겨지는 향토문화와 상황에 세월은 시들어 버리고, 사람의 가시덤불에 찢기고 찢기는 꽃이었다.

 

에서는 전에는 부모의 정서와 감정과는 무관하게 자기 마음대로만 했다. 틀리다거나 어긋난 것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부모의 입장과 감점을 헤아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이해하고 공감하고 헤아리려고 하고 있다.

아시는가? 작은 태도변화에도 사람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만들 수 있고, 원한까지도 씻어 내릴 수 있다. 그 지점에서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무리한 행동을 반성하고 후회하고 돌아설 수 있다. 그 아픔을 감싸고 품어내고 해결하려는 노력들, 설득도 하고 이해도 구하면서 자비심도 생기고, 긍휼의 마음도 생긴다. 그러면서 협력과 협조의 마음이 생긴다. 나머지는 자신이 믿음으로 감당할 십자가다.

 

어버이 주일에, 오늘 말씀을 통해 적어도 세월에 시들고, 사람의 가시덤불에 찢기면서 자식이라는 열매를 맺기 위해 꽃피웠던 부모님을 헤아리고 생각하는 귀한 날 되기를 바란다.

 

잠언4:3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노라.”

 

엡6:1-3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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